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鄭明勳
  • 이성남 기자 ()
  • 승인 1989.11.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音樂은 아이키우기와 같은 것”

11월7일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지휘자 鄭明勳의 두 손은 치밀하게 절제된 선을 긋고 있었다. 이윽고 타악기와 관악기의 우렁찬 소리가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폭퐁우같은 위력으로 청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鄭明勳의 ‘베를리오즈’. 우뢰같은 박수로 환호하며 앵콜을 외치는 청중에게 그가 답례한 곡은 뜻밖에 ‘애국가’였다. 뒷날 KBS교향악단 단원에게 확인한 바로는 단원들조차 애국가를 연주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선임된 鄭明勳. 국내에서는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나 이스라엘의 바렌보임을 연사하며 올림픽 우승보다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치하하는 반면, 현지에서의 반응은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더구나 프랑스말도 잘 못하는 36살의 젊은 한국인이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는 냉소적인 시선이 있다는 말이다.

 리허설 연습으로 분주한 지난 3일 낮, KBS교향악단 지휘자실과 숙소인 조선호텔의 라운지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말을 썩 잘하는 그는 전문적인 음악이야기를 적절한 비유법으로써 쉽게 설명해주었다. 또 ‘나’라는 말 대신 반드시 ‘저’라고 했으며 “끝에 가서는” 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지휘자는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많은 것들도 생각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젊은 대지휘자가 나오기 어렵다고 합니다. 앞으로 오케스트라를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갈 생각입니까?
바스티유 오페라단과 제가 지금 어떤 관계냐 하면 결혼은 했는데 한번도 만나지 않은 상태예요. 일단 결혼식을 치른 것이니까 힘들더라도 꾸준히 참고, 오래 지내봐야 될까 안될까를 판단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쉬울 것 같지는 않지만 모든 좋은 것은 힘든 과정을 격어야 얻을 수 있는 거잖아요.

한국 연주를 마치고 파리로 가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하나요?
개관을 3월17일로 예정하고 있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된 게 없어요.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단원 충원을 위해 열흘동안 몇백명을 오디션해야 합니다. 콘서트마스터를 한사람 더 찾아야 하는데 솔로 트럼펫, 솔로 혼도없어요. 바스티유에서는 오페라만 하는 게 아니라 발레도 연주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1백여명의 단원이 있는데 우선 50명쯤 더 충원하고 2년안에 50명 정도 더 충원해서 3~4년 뒤에는 전체 단원을 2백10명 내지 2백20명의 규모로 만들 계획입니다. 처음에는 오페라와 발레 연주를 함께 하다가 마지막에는 제일 잘하는 사람이 오페라 연주를 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 한국인도 있습니까?
그래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전부 프랑스인입니다. 앞으로 오디션할 사람 중에 한국 연주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개관 프로그램인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미국 성악가인 셸리 베릿과 그레이스 범브리라는 두사람의 중요한 메조소프라노와 계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시즌에는 무슨 작품을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모차르트와 베르디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로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릴 생각입니까?
아닌게아니라 제일 좋아하는 것은 베르디와 모차르트이지만 극장이 크기 때문에 (2천7백석 규모) 그곳에서 모차르트를 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아무래도 프랑스 오페라단이니까 프랑스 작품을 주로 해야겠고 현대작품도 할 생각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나라 사람들이 프랑스 작품을 별로 하지 않았어요.

 (세계 정상급에 오른 한국인 예술가를 평가할 때 그가 ‘한국이 낳은’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느냐는 부분에 우리 국민은 가장 집착한다. 그 잣대로 볼 때도 항상 한국말, 한국사람,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鄭明勳은 우리의 자긍심을 충족시켜왔다.)

이번에 세 아들을 데리고 와 열흘간 국민학교에 입학시킨 사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는데요.
큰아이가 여덟살인데 이 시기를 놓치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애들이라 그런지 모든 것을 빨리 배워서 한국말을 저보다 더 잘해요. 음악만 생각한다면 저는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있다고 봐요. 바스티유 일을 시작해놓고 바빠 죽겠는데 지금오겠어요? 오려면 좀 전에 오든지 아니면 이 다음에 오든지 하지…. 그렇지만 저는 지나치게 우리나라, 우리나라 그러는 것은 되려 위험하다고 봐요. 조국이나 부모에 대한 사랑은 간판 써놓고 남한테 보일 필요가 없는 문제이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국민은 가끔 지나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외국에 나가더니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 다 버렸다는 소리를 자주 하고 또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사람을 무조건 안좋게 보고…그건 좁게 생각하는 거지요. 거기 가서 얼마든지 좋은 공부,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데, 또 그러느라고 한국말이 좀 서툴 수도 있는데 그 점을 트집잡는다면 나라가 클 수 없지요.

