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위기?
  • 김재일 편집위원보ㆍ조용준 기자 ()
  • 승인 1989.11.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업계 “절박하다”…기획원ㆍ학계 “별문제 아니다” 상반된 주장

하강 추세 뚜렷한 현상황 진단, ‘안정’ 위한 처방 알아본다

한국경제는 위기에 처해 있는가? 수출이 안된다, 투자가 안된다는 뉴스가 연일 우리를 불아하게 만든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자는 늘어나고, 물가도 억제선이 무너졌다는 어두운 뉴스가 악몽처럼 우리를 위협한다.

 한국경제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경제는 되돌이킬 수 없는 침체와 후퇴의 늪 속으로 깊이 가라앉고 있는 것인가?

 

비틀거리는 수출산업

 자본금 2억원에 종업원 40여명을 고용하고 있던 의류제조 수출업체인 P통상주식회사는 지난 8월 직원들 월급만을 겨우 주고 스스로 문들 닫았다. 부도가 난 것은 아니지만 채산성이 악화되는 경제환경 속에서 빚더미에 묻혀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장 K씨는 사채 10억원 정도의 빚을 지고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최근 귀국했으나 지금으로선 재기를 꿈도 못꿀 상황이다. “사업을 시작한 후 8년 동안 이렇게까지 어려운 적은 없었다. 도저히 안될 선까지 생산원가가 올라 이익이 없고 사가는 사람도 없다. 직원들 봉급과 경비마저 대기 어려운 처지에서 사업을 계속할 이유도 여력도 없다”고 K씨는 잘라 말한다.

 현재의 한국경제가 침체기인가, 아니면 단순한 조정기인가 하는 논쟁이 K씨에겐 한낱 부질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폐업이라는 엄연한 현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도산한 이 중소기업인의 경우는 한국경제가 현재 처해 있는 어려움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올들어 8개월 동안에 중소기업 1백4개사가 자금난과 판매부진으로 문을 닫았다. 겨우 기계를 돌리고 있는 많은 업체들도 조업률이 지난해에 비해 뚝 떨어졌다.

 노동집약적인 제품을 수출하는 중소기업체, 이곳은 앓고 있는 한국경제의 아픔이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현장이다.

 그러면 한국경제라는 큰 몸뚱아리 전체도 병들어 있는가?

 경제를 크게 볼 때 특히 허약해진 분야는 수출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총수출액은 3低

현상의 혜택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87년에 36.2%가 늘어났고 88년에도 다시 28.4%가 증가했다. 그러나 올들어 수출은 아타깝게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경제기획원은 올해의 수출증가율을 7% 정도로 잡고 있다.

 상공부가 발표한 10월중의 수출도 여전히 실망적인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다. 이달중 수출은 지난해 같은달에 비해 겨우 0.7%가 늘어난 반면 수입은 무려 21%가 증가해 무역수지도 1억달러 이상의 적자를 나타냈다.

 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을 주도해온 수출의 부진은 한국경제 전반에 타격을 줄 뿐 아니라 수출산업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도 위협하고 있다.

 三星物産 기획팀의 千宙旭씨는 수출업체가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렇게 말한다.

 “두손 들다시피 한 상황이다. 작년에 비해 바이어가 40% 이상 떨어져나갔다. 지금은 가격경쟁력이 약해져 태국ㆍ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와 중남미, 동구권, 중국에 밀리고 있다. 전에는 무역금융을 받을 수 있어 출혈수출도 했으나 이젠 그나마 되지 않아 제살깎기식의 적자수출은 할 수 없게 돼있다.”

 

설비투자 침체 심각

 최근의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 바잉오피스 4백80개 중 70%가 2년 이내에 수입선을 전환하겠다고 대답했다.

 미국ㆍ일본 그리고 유럽 여러나라 백화점의 진열대를 풍성하게 장식했던 한국상품들은 이제 가격경쟁력을 잃어 홍콩ㆍ대만ㆍ싱가포르 등 경쟁국과 중국ㆍ인도네시아ㆍ태국 등 개발도상국들의 상품들에 의해 판매대에서 밀려나고 있다.

 수출부진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설비투자의 침체이다. 기업의 설비투자는 현재의 성장 뿐 아니라 장래의 성장잠재력을 좌우하므로 말하자면 한나라 경제의 건강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라고도 할 수 있다.

