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80년의 原O와 ‘민주화 면죄부’
  • 김창남(세종대강사 언론학) ()
  • 승인 198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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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회’선정 80년대 10대뉴스를 보고…10년간 사회변화를 재조명한다.

80년대 10년의 시간도 우리 역사 속의 다른 어느 10년에 못지 않게 파란과 변화의 굴곡으로 점철된 연대기를 이루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80년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수많은 과제들이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90년대로 이월되고 있는 지금, 역사를 10년간의 수치단위로 쪼개보는 습관이 한낱 부질없는 호사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80년대의 역사성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래완료’일 수밖에 없음을 염두에 두고 본다 하더라도, 숱한 소용돌이로 채원진 10년의 세월을 역사의 장막뒤편으로 떠나 보내는 심경이 또한 범상할 수만은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진 8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 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불굴의 투쟁과 지난한 희생에 의해 강고하게만 보이던 지배구조에 만만치 않은 변화가 생겨나면서 우리 사회가 결국은 역사의 합법칙성 속에서 진보하고 있음을 확인케 한 시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80년대 벽두를 뒤흔든 엄청난 반동의 소용돌이와 지금 우리 주변에 변혁의 예감을 담은 부산스러운 발걸음들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이른바 5공청산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이 보여주듯 80년대의 끝물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80년대 벽두의 반동의 역사가 낳은 어둠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변혁의 예감은 다만 ‘예감’일 뿐인 것인가.

방송의 영역에서 보는 80년대의 의미 역시 그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80년대에 방송이 겪은 변화와 굴곡은 그 어느 시기에 비해서도 크고 깊었다. 방송의 구조와 위상의 차원에서는 물론 방송 미디어의 기술적 영역, 그리고 시청자의 의식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변화는 폭넓게 나타났다. 그러나 방송영역의 변화는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과정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방송의 80년대 역시 엄청난 반동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몇가지 주목할 만한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80년대초의 상처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로운 연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방송위원회가 발행하는 <방송‘89>는 언론계, 학계, 정계 및 방송유관기구와 현직 방송인들 1백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선정된 ’80년대 방송계 10대뉴스‘의 결과는 바로 그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컬러방송. 독점자본 이익과 무관치 않아

80년대의 방송가 주요 뉴스로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꼽은 10개의 항목은 대개 세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80년의 반동의 시기에 정치적 격랑과 연관을 가지며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고, 또 하나는 방송매체의 위력과 중요성을 폭넓게 확인시킨 대규모의 미디어 이벤트들이며, 다른 하나는 주로 80년대 후반 이른바 민주화의 이슈가 사회전반의 지도적 이념으로 되면서 이루어진 일련의 ‘변화’에 연관된 사건들이다.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최대의 뉴스로 꼽은 ‘방송사 통폐합?’, ‘방송언론인의 대량해직’과 ‘공영방송제도 도입’등은 모두 80년 제5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나타난, 이를테면 80년대 방송사의 어두운 측면을 대표하는 사건들이다.

TBC, DBS등 다수의 민간방송을 KBS에 흡수시키고 MBC를 KBS의 자회사로 만들었으며 CBS를 순수 선교방송으로 제한한 것으로 요약되는 방송사 통폐합은 공익성 이념과 함께 공영방송체제의 전략을 내세운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물리적 강제력에 의한 지배 이데올로기 홍보도구의 본격적 출범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 ‘컬러방송’의 경우도, 보기에 따라서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역시 5공화국 정부의 정치적 배려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다. 5공화국 정권의 문화정책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양상 가운데 하나가 문화영역에 대한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익의 관철이라 할 수 있는데 컬러방송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전량 수출되어 오던 컬러텔레비전 수상기가 외국의 무역장벽으로 인해 수출시장의 어려움을 겪게 되자 내수시장의 확보를 위한 정책적 배려에 의해 컬러방송의 조기실시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화려한 색깔문화가 상징하는 향락적 대중문화의 공세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조종하고자 한 5공세력의 의도 역시 한자락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10대뉴스 가운데 방송사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 공영방송제도와 컬러방송 등 네가지가 80년의 정치적 ‘원죄’와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바로 우리의 방송이 80년대 벽두의 어둠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롭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1983)은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방송매체의 위력과 사회적 중요성을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모처럼 방송의 존재이유를 확인시켜준 이 대형 미디어 이벤트는 이후 80년대 후반의 올림픽방송(88)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통해 확산된 방송매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후 시청료거부운동으로부터 구체화되는 방송민주화운동의 현실적 근거가 되어준 것이기도 했다.

 

어둠과 양지가 대치하는 형국

시청료거부운동(86), 새 방송법 제정과 방송위원회 발족(87), 방송사 노동조합의 탄생(87), 그리고 국회청문회 생방송(88) 등 80년대 후반부를 장식하는 사건들은 이른바 ‘방송 민주화’의 이슈와 연관시키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이다. 86년 기독교 교단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시청료거부운동’은 편파?왜곡보도와 소비 향락적 대중문화로 표현되는 방송의 반공영성에 대한 전국민적 저항운동이었다. 이 시청료거부운동의 거대한 흐름은 곧바로 6월 시민항쟁의 물결로 이어졌다. 87년 6월항쟁의 빛나는 함성과 함께 우리 사회는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바, 방송민주화의 구체적 진전을 시사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 가운데 일부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방송노조의 창립과 청문회 생중계는 돋보인다. 청문회 중계방송이 방송과 정치의 상관성, 국민의 ‘알권리’와 연관하여 방송매체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확인케 한 사건이라면 방송사노조의 창립과 활동은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송민주화운동의 가능성을 예감케 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80년대 방송의 10대뉴스는 80년대 벽두의 어둠을 반영하는 뉴스 네가지와 민주화의 흐름에 연관된 뉴스 네가지, 그리고 방송매체의 기능과 위력을 실감케 한 대규모 이벤트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80년대 전시기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게 한다. 80년대 초반을 덮은 어둠과 그것을 깨뜨려나가는 힘의 양지가 묘한 균형을 이루며 ‘대치’하는 형국, 그것이 ‘바로 지금’의 역사적 국면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80년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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