 (KBS교향악단을 연습시킬 때도 그는 한국인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단원들에게 굳이 듣기싫은 소리를 안하는 외국의 다른 객원지휘자와는 달리 자동차를 완전히 해체하여 부속을 새로 조립하는 것 같은 진지함과 열의로써 연습에 임했다고 악장 김의명씨는 말한다.)

3년전 내한했을 때 한국 교향악단 수준이 세계 교향악단보다 20년정도 뒤져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때 ‘적어도 20년’ 이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17년은 아니에요. 19년반? (이 대목에서 그는 크게 웃었다) 아직도 시간이 굉장히 필요해요. 어떻게 빨리 할 방법이 없어요.

오케스트라는 단원 한사람 한사람이 잘해야 하는데 한국 교향악단을 보면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는 잘하는 사람이 많지만 다른 악기는 별로 없어요. 그걸 키우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이 걸립니다. 연주자가 있는데 조직이 잘못되어 있다면 빨리 개선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1년 열두달 번슈타인을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안돼요. 언, 정도까지는 지휘자가 도울 수 있겠지만.

 (서울올림픽을 2년 앞두고 우리 정부에서 그에게 올림픽 때까지 한국 교향악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줄 수 있겠느냐고 제의한 바있다. 그때도 그 짧은 기간에 그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답변했었다.)

정명훈씨의 오늘을 만든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우린 항상 어머니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는 한국 전체를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인데 그 모든 재주와 에너지를 우리 일곱형제에게 다 쏟았으니 우리가 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도움을 받고도 우리가 잘못되면 그것은 우리가 큰 잘못을 해서 그렇겠지요. 이제 어머니에게도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책을 쓰시라고 권했어요.

 (그의 어머니 李元淑씨는 서울에서 시공관 앞의 ‘고려정’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또 미국 시애틀에서 시간당 1달러50센트짜리 막일을 하루에 16시간씩 하면서 아이들의 음악공부 뒷바라지를 해왔다. 음식점에서 받는 팁을 따로 모아 언제나 큰 피아노를 갖는 게 소원인 어린 명훈에게 한달에 1백달러씩 내기로 하고 그랜드 피아노를 사 주었다.)

성공한 다른 연주가 중에는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악기와 씨름해야 했던 어린 시절에 불행감을 느꼈다고 회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무서운 감시의 눈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은 화장실뿐이었다고도 말하더군요.
우리 어머니가 다른 점은 그렇게 헌신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면서도 압력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가르친 뒤에 꼭 잡고 놔주지 않는 음악선생님들처럼 네가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식의 압력, 그세 참 힘든 일이에요. 한국 부모들은 평생 아이들 밖에 모르고 살아오다가 ‘ 끝에 가서는’ 아이들이 도망가려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해요. 아이들이 우리한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요, 우리가 원해서 애들을 낳은 거지 걔들이 원해서 낳은 것은 아니잖아요.

세계정사의 연주가 중에서 자기 아이에게는 음악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그만큼 음악가의 길은 고독하고 또 다른 많은 삶을 유보시켜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토록 사랑하는 세 아들에게 음악을 시킬 계획이 있는지요?
음악은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정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타고난 게 없으면 해봤자인데 시켜서 무얼 해요? 우리 애들이 그재주를 타고났다면 음악가 되는 것 이상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피아노를 좀 시켜봤는데 아직까지는 특출난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음악가로서의 삶을 후회하거나 슬럼프에 빠져본 적은 없나요?
네살부터 여태까지 왜 이걸 했나 하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음악이 힘들때도 있지요. 끊임없는 연주여행으로 쫓기는 음악가의 생활이 어떻게 항상 기쁘고 행복하겠어요? 그러나 저는 음악이 우리 아이들 쳐다보는 거하고 비슷하다고 봐요. 피곤한데 왜 아이들이 나를 못살게 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들을 보고 한번이라도 저 아이를 안 낳았으면 얼마나 편안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음악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해요. 그런데 그 다음은 음악이에요.

