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곳”
  • 정리 이문재 기자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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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빨치산 작가’ 김학철옹,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 만나

빨치산 ‘작가’ 金學鐵(74)옹과 ‘빨치산’ 작가 趙廷來(46)씨가 만난 날은 김학철옹이 43년만에 서울땅을 밟은 지 두달즘 되는, 지난 11월30일 오후였다. 우연하게도 두 작가는 보성고등학교 동창(김옹 26회, 조씨 52회)이었다. 조씨는 김옹을 만나기 전 《태백산맥》을 쓰는 도중에 《격정시대》를 읽었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작가로서의 존경과 동창으로서의 ‘끈’이 어우러져 두 사람의 만남은 진지하면서도 무척 다정해보였다.

 김옹의 숙소 근처인 파고다공원에서 만나 공원 안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담은 시작되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김옹은 왼쪽 다리가 없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1943년 일본 감옥에서 다리를 잘랐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던 그 자리에 ‘외발’로 선 항일투사의 심정은 편안해보이지는 않았다. 곧이어 두 사람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모교 보성고등학교자리(지금은 서울과학고등학교)를 둘러보았다.

 조정래:《격정시대》에도 나와 있듯이 선생님께선 열일곱 나이에 상해로 떠나셨는데 20여년 뒤 바로 그 나이에 저는 4?19데모에 참가했습니다. 바로 저 철문을 밀고 거리로 뛰쳐나갔지요. 선생님께서 그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단신으로 중국땅 임시정부를 찾아간 졔기는 무엇이었나요.

 김학철: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아무런 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친척한분이 좌익운동을 하다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서 병이 났어요. 감옥에서 나와 덕수궁 옆 병원에 입원을 해서 내가 줄곧 심부름을 다녔는데 어쩐지 그분한테 마음이 끌리데요. 그분의 항일정신에 좋은 인상을 받았나봐요.

 그리고 그 당시 우리 잡지들에 임시정부가 소개됐고, 더군다나 중국의 웨스트포인트로 불리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간 조선학생사진이 소개됐어요. 그 후에 윤봉길사건 나고 “이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난 큰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나도 사관학교를 가야겠다 말이지, 이 공부는 재미없다 말이지, 그래서 그저 엉터리로 무작정 도망쳤지. (이 대목은 뒤에 가서 자세히 언급된다.)

 조: 이번에 고국을 찾은 선생님에 대해 매스컴들이 큰 관심을 갖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역사는 교과서에서 사라졌습니다. 정부가 폐지시킨 것이지요. 항일무장투쟁이 대개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북쪽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도 작용했겠지요. 선생님에 대한 관심은 곧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대목입니다.

 김: 내가 상해에 가니까 선배들이 날 테스트 하는데 “독립이 되면 이씨조선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요. 그래 나는 서슴없이 “임금님을 모셔야 한다”고 말했지. 그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거야. 난 속으로 ‘어, 이 사람들 역적이구나’ 이랬다구요. 난 그렇게 출발했어요. 그러나 난 지금 마르크스주의자예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 복권되다

 이거 봐요. 금년 소련에서 부하린이 사형당한 지 50년만에 소련공산당 당적을 회복했어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나는 금년 초 49년만에 살아서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했어요. 그동안 반동, 반혁명, 반당 등 갖은 죄목을 다 뒤집어 썼다구. 49년 동안 나를 그렇게 대했지만 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구. 내가 옳다는 자기 신념만 있으면 겁날 게 없어요.

 공산당 치하에서 40년이 지났는데 동독의 1백만 인파, 프라하의 움직임 그리고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이게 다 우연이 아니예요. 그 사람들 정신수준이 유치한 사람들 아니예요. 그간 계속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연구해온 사람들이라구요. 소련과 동구에만 한정해서 얘기합니다. 이쪽 얘기는 아니예요. 소련과 동구에서 그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주의가 독재자에 의해 유린당해왔습니다. 레닌의 원칙이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런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 사회주의 몰락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재생작업이라고 봐야겠네요.

 김: 그렇죠. 일전에《해외동포》란 잡지에서 원고를 부탁해오길래 “쓸 게 없다”고 거절하다가 하두 조르길래 원고를 보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썼어요. 43년만에 와본 서울의 번성을 보면서 아주 기쁘지만 두달 체류하는 동안,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썼어요. 종래로 인류 역사상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는 빈부격차가 그지진대 역할을 했습니다. 바라건대는 서울의 명물처럼 된 데모니 화염병이니 기동경찰이니 이것이 다 사라지려면 이 자본주의제도를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부득이 사회주의 제도를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런 소감이 있다고 썼어요.