 지난 86년과 87년에 20%를 넘어섰던 설비투자의 증가율은 지난해 10.1%로 뚝 떨어졌다. 경제기획원은 올해 투자증가율을 작년과 비슷한 10% 수준으로 잡고 있으나 민간 경제단체들은 7%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기업인들의 투자 심리가 잔뜩 위축돼 있는 것이다.

 수출과 투자의 부진은 경제성장률 둔화로 나타났다. 상반기중 경제성장률은 6.5%에 그쳐 작년 같은기간의 11.8%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경제기획원이 예상하는 올 경제성장률은 7%선, 7%의 성장률이 결코 낮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지난해 12%선에서 5%포인트나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 위기의식을 가중시키고 있다.

 성장속도의 둔화추세와 더불어 고용도 악화되고 있다. 실업률은 88년 2.5%에서 올 상반기 2.8%로 늘어났고 하반기에는 3.1%로 상승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대학졸업자의 고용사정이 나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기획원은 내년중 실업자는 58만3천명으로, 올해보다 5만5천명이 증가할 것이며 내년 중 평균실업률은 3.2%로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비자물가는 지난달에 이미 올해 연간억제목표인 5%에 다다라 목표내 억제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태이다.

 이처럼 경제관련 각종 지표는 분명 하강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위기의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침체기’ ‘조정기’ 엇갈린 시각

 그러나 한국경제가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는 진단을 거부하는 목소리들도 만만치 않다.

 경제기획원의 吳鍾南 동향분석과장은 “7%의 성장이 경기침체라는 말은 세계 어느나라에도 적용될 수 없는 해석이다”라며 “침체가 아닌 조정기”라고 못박는다.

 지난 3년 동안 12% 이상의 성장이 분에 넘치는 것이었고 현재의 성장속도가 정상이라는 주장이다. “경기가 작년 2월부터 하강하기 시작했으나 지난 6월을 기점으로 상승국면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상승국면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하강국면이 끝난 것만은 확실하다.”

 학계의 여러 인사들도 吳과장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한다. 성균관대의 李大根교수는 “경기에는 순환이 있다. 현재의 수출부진이나 경기침체는 조정기의 현상으로 별문제가 안된다”며 성장률은 5∼7%가 적정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업계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한다. 의류제조 수출업체인 裕湖通商의 宋滿鎬사장은 현재의 불황이 경기사이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급격한 정치ㆍ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로서 “한국은 지금 경제위기에 처해 있다”고 단언한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은 이미 물건너갔고 자금력이 약한 중소수출업체는 내년 후반기쯤이면 거의 정리될 것이다. 경공업이 무너지기 시작할 내년에 한국경제는 엄청난 시련에 봉착할 것이다. 아르헨티나 꼴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처럼 발전하는 것은 꿈도 못꿀 형편이다”라고 宋사장은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ㆍ상공회의소ㆍ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도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한 정부당국의 상대적 낙관론을 “업계가 느끼는 절박한 심정을 외면한 무책임한 소리”라고 일축하고 하루속히 경기부양책을 펼치라고 주장한다.

 

원화절상 영향 두드러져

 한국경제를 ‘위기’라고 규정하려면 거기에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뿐 아니라 한국경제의 내일이 어떻겠느냐는 판단이 포함돼야 한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위기논쟁’을 갈래잡기 위해서는 현상진단뿐 아니라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의 향배에 관한 분석이 요구된다.

 우선 외적요인으로 원화가치의 상승을 들 수 있다. 계속된 원화절상의 영향이 89년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가격경쟁력의 약화는 수출부진으로 바로 이어졌다.

 원화는 美달러화에 대해 작년 한해동안 16%가 절상됐고 올들어 10월말까지 2%가 더 올랐다. 3년 전과 비교해보면 33%나 오른 셈이다.

