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거인과 오만한 부자의 자존심싸움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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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 ‘부동산 마찰’ 양국간의 감정대립으로 치달아

도쿄의 신주쿠(新宿)에 있는 기노구니야 서점의 저녁 6시. 수업을 마친 교복차림의 학생들과 일반인들로 붐비는 때라 판매원들의 손놀림도 바쁘다. 신간안내 코너가 마련된 특별매장에는 더욱 사람들이 꾄다. 50여가지의 신간들은 대부분 90년대의 일본 경제, 미·일관계 또는 일본의 국제화에 관한 책들인데, 해외 관광책자들과 어울려 수북히 쌓여 있다. 최근에 나온 도서들은 대부분 ‘미국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나’, ‘일본은 왜 폐쇄적이어야 하는가’, 또는 ‘이제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들이다.

 이 책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데 1백여 페이지 남짓한 작은 책자로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파문을 가져왔다. 또한 이 책의 내용과 관련, 미국과 일본 언론이 요즘도 하루가 멀다하고 이에 대한 기사와 기고를 다루고 있다.

 소니社 회장 모리타 아키오 (盛田昭夫)와 인기 작가이며 자민당 의원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가 공동집필한 이 책이 왜 일본인에게는 ‘후련한 살풀이’가 되고 미국인들에게는 ‘경제 동물의 방자함’으로 비치게 됐는지는, 그 몿가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내용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몇몇 대목들을 살펴보자.

 “미국은 일·미 안보협정에 따라 일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군은 집 지키는 개로 따질 때 狂犬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집 지키는 개라는 말을 미국이 문제시한다면 다시 한번 ‘아니오’라고 꾸짖어야 할 것이다.” “일·미간의 문제는… 인종 편견에서 출발한다.” “일본이 반도체를 소련에 팔고 미국에 팔지 않으면 미국의 군사력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이제껏 야금야금 미국경제의 숨통을 조여왔던 일본이 노골적으로 국수주의적인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국수주의적 불만 거침없이 터뜨려

 미·일 경제 관계는 무역마찰의 단계를 지나, 서로의 경제 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데까지 접어들었다. 구조조정을 먼저 들고 나온 쪽은 미국이었다. 일본시장 진출에 실패한 미국은 그 원인을 일본시장의 폐쇄적인 구조에서 찾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양국간에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 협의내용을 보면, 미국측은 △일본의 과다한 저축 △비생산적인 토지 사용 △복잡한 유통구조 △외국상품의 진출을 가로막는 기업간의 하청관계 △국내 가격구조 △외국기업에 대한 차별적인 기업관행 등의 시정을 일본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미국의 낮은 국내저축 △기업의 투자형태 △연구개발투자 부진 △수출규제 △노동자 교육 미비 △단기이익 위주의 기업경영 전략 등의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3차례 계속된 미·일 구조협의는 아직까지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양국이 혐상 테이블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이에 일본 소니社의 콜롬비아 영화사 인수와 미쓰비시그룹 부동산회사인 미쓰비시 지쇼社(三菱 地所)의 록펠러 센터 인수 등으로 인해 구조조정 협상 자체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마찰은 어느덧 감정대립, 국민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져버렸다. 불난데 부채질하는 주인공들이 모리타와 이시하라가 된 셈이다.

 

“제2의 진주만 기습” 격분

 일본의 경상수지와 무역수지 흑자는 83년 이후 팽창을 거듭했다. 해외로부터 흘러들어온 돈은 또다시 현지투자 형태로 다시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일본정부와 기업이 해외에 가지고 있는 자산 중에서 대외부채를 뺀 대외 순자산은 4년간 세계1위를 차지하고 있다. 5백억달러 수준의 대미 무역흑자는 87년 5백63억달러, 88년 5백21억달러로 다소 줄어드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미국 무역적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년전 35%에서 지난해 41%로 오히려 늘어났고 올해는 더 벌어져 45%가 될 전망이다.

 뉴욕의 맨하탄 한복판에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70층짜리 록펠러 센터는 마천루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함께 미국 번영의 상징이었다. 미쓰비시 지쇼社와 록펠러家의 부동산 관리회사인 록펠러 그룹 (RGI)의 발표를 통해 미쓰비시측이 8억4천6백만달러(5천6백68억원)에 RGI의 주식 51%를 인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인들은 “또 일본이…”라고 분해했다.

