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 안맞는 日·蘇관계 개선
  • 도쿄●김용기통신원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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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북방 4개섬 반환” 끈덕진 요구… 소련 “세월이 약”이라며 일정 늦춰

 지난 9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일본방문 계획이 91년으로 확정 발표된 이래 소련의 학자 등 각급 인사들의 일본방문이 잦아지는 등 日·蘇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고있는 듯이 보인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은 86년 등장 이래 수차에 걸쳐 ‘소·일관계의 개선’의욕을 표명해왔다. 88년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의 방일을 계기로 일·소간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실무자급 회의를 상설화하는 등 실질적인 진전도 있었다. 이 회의는 주로 평화조약 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방영토 문제를 논의하는 토론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소련측의 이같은 적극적인 제스처에 비해 일본측의 태도는 의외로 냉정한 것 같다. 지난 11월12일부터 6일 동안 일본을 방문한 야코블레프 소련공산당 국제담당 서기 일행의 행적에 대해서도 일본의 언론들은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오른팔로서 사실상 소련의 제2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언론이 그에게 주목한 것은 단 몇 번, 북방영토문제에 대해 그가 발언했을 때뿐이었다.

 북방영토는 2차대전 후 소련령으로 넘어간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말한다. 패전국 일본은 미·영 등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이 영토의 주권을 포기했다. 소련은 이 조약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2차대전중 미·영·중·소가 맺은 얄타 비밀협정을 근거로 이 지역을 점령, 자국령으로 삼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훗카이도 동북쪽 쿠릴열도 남단에 위치한 4개의 섬이다. 일본측은 이 4개의 섬이 주권을 포기한 쿠릴열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훗카이도에 부속된 것이므로 당연히 일본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소련측은 50년대 중반 그 가운데 2개의 섬을 반환하겠다고 제안한 이래, 그 이상의 요구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4개냐 2개냐 하는 견해차이는 쌍방간에 한치의 양보도 없이 30년 이상 평행선을 달려왓고 일·소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그러나 북방영토 문제는 미·일관계를 제쳐놓고 일·소관계만을 놓고 보아서는 제대로 이해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본은 대소관계의 개선을 늦추는 구실로 이 문제를 이용해온 측면이 이쓰며, 이는 미국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56년 당시 총리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는 흐루시초프의 2개 섬 반환제안에 타협, 일·소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했는데, 소련과의 관계진전을 불필요 내지 위험시하는 집단이 국민여론을 4개 섬 반환요구 쪽으로 몰고감으로써 대소관계 개선에 제동을 건 것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2차대전의 패자와 승자라는 당신의 일·소관계에서 볼 때, 소련이 비록 2개의 섬이나마 돌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 자체가 일본의 자력만으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이 두 섬이 훗카이도의 일부라는 일본의 주장을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당사자인 미국이 두둔해주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이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 이유 중 하나는 일본과 소련의 급속한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이다. 즉 일본이 미국의 지원을 배경으로 해서 몇 개의 섬이나마 돌려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면,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앞서 영토반환을 끈덕지게 주장할 것이고 소련이 이에 응할 리가 없는 만큼 소련과 일본의 접근은 당분간 어려워진다는 계산이었다.

 

미·일·소 삼각관계가 변수로 작용

 소련이 일·소 관계개선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정치·군사적 측면인바, 소련이 군축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데탕트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미·일관계를 지금과 같은 절대적 관계에서 상대적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일·소관계 개선이 이를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의 전력이 일본 등 동맹국의 협조하에 소련에 대한 우위를 유지해왔고, 미국이 이를 유럽에서의 전력 감소에 대한 보완으로 간주, 군축에 소극적으로 임해온 측면이 있기 때문에 데탕트에 관한 한 소련이 더 아쉬운 입장인 것 같다.

 다음으로 소련이 경제개발 특히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개발에 일본의 경제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르바초프 정권의 운명이 걸린 페레스트로이카가 당관료의 저항을 상쇄시킬 만큼 국민적 지지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난점을 안고 있는 이상, 소련 지도부가 국민들에게 조속히 개혁의 경제적 성과를 안겨주려 서두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소련의 적극적인 대일본 접근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태도는 보다 느긋한 것처럼 보인다. 대소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그 가능성이 모색되는 수준이고, 정치·군사적인 면에서는 최근 외무성 일각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정치·군사적 논리가 경제적 논리를 능가하기 어려운 것이 일본의 현실인데, 그럼에도 일본이 이같은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면, 일본자본이 볼 때 소련이 풍기는 매력은 아직 부족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야코블레프가 일본의 여야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분명히 느낀 것은, 북방영토에 대한 소련의 양보 없이는 가까운 시일 안에 일본자본의 적극적인 소련 진출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측이 4개의 섬 반환에 선뜻 응할지는 미지수이다. 정권이 완전히 안정됐다고 보기 어려운 때에 영토를 할양한다는 것은 국민여론으로 보아 모험이며, 특히 소련 내정의 가장 큰 문제인 소수민족 독립요구의 명분을 강화해줄 가능성도 있다. 경제적으로도 소련에 당장 급한 것은 생필품의 공급과 극동지역에 제조업을 유치하기 위한 기간산업의 건설이며 이는 중국·한국과의 교류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달성이 가능한 문제이다. 소련이 중국, 한국, 일본 순으로 접근해온 것은 이같은 경제적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야코블레프가 일본 사회당에 도이 위원장에게 “세월이 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나 고르바초프의 방일계획이 미·소정상회담과 28차 당대회 이후로 멀찍이 잡혀진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지난 40년간 일·소관계의 걸림돌 노릇을 해온 북방영토 문제의 과제는 아직 그 수명을 다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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