국제무역환경의 지속적인 악화도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다. 미국ㆍEC 등의 수입규제는 날로 강화되고 있고 태국ㆍ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의 적극적인 수출확대 노력에 힘입어 이들 국가로 수입선을 전환하는 선진국 바이어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국제무역환경의 악화는 해묵은 현상으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어려움을 가져온 1차적 원인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안’의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노사분규와 이로 인한 임금상승 및 생산차질에 의한 생산성 저하를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무역흑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기인한 정부의 성급한 조치도 지적된다. 정부가 86년의 국제수지흑자를 과대평가해서 무역금융 등 수출지원시책을 단기간내에 대폭 줄였고 환율을 초고속으로 절상함으로써 수출부진 등 어려움을 자초했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시야를 조금 넓혀보면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각계각층의 욕구분출, 노사분규의 폭발, 기업의욕의 저하, 정부의 안이한 대책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된 결과가 한국경제의 위축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때 한국경제를 궁지로 모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기업가ㆍ공무원ㆍ학자 등 각자의 의견이 처한 입장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그 대답도 ‘자기몫 찾기 경쟁’, ‘정치ㆍ사회적 불안’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勞使관계가 한국경제 向背 좌우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 표현을 구체적 현상으로 접근시키면 노사분규가 문제의 중심권에 떠오른다. 그렇지만 누구도 선뜻 이렇게 표현하기를 꺼린다. 노사분규 하면 그 원인을 차치하고 책임이 우선 근로자쪽에 있다는 선입관을 줄 우려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의 林承宅 무역진흥부장은 수출부진을 비롯한 “우리나라 경제문제의 핵심은 노사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노사분규는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임금상승을 가져와 가격경쟁력을 약화시키며, 사회불안을 부채질해 기업가의 투자의욕을 꺾어버린다는 주장이다.

 경제기획원은 87년 3/4분기부터 금년 5월까지 노사분규로 인한 생산차질이 8조9천억원으로 경제성장을 2.3% 감소시킨 것으로 추산했다. 금년 1/4분기의 경우, 경제성장이 5.7%에 머문 것은 노사분규에 의해 성장률이 1.5% 감소된 결과로 보았다. 또한 올해 노사분규로 인한 수출차질은 10억4천만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위기의 문제’를 좁혀나가보면 한국경제의 향배는 앞으로 노사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축으로 짚어나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 내년 봄 노사분규가 어떤 양상을 띨 것이냐에 정부도 기업인들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趙淳부총리는 최근《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지금부터 내년 봄까지가 한국경제의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며 지금까지와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면 한국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종업원 1백30명을 고용하고 있는 전기기기 제조업체인 T주식회사 P사장은 “현재로선 내년 계획을 세울 수 없다. 내년 春鬪가 격렬하면 웬만한 중소기업은 다 쓰러질 것이다. 정부에서 노사문제에 신경을 써 분위기가 안정되면 인력을 더 쓰고 자금을 투입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규모를 더 축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업의 요청에 응답하듯 최근 趙淳부총리와 내무ㆍ법무ㆍ상공ㆍ문공장관과 안기부1차장은 산업평화 조기정착을 위한 대책회의를 갖고 앞으로 생산현장의 폭력 및 탈법행위에 대해 현장구속과 법정 최고형 구형으로 엄단키로 했다. 이와 아울러 임금위원회(가칭)의 구성을 추진, 이를 통해 노사간의 대화와 타협의 마당을 마련하려 애쓰고 있다.

 노사분규를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데는 그것이 울산과 거제에서 보듯 과격한 대규모의 분규로 비쳐져 일반국민이 노사분규의 실제적인 충격보다 위기의식을 증폭시켜 체감한다는 심리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분배불균형이 갈등 심화

 그러나 노사분규에서 분석의 발걸음을 멈춘다면 수면 위에 떠오른 빙산의 험한 모습에 압도돼 물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문제의 실체를 도외시하는 것이 아닐까? 노사분규는 한국경제와 사회가 안고 있는 더 깊숙한 문제점들이 현상계에 떠오른 신기루가 아닌가?

 4반세기에 걸친 권위주의체계 아래서 억눌려왔던 근로자들의 불만은 87년 6월의 민주화운동 이후 봇물 터지듯 폭발했고 삽시간에 전국을 격렬한 노사분규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분규가 폭발적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과거의 정치적 통제에 의한 불만의 압력이 마치 분출구를 열어놓지 않은 압력솥처럼 쌓여온 결과인지도 모른다. 분규의 초기, 사업주들은 여전히 “먹여살리고 있는데 무얼 나눠먹자는거냐”는 식의 구태의연한 발상을 버리지 못하고 근로자 대표를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노사문제를 악화시켰다.