 일본 기업의 대미 부동산 투자중 금액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은 2년전 아오키 건설이 14억달러를 들여 뉴욕에 있는 플라자 등 호텔군을 사들인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록펠러 센터 매수는 가뜩이나 일본의 대미 진출에 비위가 상해 있는 미국인의 높은 콧대를 무참히 꺾어놓았다. 대지 1만4천평에 건평 17만평의 록펠러센터 속에는 미국문화의 자존심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수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의 언론은 벌집쑤셔 놓은 듯 ‘제2의 진주만 기습’등 공습경보를 울려댔다. 하지만 이는 결국 콜롬비아사의 인수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일본에게 다시 한방 먹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일본의 무차별한 머니게임

 미국측은 나아가 록펠러 센터 매수가 에펠탑을 사들인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분별한 처사라고 일본 정부의 지도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본측의 반응도 만만치 않다.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기자 회견에서 “우리 정부는 미쓰비시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만한 법적 근거도 없고 그럴 의향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본내 기업가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인데 “팔려고 내놓은 물건을 산 것이 무슨 잘못이냐,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가 사들였으면 이렇게까지 법석을 떨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일본의 미국 부동산 사재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 중앙은행이 발표한 최근 미국내 기업에 대한 일본기업의 M&A(기업합병·인수) 현황을 보면, 작년 한해 동안의 직접투자만 해도 약 2백억달러로, 이는 전년에 비해 두배나 껑충 뛴 것이었다.

 이러한 급증 현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제조업의 현지 투자는 물론이려니와,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 꾸준히 사모았던 주식이나 채권등 금융자산의 수익 일부를 미국내 부동산 구입이나 기업매수 등으로 돌렸기 때문이라 분석되고 있다. 땅값이 워낙 비싼데다 엔高, 주가高시대를 맞아 자산 소득이 눈덩이같이 불어났는바, 88년의 도쿄 증시의 시가 총액 규모는 5백조엔으로 미국의 1.7배에 달했다. 일본 열도의 토지가격 총액은 이미 87년말 1천6백38조엔(13조4천억달러)으로 미국 국토를 4번 살 수 있는 규모가 됐다.

 태풍의 눈, 일본이 특히 미국에 발동시키고 있는 부동산 호우주의보, 그 무차별적 투자행위는 가히 가공할 만한 정도에 이르렀다. 일본의 기업이나 정부관리들은 이제껏 한나라의 국가를 상징하는 것은 사들이지 않겠다고 공언해왔지만, 무차별한 머니게임 앞에서는 ‘무책이 상책’이라고 할 때, 일본의 주요 예측기관이 내다보는 것처럼 일본의 미국 공략은 계속될 전망이다.

 다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보자. 이시하라는 미국에 대해 “더이상 일본을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로 독자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한다. 일본이 뛰어난 첨단 기술을 이용, 미·일 안보조약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다는 이시하라의 주장을 미국측에서 본다면 당연히 ‘오만불손’으로 비칠 것이다. 미·일 안보 체제의 종결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그렇게 될 때 이는 ‘미·일 破局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이다. 동시에 미국과의 결별은 자유진영 내부에서의 일본의 고립의 시작을 뜻하는데, 왠 ‘오만불손’인가.

 

‘대동아 공영권’의 악몽

 이시하라는 “일본은 아시아와 함께 살아야 한다”며 그 나름대로 ‘탈 미국 이후’의 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경제력이 뛰어난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은 모두 일본이 戰前 통치한 나라들이다. 나쁜일 했던 것을 인정하고 반성해야겠지만, 좋은 영향을 준 것도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어 피해국들에게는 ’대동아 공영권‘의 악몽을 상기시키고 있다.

 미국내에서는 ‘일본 봉쇄론’, ‘일본 이질론’.이 급속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미 소니社가 콜롬비아 영화사를 사들였을 적에도 문화 마찰의 불씨를 만들었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일 무역적자에 따르는 불만의 차원을 뛰어넘어 노골적인 증오감마저 분출시키고있다.

 일본은 이제껏 미국밖에는 별다른 친구가 없었음에도 그 미국과의 관계가 지금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에 단 한명의 친구라도 있는가? 아시아이기를 그들은 스스로 거부해 왔고 주변국가를 멸시함으로써 존경은커녕 믿을만한 국가 구실을 해내지 못했다. 일본의 돈을 필요로 하고는 있지만 일본인을 좋아하는 아시아 나라는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미국 차례가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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