 그리고 요전에 거 어디야 쓰레기산, 그래, 난지도에 가 봤어요. 글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가서 보니까 내가 피흘린 것이 저러기 위해 했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이상해지더라구요. 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피흘리고 감옥살이 몇 번씩 한 사람인데 난지도에 사는 사람들을 보니까 허무감이 생기더라구요.

 

독립운동 한 것이 허무하단 느낌

 조: 우리 텔레비전 심야프로에서도 학자들이 민주사회주의제도를 도입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런 대목에서, 사회 전체가 진보적인 입지를 확보하고 있고 다만 일부의 기득권자들이 반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내부의 싸움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 이젠 빨치산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요. 제가 《태백산맥》의 한 주인공으로 김법준이란 인물을 내세웠어요. 그 양반은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6?25가 일어나자 인민군 소장으로 전라도까지 내려와 서남지구 사령관으로 지리산투쟁을 전개합니다. 이때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투쟁했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우리 남쪽에서는 48년부터 50년까지의 투쟁을 ‘구발치’라 하고 6?25 이후를 ‘신빨치’라 부릅니다. 우리 빨치산 활동에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 ‘구구빨치산’인 항일빨치까지 연결하고 빨치산의 할아버지뻘 되는 동학까지 면면히 1백년 이상 계속된 것으로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이 몇가지가 있는데, 객관적으로 중국대륙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것과 국내와 연결된 상해 임시정부등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한숨) 공산당 영도하에 모든 독립운동이 이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실제로 중국 공산당에서도 자기네들의 순수한 애국심, 적개심에 의해 활동했거든. 항일투쟁이 전부 공산당 지도였다는 말은 지금 중국에서도 억지였다고 취소해요. 아무튼 내가 그 일원으로 참전해서 그런지, 우리 민족이 항일투쟁을 하는 데 가장 용감했던 것은 역시 공산당이었음은 분명해요. 그러나 모든 항일운동을 모두 공산당으로 귀결시켜서는 안돼요. 

 조: 상해 임시정부 중심의 항일투쟁 역사가 큰 문제입니다. 제가 쓰려고 하는 《아리랑》은 모든 항일운동 유형을 객관적으로 가치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연계를 이루지 못한 원인을 저는 분파주의가 아니라 일본, 소련, 중국 등 우리를 에워싼 강대국의 역학관계 속에서 찾고자 하며, 우리가 계속 뭉치려고 했을 때일수록 더 강하게 뭉치지 못하게 한 저들의 비리까지도 규명해볼 겁니다.

 

“조정래선생은 행운아야”

 좀 어려운 얘길 텐데, 선생님, 연변작가들은 분단의 원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쪽에서는 심각하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저는 《태백산맥》에서 분단의 원인을 내인과 외인을 5대 5로, 내인과 외인이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고 정의했습니다. 그 전에는 전부 외세원인론만 주장했습니다. 선생님쪽에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 (웃음) 조정래선생은 행운아야.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고 말야. (김옹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서 조정래씨의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피했다.) 그쯤 해둡시다. (조선독립동맹계열(연안파)과 만주동북항일연군(김일성파), 임시정부와의 관련성 그리고 남로당 등에 관해서도 김옹은 언급을 피했다.)이런 얘기는 가능하지. 남에서 북으로 간 이유는, 왕니보다 가랑니가 더 문다구요, 그때 이승만보다 조병옥이 더 미웠어요. 그 당시 묘하더라구요. 우리들의 프락치가 어디 안들어간 데가 없어. 그때 군정청의 밥끓고 죽끓는 걸 다 알고 있었다구. 아이런 판이라구. 그런데 글쎄 우리 프락치 한 사람이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라있다구 그러는 거야. 그래서 조직적으로 도망친거야. 북에서 중국으로 간 거는 정말 앞으로 장편소설 하나 엮을 게 있지.

 조: 민족의 동질성 회복문제와 연관되는 것인데요, 선생님께선 우리 민족정신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 우리 민족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신성화시켜서 다 좋다고 말하는 데엔 동의할 수 없어요. 우리도 부족점이 많아요. 친일파가 이승만과 결탁했다는 소릴 듣고 깜짝 놀랐어요.