 지난 30년 동안의 고도성장은 불균형의 방치 또는 심화를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고도성장의 결과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의 79달러에서 올해에는 약 4천8백50달러로 늘어났다. 물론 달러화의 가치가 그동안 크게 떨어졌으니 실질소득이 이렇게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아니다. 산업구조도 고도화되어 선진국들의 ‘귀족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논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소득분배율을 보면 60년대와 80년대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 40%의 소득을 가장 부유한 계층 20%의 소득으로 나눈 10분위 분배율은 1965년 0.46에서 1985년 0.41로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80년대 후반에도 우리나라의 가장 부유한 사람 20%의 소득합계는 가장 빈곤한 사람 20%의 소득합계의 7배가 돼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의 4배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학력간ㆍ남녀간ㆍ직종간 격차도 심하다. 생산직에 비해 사무직이 1.5배, 전문기술직이 2.3배, 관리직이 3.4배를 더 받고 있다.

 

과소비 가져오는 富의 편재

 소득의 불균형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부의 불균형이다. 서울의 경우 가구수로 28%만이 토지를 보유하고 있고 그중 1.4%가 서울 토지의 58%를 소유하고 있다. 그뿐인가, 도시에 사는 가구의 3분의 2이상이 단 1평의 땅도 못가지고 있는 데 반해 전인구의 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70%의 사유지를 소유, 작년 한해동안 지가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 68조원의 대부분을 챙겼다.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은 어떤가? 대기업 중심의 산업정책은 중소기업의 기술축적을 불가능하게 했고 따라서 일본의 경우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도우는 자립적 경제를 이루지 못했다.

 지역간 불균형은 어떤가? 서울과 부산을 축으로 한 경기도와 영남지방에 경제개발이 집중됐고 호남과 강원도 등은 뒷전에 밀려 지역간 소득격차 또한 엄청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기획원은 68년, 77년, 87년 각각 도별 자산분포를 조사했으나 그 결과는 극소수의 인사들에게만 열람될 뿐 ‘대외비’로 필름에 담겨져 금고에 깊이 보관돼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불균형 속에서 과소비는 필연적인지 모른다. 부동산투기 등 불로소득으로 인한 고소득층의 헤픈 씀씀이는 어쩌면 당연하다. 3천만원짜리 이탈리아제 침대, 1천3백만원짜리 여자옷, 1천5백만원짜리 미제욕조세트, 7백만원짜리 커피세트, 4백70만원짜리 핸드백, 45만원짜리 장난감자동차 등 과소비 사례는 끝이 없다.

 부유층의 과소비는 서민의 알뜰풍조도 흐트려뜨리고 있다. 부동산투기 열풍으로 집값이 엄청나게 올라 저축으로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해버리고 대신 오디오ㆍ비디오 등 가전제품과 자동차 구입에 나서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골프인구도 올들어 25만명이 늘었고 금년말엔 1백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보아 골프를 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소득계층 사람들이 ‘사치대열’에 너도나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저임금 근로자의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전시효과를 통해 소비성향을 부추긴다. “백화점에 가서 두달치 봉급인 30만∼40만원짜리 액세사리를 볼 때 삶의 의욕을 잃는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P어패럴의 여공 L양의 말을 귀담아 듣게 된다.

 이러한 불균형구조는 권위주의체제 아래에서 30년 가까이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87년 여름 이후의 정치적 민주화는 ‘판도라의 상자’속에 가둬두었던 불만의 목소리들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성숙 위한 진통’ 낙관론도 많아

 작금의 한국경제를 말할 때 많은 학자와 기업가들은 그 해결책을 경제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좁게는 4당체제와 연관시키는 시각도 있다. 이 4당 게임의 정치질서 속에서 각당은 모든 문제를 당리당략 차원에서 보고 있다. 국민들은 통일논의 등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서도 혼란에 빠져 있다.

 최근 한국능률협회가 전국의 2천개 기업 경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인의 75%가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정치적 안정을 꼽고 있다.

