‘인간회복의 등불’사위다
  • 표완수 편집위원 ()
  • 승인 198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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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개혁의 길잡이 사하로프 박사 타계 “내일 싸움 있을 것”보수파 역습 예고하는 유언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다.” 68세를 일기로 12월14일 밤 모스크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안드레이 사하로프박사에 대해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한 말이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 전체의 공식 논평은 사하로프가 “국가의 방위능력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사하로프가 대의원으로 있던 인민대표대회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공적 활동’과 ‘깨어있는 양심’,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신념’을 찬양했다.

한편 부시 미대통령은 “자유를 향한 그의 용기와 헌신을 세계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고, 폴란드의 노조 지도자 바웬사는 그의 죽음이 “소련 및 여타 지역의 개혁운동에 있어서 큰 손실”이라고 아쉬워했다. 또 소련내 보수파의 대표적 인물로 사하로프와 정반대편에 서있는 리가초프는 그가 "남을 헐뜯는 데 반대하고 언제나 정직하고 허심탄회했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고르바초프가 누구보다 슬퍼할 것

많은 세계의 지도자들과 평화애호가들이 사하로프의 죽음을 애도했으나 누구보다도 더 큰 슬픔과 충격을 받은 것은 그의 가족과 고르바초프가 아니었을까?

사하로프는 세상을 떠나기 이틀전까지만 해도 공산당의 권력독점 문제를 놓고 인민대표대회 2차회의에서 고르바초프와 뜨거운 설전을 벌였었다. 공산당의 권력독점과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지지부진함에 대해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때 사하로프의 죽음이 고르바초프에게 얼마만큼 상실감을 안겨주었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지난 2월초 이탈리아 방문 때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르2세를 만난 사하로프는 교황을 가리켜 “빛을 발하는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하로프 자신이 ‘소련의 등불’이었다는 데에 공감한다. 특히 역사적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고르바초프의 ‘위험한 여로’에 사하로프는 등불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암흑과 풍랑 속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선박. 그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선장 고르바초프. 그 옆에서 등불을 들고 암흑 속을 응시하는 노인 사하로프.” <뉴욕 타임즈>는 사하로프와 고르바초프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한 일이 있다.

소련의 오늘과 현재의 동?서관계의 흐름을 조망하는 데 있어 고르바초프와 사하로프의 관계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세계사의 ‘현실’이라면 사하로프는 인류의 ‘이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86년 말경 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맹렬히 비판한 후 80년 1월부터 불가강변의 고리키시에서 유배생활을 해온 사하로프에게 고르바초프가 전화통화를 하면서부터였다. 고르바초프와 전화통화를 한 뒤 사하로프는 그해 12월 유배에서 풀려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당시 소련사회에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방)분위기가 서서히 확산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대표되는 고르바초르의 ‘신사고’는 어떻게 보면 60년대 이후 사하로프가 소련당국의 박해 속에서도 줄기차게 외쳐온 자유와 평화와 인간성회복이란 명제와 거의 궤를 같이한다. 사하로프는 73년에 펴낸 그의 저서 <나의 조국과 세계>에서 소련정부와 시민에 대해 이미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인간적 비참함과 곤경, 적대감과 잔인성, 깊은 피로와 무관심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수십년간 쌓여오면서 사회의 기반을 잠식하고 있다.” “소련시민들은 독재사회의 산물이다.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통합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위선자나 기회주의자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다.”

 

사하로프는 소련체제 개혁의 도덕적 배경

사하로프는 88년 11월에 처음으로 미국방문 길에 올랐다. 공식적으로는 학술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미가 허용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개인자격으로 워싱턴, 뉴욕 등 대도시를 돌며 각계 인사들을 만나고 강연을 했다. 미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이 소련 국내에서 심한 반발에 부딪히고 서방세계에서도 강한 회의의 눈초리를 받고 있던 당시 그는 세계가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을 믿고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사하로프가 귀국할 무렵인 12월초 고르바초프가 역시 미국을 방문, 유엔에서 획기적인 일방적 감군안을 발표했다. 고르바초프는 방미 중 아르메니아대지진으로 급히 귀국했는데 귀국 후 지진피해와 지진으로 인한 민족분규상황을 조사하는데 사하로프 부부를 비공식으로 파견했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 안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던 86년 당시 사하로프는 고르바초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수십년에 걸쳐 소련사회에 누적돼온 독재와 관료체제의 문제점을 과감히 제거하는 데는 강한 도덕적 힘의 배경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 힘의 원천을 고르바초프는 사하로프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바티칸 방문이 이루어지기 10개월전인 지난 2월 사하로프가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이탈리아 공산당계열 일간지 <유니타>는 ‘불굴의 존재 사하로프’라는 제목아래 “만약 모스크바와 바르샤바 시민들이 다시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하로프가 준 교훈 덕분일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지금 세계는 변혁의 큰 물결 속에 있다. 그러나 소련 안에서는 아직도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덫이 곳곳에서 고르바초프를 노리고 있다. 사하로프가 가족에게 남겼다는 마지막 말은 “내일에는 싸움이 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소련당국은 정치국 후보위원 예프게니 프리마코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인민대표대회가 참석할 것이다. 나도 대의원이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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