 일본군이 중국을 점령하고 불과 몇해 뒤에 민주군, 황군 등 친일 괴뢰군이 생겼어요. 월남도 프랑스 식민지가 되자 곧 프랑스를 위한 군대가 생겼어요. 그런데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점령해서는 거의 30년이 지난 뒤에야 일본을 위한 군대가 생겼어요. 그러니까 조선사람들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최초로 항일전쟁을 시작한 것이 양자강 이남이었어요. 그때 우리 얘기했어요. 황포군관학교 교관 김두봉선생이 “빨치산은 우리가 시조다” 이래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쳐들어갈 때가 빨치산의 시초라고 하는데 우리는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부산을 오가는 일본 통신병을 매번 습격했거든. 우리는 4백년 전에 빨치산을 시작한 거예요. 우리는 확실히 용감한 민족이예요.

 조: 그럼에도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사대주의와 자기비하 의식이 팽배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원형이 없어져갔던 것이지요. 연변이나 사할린 등에서 우리의 원형을 끝까지 지켜준 그분들에게 우리들은 고마움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연변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문학이나 교육활동 등은 요즘 어떤 상황입니까.

 김: 자치주에서는 아이들이 중국말과 우리말 두가지를 다 합니다. 연변역사연구소나 어문연구소, 문학예술연구소 등 우리 어문에 대해서 아주 철저합니다. 기막힌 긍지를 가진 용사, 맹사들이에요. 대학 갓나온 사람들이나 40대들의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굉장합니다. 우리 민족은 결코 동화되지 않을 것예요.

 조: 앞으로 우리쪽 작가들과 연변 작가들의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의 《격정시대》는 차단된 우리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있지만 우리의 죄의식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변지역의 문학이 지닌 순결함과 우리 문학의 세련함이 서로 교류하고 조화되어야 서로 발전할 것입니다.

 (두사람은 12월4일에 있을 《태백산맥》출판 기념회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김옹은 창경궁 앞 서울대부속병원 옛 건물을 바라보며 “저기가 내가 북으로 도망치기 전에 입원해 있던 소아과야”라고 말했다.)

 지난 12월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출판기념회에 김학철옹이 참석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이름난 문인, 출판인들에게 한 짧은 연설은 “나는 조선의 용군 최후의 중대장이었습니다”로 시작되었다. 그의 연설내용은 조정래씨와의 대담에서 나왔던 것으로, 빈부격차의 극심함을 지적하고 이의 해결을 위해 건전한 사회주의가 필요하며 “레닌이 톨스토이의 소설을 두고 러시아혁명의 거울이라고 말했듯이 소설가에겐 역사가보다 큰 역할이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오늘의 ‘남쪽문학’에 대하여 “읽기에도 부끄러운 너절한 작품도 있다. 문학이 부유한 이들을 위한 오락물로 제공되어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김학철옹은 12월18일 서울을 떠났다. 일본에 잠시 체류한 뒤 吉林省 延吉市 河南街 80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정서의 복원

 국내에 《항전별곡》으로 알려졌던 김학철의 장편소설 《격정시대》 전 3권(풀빛 펴냄)은 작가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이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일본에 대항, 투쟁했는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전기적 작품이다. 주인공 서선장이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사건 등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뜨는 소년시절부터 독립군이 되어 민족 해방운동에 열렬히 참가, 일본군 포로가 되기까지 우리 근대사에서 가려져 있었던 무장항일투쟁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단지 묻혀 있던 역사의 발굴, 복원의 차원이 아니라 “그 사실을 담아내는 언어와 정서, 풍속의 복원과 발굴까지도 포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잇다. 그의 일관된 ‘혁명적 낙관주의’를 읽을 수 있는 이 작품 말고도 그의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가 국내에서 출판되었으며, 앞으로 그의 작품은 국내에 더 소개될 예정이다.

 김학철옹은 1916년 원산시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고등학교 재학중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중국땅으로 건너간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군으로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1943년 태항산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옥살이를 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좌익운동에 가담하다 월북했으나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문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수학했다. 금년초 49년만에 중국공산당원으로 복권된 그는 현재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으로 있다. 단편집으로 《고민》《김학철단편소설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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