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추적보도와 명예훼손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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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來昌군 사망사건 관련 <한겨레> 被訴…재판결과 떠나 진실 밝혀져야

 “지난 10월4일 새벽, 경기도 부천시 남구 소사2동 42의 17 都淵珠(23)양의 집앞. 여학생 2명이 경찰조서에 나타난 주소로 都양이 집을 확인한 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찾아 잠복, 都양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아침 7시쯤 都양이 대문밖을 나서자 이들은 조심조심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부천 전철역에서 그만 인파에 휩쓸려 都양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근무처를 알아내기 위한 미행에 일단 실패한 학생들은 다음날인 5일 미행조를 여학생3명과 남학생2명으로 늘리고 구간을 분담, 재차 추적을 시도했다. 都양은 인천주안역보다 한 정거장 앞인 동암역에서 내려 대로변을 따라 10분쯤 가다가 한쪽 언덕길로 접어든 뒤 ‘인하상사’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행하던 학생들은 이 장면을 망원렌즈로 잡았다. 아울러 이 건물이 안기부의 인천분실이란 사실을 주민들로부터 확인했다.“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李來昌군의 사인진상규명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상황실장인 姜沂枓(22·경영4)군은 李군과의 거문도 동행여부로 경찰의 조사를 받은 바 있는 都양이 안기부 직원임을 확인하기까지의 과정을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학생들이 추적 조사한 다음날인 10월6일 <한겨레신문>은 사회면에 ‘이내창씨 사망전 안기부요원 동행’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크게 보도했었다.

 

도연주씨. 5억원 배상에 형사처벌도 요구

 <한겨레신문>은 李군이 숨지기 1시간30분쯤 전으로 추정되는 8월15일 오후 3시30분쯤 전남 여천군 삼산면 거문리이 나룻배 위에서, 都양과 함께 있었으며 그보다 30분 앞선 3시쯤에는 같은 마을 다방에서 都양과 白모(22·당시 목포해양전문데 3년·현 해군복무)군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都양이 “안기부 인천분실의 별칭인 ‘인하공사’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白군과 都양의 동행사실에 관한 부분은 나룻배의 사공 李모(42)씨와 다방종업원 催모(21)양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보도가 “멋대로 날조되고 증거도 조작된 것”으로,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해서 법정에 서게 됐다. 자신을 안기부 인천분실 총무과 소속 타자수라고 밝힌 都양이 지난 11월4일 사과광고 게재 등을 요구하며 신청한 언론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자 11월29일 한겨레신문사를 상대로 5억원의 손해배상 및 사과광고 게재를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낸 것이다.

 都양은 이에 그치지 않고 12월1일에는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편집위원장, 성명미상 논설위원, 성명미상 기자 등 4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이들에 대한 형사처벌까지 요구하고 있다. 都양이 사건발생 당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李군이 여수에서 거문도로 갈 때 탄 ‘신영페리호’의 승선표 묶음에 都양과 白모군의 표가 李군의 것 바로 다음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기에 “李군의 배삯을 대신 내준 20대 여자와 남자가 있었다”는 나룻배 사공 李모씨의 증언으로 都·白의 동행여부는 학생들과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됐다. <한겨레신문>은 이를 밝혀내기 위해 현지에 취재반을 보내 앞서 말한 두 사람의 증언을 인용, 동행사실을 보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都양은 고소장에서 자신은 8월13일부터 19일까지 휴가를 얻어 펜팔로 사귄 白군의 친구집이 있는 거문도 옆 동도에 놀러갔을 뿐이며 사건이 난 이틀 뒤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으나 알리바이가 성립돼 풀려났다고 밝혔다. 都양은 또 지난 10월 18일 여수경찰서에서 실시한 대질신문에서 “나룻배 사공 李씨와 종업원 催양은 都양과 白군이 李군의 동행인과 다르다고 최종확인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따라서 <한겨레신문>의 기사내용은 “사실을 날조하고 증거를 조작한 가증스런 언론횡포”라며 “이로 인해 살인자와 같은 오명을 뒤집어써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선 ‘언론탄압 음모’ 주장

 수차례에 걸쳐 현지에서 조사활동을 벌인 중앙대 대책위측은 “李씨와 催양이 사건발생 직후 밝힌 내용과 달리 경찰의 조사가 거듭될수록 말하기를 꺼리더니 나중에는 아예 부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방종업원 催양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신들 때문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몸이 바짝 말랐는지 아느냐”며 거친 어조로 언론을 비난하면서 “나는 그렇게 말한 적도 없으니 멋대로 쓰지도 말고 제발 전화 좀 그만해달라”고 말했다. 경찰과 都양의 변호인측은 나룻배 사공 李씨도 “나는 남녀 2명이 숨진 李군과 함께 내 배에 탔다고 말했을 뿐 그 사람들이 白군과 都양이라고 확인해준 사실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겨레신문>측은 이에 대해 “치안본부가 공개수사를 공언한 뒤에도 대질신문 취재를 봉쇄한 채 비공개 수사를 강행해 목격자들이 당초의 진술을 번복토록 했다”며 “국회 국조권발동과 사법부의 공정한 재판응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한겨레신문>노조와 기자평의회의 성명, 사설 등은 이번 사건은 “고소인이 안기부의 직원이며 바로 그 정부기관이 <한겨레신문>에 대한 탄압을 끈질기게 자행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한 개인 대 신문사의 송사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면서 “안기부가 직원개인 명의의 소송을 통해 신문의 논조를 위축시키고 신뢰성을 떨어뜨리려는 색다른 음모”라고 주장했다.

 李군사건을 다른 언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있게 다뤄온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두 목격자가 법정에서 어떻게 진술하느냐에 따라 법적인 판가름을 받게 될 것 같다. 목격자들의 증언이 어떤 압력에 의한 것이었든 그렇지 않았든간에 그것을 정확히 인용하는 데 조금이라도 소홀했다면 <한겨레>측이 불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는 한편 이번 송사가 자유로운 취재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가 돼서는 안될 것이라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내창군의 사인이 경찰의 ‘실족익사’ 결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투성이’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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