 (1974년에 소련의 텃세가 심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그가 입상했을 때 우리 국민은 세계적인 피아노보다 지휘에 더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재능을 아끼는 많은 이들은 그 선택에 반신반의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밑에서 LA필의 부지휘자로 일해오셨는데 지휘자로서 그를 가장 존경합니까?
줄리니를 가장 존경했기 때문에 LA필을 선택했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더 일찍 유럽으로 갔을 겁니다. 지휘자는 음악만 아니라 여러 가지 능력이 섞여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는 단체나 행정에는 전혀 소질이 없고 그저 순수하게 음악밖에 모르는 분이었지요. 저는 그때까지 지휘자는 으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시키러나 그렇지 않으면 싸우든지 그래야 되는 줄 알았는데 그분은 아주 반대였어요. 음악가를 존경하고 순전히 음악으로만 단원들을 리드하는 분이었지요. 지휘자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단원들에게 겁을 주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저 역시 지휘를 할 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서 딱딱하게 굴지 않으려고 합니다. ‘ 끝에 가서는’ 어느 정도 음악들에게 여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군대식으로 했다간 음악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요소를 배제하려는 그의 모습은 세종문화회관 리허설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지휘하던 그는 어느 한 소절에 이르러 10여차례 반복해서 연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가 중요해서 그러는데 하프와 제2바이올린이 좀더 앞으로 다가앉으세요.” 이어 그는 지휘대 아래로 성큼 내려가 단원들의 의자를 직접 끌어다 배치해주는 것이었다.)

《르몽드 드 라 뮈지크》誌와의 인터뷰에서 지휘자가 지휘대 위에 올라선 순간부터는 민주주의는 끝난다고 했던 말과는 모순되는데요.
음악이 일단 시작했다 하면 오케스트라 단원은 한사람이 돼야 하고 그 중심은 지휘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음악이 시작되기 전이나 끝난 뒤에는 그렇지 않아요.

3년전의 모습보다 훨씬 여유있게 보입니다. 나이탓인가요?
33살과 36살은 큰 차이가 안나니까 나이 때문은 아니겠지요. 3년전만 해도 일과 개인생활이 힘들었어요. 그때는 항상 여행을 하면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점점 더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집에서 아이들하고 더 많은 시간을 지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때보다 제 마음이 훨씬 더 편안해진 것은 확실해요. 원래 저는 여기 가서 이 일하고 저기 가서 저 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한가지 일에 몰두하는 타입이에요. 옛날엔 피아노도 많이 했지만 두가지를 어느 정도 잘하는 것보다 한가지를 더 잘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일찍 한 셈이지요.

 (그토록 경외하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그는 닮은 점이 많다. 지휘자로서 종교적인 진지함으로 한우물을 파는 결단력이 그렇고 오케스트라 단원 위에 군림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존중하되 음악언어로써 설복시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삶에 있어서도 가정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며 그것을 인생의 커다란 축복이라고 여기는 점도 닮았다. 그들은 자기 아내를 매우 사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들만 세명 있는 것까지 똑같다.)

음악을 안했으면 요리사가 되었을 거라고 할 만큼 요리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어떤 건가요?
김치찌개나 생선조림처럼 매운 것을 좋아해요. (그가 한국에서의 유년시절을 기억하는 부분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골목길에서 사먹은 떡볶이가 아주 맛있었다는 것이다) 로마나 파리에서도 하루에 한번은 한국음식을, 한번은 다른 나라 음식을 먹는 게 습관처럼 되었어요. 어저께 아이들하고 롯데호텔 아래층에 가서 여기는 만두 팔고 저기는 짜장면 파는 곳엘 갔는데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어 하더군요. 국수를 직접 만들어 잘라서 해주는 짜장면을 먹었는데 쫄깃쫄깃한 게 너무 맛있었어요.

한국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돕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습니까?
누구나 사회적으로 성공할수록 책임이 더 커진다고 봐요. 돈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듯이 음악가 주에 공부 많이 한 사람은 이제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20년동안 공부했지만 레슨비를 한푼도 안냈어요. 되려 나중엔 생활비를 받고 공부했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앞으로 시간을 쪼개 여름철에는 한국에 와서 젊은이를 위한 페스티벌을 주도하거나 오케스트라를 도와주거나 하는 몇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사실은 이번에 자선연주회를 하려고 했으나 귀국이 너무 갑자기 결정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혔다)

정명화,정경화씨 등 일곱형제가 한 자리에 모일 기회는 많습니까?
여름에 한 번씩 만나 1주일쯤 같이 지냅니다 몇해 전 부모님의 결혼 40주년 기념식에서 함께 모였을 때 될 수 있으면 1년에 한번씩 만나자고 정했어요. 이제는 아이들까지 합치면 30명이 넘어요. 그 자리에서는 음악이야기는 별로 안해요. 다 애들 이야기만 하지요. 모두 애들밖에 몰라요. (여기서 그는 갑자기 그만 ‘세 강아지’들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