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제3의 영상’비디오 민중매체로 활용 길터
  • 이성남 기자 ()
  • 승인 198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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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문화에 대항…<노동자 뉴스>등 새로운 시각 담아내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사는 주부 이옥배씨는 열흘에 한번씩은 비디오가게에 들른다. 7살짜리 딸과 5살짜리 아들의 성화에 못이겨 만화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주기 위해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이 볼만한 테이프를 고른다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이솝우화를 소재로 한 교훈적인 테이프를 빌릴 수 있었지만 얼마 안가서 바닥이 났다. 제목만 봐서는 교육적인지 비교육적인지 도무지 내용을 알 수 없어서 가게 주인에게 문의해봐도 자세히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30분 이상 되는 테이프를 가게에서 미리 감수한 뒤에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전에는 아이들 사이에 한창 인기가 있다는 ‘강시’테이프를 별 생각없이 빌려왔는데 며칠 뒤 신문에 ‘강시’가 비교육적이라는 보도가 나왔더군요.”

 

“이상한 비디오 안보게 해주세요”

두팔을 앞으로 내뻗고 깡충깡충 뛰는 귀여운 모습으로 흡혈과 폭력을 일삼는 ‘강시’시리즈. 서울 YMCA의 ‘건전비디오 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건비연)이 89년 여름방학 동안 서울 시내 남녀 어린이 1천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어린이의 67%가 여름방학 동안 ‘강시’시리즈를 1편 이상 본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강시’시리즈 20편을 분석한 결과, 어린이가 관람해도 좋은 비디오는 고작 9편뿐이고 연소자 관람불가인 것이3편, 공륜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유통되는 불법 비디오가 2편인 것으로 밝혀졌다.

‘강시’시리즈는 으레 어린이용 영화라고 별다른 의심없이 생각하고 있던 부모들에게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본 <헬로 강시>의 경우, 목조르기, 발로 가슴차기, 안면구타, 사람집어던지기, 집단구타 등의 폭력장면이 전체 방영시간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말한 ‘건비연’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90% 정도가 여름방학 동안 평균 5편의 비디오를 보았으며 36%가 성인용 비디오까지 시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방학 동안 공부에 도움이 되는 비디오(자연학습, 사회생활)를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답한 어린이가 50%나 돼 비디오 기기가 교육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이 설문조사에서 어린이들이 지적한 다음과 같은 말들은 비디오문화의 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가 보는 테이프에서 이상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것이 없으면 좋겠다.” “만화가게에서 어른용 비디오가게와 어린이 비디오가게를 나누었으며 좋겠다” “죽는 것과 싸우는 내용말고 아름답고 순진한 만화영화를 바랍니다.” “비디오가게에 가면 외화, 만화, 중국영화뿐이고 교육에 관한 것은 보지 못했다. 교육 프로그램이 없으니까 자꾸 외화, 만화만을 보게 된다.”

‘제3의 영상’으로 일컫어지는 비디오 문화가 이렇듯 기형적인 모습을 띠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 우리나라의 VTR 보유대수는 2백60만대로 추산된다. 60년대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급속히 보급된 것처럼 80년대 우리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파고든 영상매체이다. 비디오 기기가 일반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국낸생산이 시작된 83년부터이다. ‘음란 외설물을 은밀히 즐기는 영상기기’라는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86년에 이미 1백만대를 넘어 8가구에 1대꼴로 보급되었으며 그뒤에도 꾸준히 확산되어 지금은 4가구에 1대꼴로 보급된 것이다.

