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들 군가 부르며 복귀
  • 글 조용준 특파원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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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 위장차로 몸조심

족벌체제·마르코스유산 청산못하면 쿠데타 악몽 계속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승리했다!”

 지난 7일 아침 8시 필리핀 국기와 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5열 종대로 마닐라의 금융 중심가 마카티의 니코 마닐라 가든호텔 앞을 지나 보니파시오기지로 원대복귀하는 4백여명의 반란군의 사기는 그들을 인도하는 정부군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높았다. 6일째 정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마카티지역에서 그들의 본거지인 보니파시오까지는 약 5㎞ 남짓. 바추카포와 M-60 기관총을 어깨에 둘러멘 젊은 특공대원들은 30여분간의 도보행진중 쉬지 않고 군가를 불러댔고 이를 구경하러 나온 수백명의 인근 주민들은 착잡한 얼굴로 이들의 헝클어진 행렬을 지켜보았다. 어떤 이들은 반군들에게 빵을 건네주었고 취재중이던 한 여기자는 반군에게 젖은 손수건을 내밀기도 했다.

 아키노정부 3년간 6차례나 기도됐던 쿠데타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유혈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우리는 정부의 부진한 개혁에 경고를 주기 위해 일어났고 우리의 강력한 메시지가 정부에 전달되었다.” 부하들을 인솔하던 반군 작전장교 리임 대위의 말이다. ‘피플 파워’가 20여년 독재의 사슬을 무너뜨리고 탄생시킨 아키노정부에 이번 쿠데타는 회복하기 어려운 정치적 손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불안한 정정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준 뼈아픈 사건이었다.

 “도다른 쿠데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군을 호위하던 정부군의 세자르 대위는 말한다. “정부 또는 반군, 그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커다란 피해없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피플 파워’ 코리 지지 언제까지

 쿠데타 진압 다음날 수십만 인파가 에드사거리에 모였다. ‘피플 파워’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대형 마리아상의 제막 미사에 참가한 인파들이다. 86년 2월 오랜 독재를 종식시킨 2백만명의 민주화 물결로 가득했던 이 에드사거리는 필리핀 국민 모두가 잊지 못할 역사적인 장소이다.

 3시50분. 4대의 무장경찰차를 앞세우고 2대의 벤츠와 1대의 도요타 승용차가 삼엄한 경계망을 헤치고 행사장에 도착했다. 보도진들이 몰려든 곳은 앞서 도착한 2대의 벤츠 승용차였지만, 노란색 투피스 차림의 아키노 대통령이 정작 내린 승용차는 제일 뒤에 있던 회색빛 중형 도요타였다. 쿠데타 진압 이후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하늘에는 헬기가 떠 있었고건물 옥상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포진해 경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행사 분위기는 24시간 전의 비극적인 사태와는 걸맞지 않을 정도로 축제 분위기였다. “코리, 코리, 코리” 수십만 군중의 환호에 답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아키노 대통령이 높이 손을 쳐들자 12차선 대로를 꽉메운 군중들은 더욱 열광했다. 이어 미사로 들어가 이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인 하이메 신 추기경의 강론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가 필리핀 국민들에게 들려준 강론은 희망에 찬 것만은 아니었다.

 “쿠데타는 우리가 그토록 집념을 쏟은 자유와 민주의 이상을 위협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마약처럼 퍼져 있는 부패와 범죄, 사법부의 비능률과 비합리성, 타락한 정치, 무책임한 언론, 사회정의에 대한 무관심, 억눌린자의 빼앗긴 권리, 족벌주의를 새삼스레 따지지는 말자.” 신 추기경은 격앙된 어조로 계속 말을 잇는다. “우리는 이같은 문제를 더 알고 있고, 끝도 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병폐의 해결은 우리 스스로 해야만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는 그러한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스스로 개혁하자. 국민 개개인의 혁신없이 사회의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2시간 넘게 걸린 미사가 끝나자 아키노의 격정적인 연설이 시작되었다. 아키노는 라우렐 부통령과 엔릴레 전 국방장관이 쿠데타와 깊이 연관되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라우렐은 기회있을 때마다 ‘코리는 사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에게 자리를 내 줄 만큼 바보는 아니다. 나라에 어지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자리에 없었다.” 정적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계속되었다. “엔릴레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국민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키노는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반란세력을 막고 우리가 지키자!”

 이날 미사를 통해 아키노는 6천만 필리핀 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신자들의 종교적인 단합을 정치적인 결집력으로 바꾸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아직까지 필리핀 국민들은 아키노의 뒤에 서 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점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행사가 시작된 지 4시간 뒤 광장을 메웠던 인파는 어지럽게 흩어진 쓰레기를 뒤로 하고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희망과 절망의 두얼굴

 필리핀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쉽지 않다. 그만큼 여기에는 상반된 모습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하나의 모습은 쿠데타가 한창 진행중이던 12월초,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던 자원봉사대와 부상자를 치료하며 밤새 응급실을 지키던 마카티 메디컬 센터의 젊은 의료진들, 에드사거리를 인산인해로 만들었던, 삶이 숨쉬는 ‘피플 파워’, 그리고 그들의 진지하고 착한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모습은 길 모퉁이마다 만나는 걸인들, 시내 한복판의 처참한 빈민촌, 그곳에서 뛰어 노는 맨발의 어린이들, 같은 전우들에게 총구를 겨냥해야만 했던 지친 병사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희망과 절망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봉헌행사를 마치고 기자를 맞아준 신 추기경은 “저들(국민)이 바로 우리나라를 빛내줄 보석들이다”라고 말했다. 그 보석이 제 빛깔을 내기 위해서는 민주화의 열망에 걸맞는 경제적 번영이 뒤따라야만 한다. 민주절차에 의해 선출되고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권이라 하더라도 경제정책에 실패하고 통치력에 한계를 보인다면 민심은 점차 멀어져갈 수밖에 없다. 쿠데타가 진압된 지금, 다른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구체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것을 필리핀 국민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아키노가 무엇인가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할 차례이다.