 

수요자 욕구도 저질문화 부채질

그런데 이처럼 기기가 보급되는 동안에도 양질의 비디오 프로그램의 생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교육 비디오나 예술 비디오를 논할 겨를도 없이 시중에 나도는 테이프라면 불법이든 저질이든 가리지 않고 빌려보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지난해 12월에 전국 비디오판매 및 대여업자 1천명을 대상으로한 ‘비디오가게 경영자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사실이 확실해진다. 1년 중 겨울철에 ‘30대 기혼남자’가 비디오를 가장 많이 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이 조사에 따르면 비디오가게에서 불법?음란비디오를 취급하는 이유에 대해 “소비자들이 자주 찾기 때문”이라고 답한 이가 88%나 된다. 결국 음란 또는 폭력쪽으로 기운 수요자 욕구 또한 오늘의 저질 비디오문화를 부채질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전국비디오판매업자협회 조사에 따르면 일반 비디오가게에서 대여가 잘되는 것으로 <매춘25시> <빨간 앵두4> <산마루> <야시장> 같은 포르노성 에로물로 나타나 비디오문화에 대한 수요자의 불건강한 인식을 확인케 해준다. 88년 5월부터 89년 9월말까지 공륜심의를 통과한 비디오 61편 가운데 93.4%인 57편이 불륜, 매춘, 인신매매 들을 소재로 일그러진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성인용 음란물이었다.

안방 관객의 구미에 맞춘 포르노성 비디오는 일반영화 제작비의 10~20%에 지나지 않는 편당 2천만원에서부터 3천만원쯤을 들여 1주일 남짓 걸려 후닥닥 제작된다. 이런 비디오가 안방에서만 은밀히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학교 주변의 만화가게에서 “1천원만 내년 만화도 보여주고 야한 비디오도 틀어준다”는 식의 유혹성 문구를 버젓이 바깥에 내걸고 있는가 하면 포장마차에서도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줘야 장사가 잘된다는 말을 한 만큼 사회 도처에서 검은 숨을 내뱉고 있다.

국내에서 제작되는 포르노성 비디오 못지 않게 외국 저질비디오의 불법 복제품 또한 비디오 문화를 오염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단속이 심할수록 불법 복제방법도 날로 교묘해져서 트럭에 비디오 기기를 설치해놓고 서울?부산 등지를 오가며 복사하는 수법 등으로 단속망을 피한다. 예컨대 잘 팔리는 비디오 1편을 불법으로 복제해서 1편당 1만5천원의 가격으로 전국에 등록된 비디오가게 1만여군데 점포에 팔면 3억원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금이 나온다.

 

비디오계의 ‘UPI' CIC 직배

비디오 시장규모는 금년말 현재 1천억원대를 웃돌고 있다. 이처럼 높은 시장성을 겨냥하여 최근에는 삼성, 대우, 금성 등 재벌기업과 함께 동아수출공사, 우진필름, 남아진흥을 위시한 여러 영화사도 다투어 비디오 프로그램 제작에 함세하고 있어 앞으로 판매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게다가 88년 1월에는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영화사 등의 영화를 비디오로 전세계에 공급하는 세계 최대 비디오회사인 CIC도 한국에 상륙했다. “혼자 숨어보는 비디오가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양질의 작품 공급”을 강조한 CIC는 UPI직배영화가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있는 동안 아무런 저항없이 한국의 황금 비디오시장을 조용히 석권하고 있다.

한편, 최근 젊은 감독들 사이에서는 적은 제작비로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비디오제작의 장점을 살려 민중운동 매체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철거된 서울 상계동 주민들의 아픔을 영상에 담은 <상계동 올림픽> 이나 10일마다 전국 각지의 노동계 소식을 노동자의 시각으로 비디오에 담아내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의 <노동자 뉴스>등이 그 보기이다. 또 남녀간의 불평등을 부각시키는 여성운동의 차원에서도 비디오 프로그램 제작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최근 여성의 전화가 매맞는 아내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굴레를 벗고서>와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여성문제를 다룬 <이브의 설자리>등을 꼽을 수 있다.

<굴레를 벗고서>를 제작한 젊은 감독 이현승씨는 “비디오영화 제작은 기득권 문화의 독점현상에 대응해나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런 비디오가 아직까지는 같은 관심을 가진 소집단끼리 돌려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상업적인 배급망을 타고 일반 사회에 확산 되는 대중문화운동의 차원에는 못미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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