 이번 쿠데타는 이전의 쿠데타보다 치명적인 것이었다. 필리핀 정부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민간인과 군경 사망자가 80여명, 부상자는 5백여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민간인 사망자는 43명으로 대부분 구경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무고한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경제 중심가가 1주일 가까이 마비되는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는 필리핀 경제 또한 큰 타격을 받았다. 반군이나 정부 그 어느 쪽도 승자는 아니었다.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동자를 잡아야 한다.” 반군 진압 5시간 뒤 시내 마닐라호텔 2층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부군 대변인 오스카 프로렌노 준장이 3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현재 막사에 감금된 채 군사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투항군은 모두 1천5백여명. 20여명의 장교들의 지휘 아래 반군세력에 참여했던 인원이 4천명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2천명 이상이 아직 은신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프로렌노 준장은 “반군측은 전군의 10%정도가 그들 편에 서줄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장교들이 마음을 정하기 전에 미군개입과 함께 반군진압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필리핀 군부의 내부갈등과 제7, 제8의 쿠데타 가능성을 점치게 하는 취약한 정치기류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반군이 투항한 다음 이미 또 다른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뿐만 아니라 반군의 투항을 받아내는 여러 차례의 협상에서도 아키노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보다는 군수뇌들의 자의적인 타협안이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다는 평을 받고 있어, 아키노의 통치능력의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이번 쿠데타의 지휘자는 지난번 87년 쿠데타의 주동자였던 호나산 대령이 확실해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한 계획 아래 감행된 이번 쿠데타의 특징은 첫째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호나산이 장악하고 있는 필리핀 육사출신을 중심으로 한 ‘군부개혁운동’(RAM)의 중추세력이 주도했지만, 3명의 장성을 비롯해 참가세력이 전보다 크게 확산되었다는 점, 둘째 쿠데타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8명의 대령이 호나산과 같이 71년 육사 졸업동기생들이고 이 가운데 지난번 쿠데타와 관련하여 구속수감되어 있던 4명의 고위장교가 쿠데타 발발 몇시간 전에 석방되어 군부내 분열상을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점이다. 이밖에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군부개혁운동’이 마르코스 전대통령의 잔당과 일종의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점, 소대장급의 육사출신 초년 장교들이 대거 참여, 현재의 국가운영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해 군부의 정치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아키노는 ‘무능한 정부’라는 오명을 얻고 통치능력마저 도전받게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곳의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쿠데타의 주요 인물은 아기날도기지를 점령했던 7사단의 마르셀로 브란도 준장, 호나산의 사촌이기도 한 해병 4대대 대대장 로멜리노 고조 중령, 마카티지역 점령을 지휘했던 칼베즈 중령과 아브라함 트루가난 소령 등이다.

 

국민들 반란 동기에 상당한 공감 표시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쿠데타를 지켜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키노가 아직 많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지만 호나산 역시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 일부 드러난 것이다. 국민들은 합법정부의 헌정체제를 무시한 채 무력을 앞세우고 체제전복을 꾀할려는 군부의 반란임에도 불구하고 반군이 무력을 사용한 데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반란 동기에 대해서는 상당한 공감을 표시했다. 무관심도 또 다른 반응이었다. 쿠데타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카티지역을 제외한 다른 번화가는 밤 늦게까지 불야성을 이루었고, 마닐라 시민들은 그다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던 필리핀이 1인당 국민소득 7백달러 미만의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로 전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수백년에 걸친 고난의 식민통치 역사 속에서 살쪄온 봉건적 족벌·지주체제가 아직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경직된 사회체제, 20년 넘게 이어져왔던 마르코스독재의 깊은 상처, 아키노정부 출범 이후에도 뿌리뽑지 못하는 각계각층의 부정부패, 너무 권력지향적인 정치풍토, 미숙한 민주제도, 지나친 미국의존 등은 필리핀이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로서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국민의 단합도 절실하다. 민주화 이후에 수십종의 신문들이 쏟아져나왔지만, 많은 국민들이 그것을 사볼 돈이 없는 것이 필리핀의 현실이다.

 쿠데타의 배경에는 필리핀이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불균형을 해결하지 못하는 아키노의 개혁실패가 가장 큰 요인으로 도사리고 있다. 아키노정부가 출범 이후 추진했던 토지개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도시와 농촌과의 엄청난 격차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국회와 행정부의 비생산적인 불협화음은 정부와 군부와의 갈등만큼이나 심각하다. 행정부 역시 부통령인 라우렐이 아키노의 사임을 종용할 정도로 분열과 약체성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특히 청산되지 못한 마르코스정권의 유산이 아키노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지방에 창궐하는 공산게릴라 세력 역시 반군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로 남아 있다. “아키노 정부는 과도정부이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통치능력에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3년 전에는 그가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라고 민권운동가인 피노 티롤레씨는 말했다. “우리는 싱가포르의 이광요와 인도의 간디를 합친 강력하면서도 도덕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필리핀에서 그같은 이상적인 지도자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이 점이 필리핀의 또하나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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