 근로자는 자기몫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투자의욕을 잃은 기업가들은 부동산투기와 돈굴리기(財테크)에 열을 올린다. 정치는 불안정하고 정부는 효율적인 정책을 집행할 수 없다. 국민들은 너나나나 들떠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경제의 앞날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암담한 상황 속에서 내일의 모습을 지나치게 어두운 색깔로 칠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해외의 시각은 어떤가?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에서는 지금 경제위기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3년간 매년 12%가 넘는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인들은 올해 9개월간의 성장률이 ‘불과’ 7%로 떨어지자 충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은 성숙한 경제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국경제가 봉착한 자신감의 위기이다.”

 영국의 권위있는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의 서울주재 특파원인 매기 포드씨는 이보다 더 낙관적이다. “한국경제는 와해되고 있지 않다. 다만 대외의존적 경제체질이 대내지향적으로 급속하게 이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보다 높은 단계의 경제성장으로 가는 징조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다.”

 포드 기자는 수출과 국내소비의 균형, 기업의 기술개발, 노사관계의 정립, 복지증대를 위한 정부재정지출 확대의지지, 금융부문의 현대화만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의 한국경제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과 더불어 국내의 많은 학자도 한국경제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한국경제의 저력을 인적 요소에서 찾는다.

 서강대의 金秀勇교수는 “현재 한국경제에서 노사관계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지만 작금의 노사현상은 성장과정에서 발생한 필요악에서 벗어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노동자들이 아직까지 우수하고, 기업가들도 진취적이고 우수한 능력을 지녔다. 우리 기업이나 국가적인 적응력을 볼 때 잠재력은 상당히 크다”고 말한다.

 연세대의 尹錫範교수 역시 현재 일고 있는 위기론을 일축하고 “남미경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부지런하고 일하기 좋아하는 국민이고 그동안 노사관계도 많이 성숙해졌다”고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성장잠재력 살려 모순 극복해야

 한양대의 劉鍾九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경기둔화현상이 2∼3년 더 지속될 것이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 한 한국경제가 중남미쪽으로는 안갈 것이다. 일본쪽으로 가리라고 본다. 아르헨티나의 길로 가도록 국민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劉교수는, 산업구조의 조정은 대외적인 충격을 우리 내부에서 흡수ㆍ소화할 수 있도록 자생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하며, 중소기업 육성의 초점도 대기업과의 연결고리를 튼튼하게 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층간불평등을 좌우하는 것은 근로소득이 아니라 재산소득의 분배이므로 기업들이 사원임대주택을 적극 건설, “이 회사에 근무하는 한 주거문제는 해결된다”는 안도감을 근로자들에게 심어준다면 노사관계는 의외로 쉽게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경제는 여전히 큰 성장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경제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의 해결방식을 국민적 합의에 의해 도출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정부는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서 탈피해 각 부문간 균형발전의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하며 기업은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화해 기술축적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근로자는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급진적인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이 결국 그들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 국민은 지난 30년 동안 많은 사회적ㆍ경제적 위기를 맞이했으나 그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하며 경제기적을 이루어낸 체험과 저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경제는 위기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ㆍ사회가 민주화되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경제민주화 과정에서 겪는 ‘불확실성의 위기’이고 ‘조정의 위기’이다. 또한 보다 고도화된 경제구조로 옮아가는 ‘성숙화의 위기’이다.

 

아르헨티나 실패와 가진자의 집착

 지난 5월 아르헨티나에서는 굶주린 군중이 식량폭동을 일으켜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3대 곡창지대의 하나인 비옥한 팜파 대평원을 안고 있고, 한때 세계 최대의 곡물ㆍ육류 수출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굶주림은 분명 天災는 아니었다.

 초고속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서 상인들은 하루라도 더 늦게 팔려고 창고에 쌓인 상품을 내놓기 꺼려 하고, 수출업자들은 휴지로 변해가는 아우스트랄貨 대신에 외화를 얻기 위해 식량수출을 늘리면서 식량난이 가중되었던 것. 이 천혜의 나라가 겪고 있는 곤경은 그로부터 두달 뒤 카를로스 메넴이 제46대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인수받던 날 행한 그의 취임사에도 잘 나타난다.

 “국민 여러분은 자동차를 차고에 놓아두고 자전거를 사셔야 합니다… 자전거는 건강에도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국민 모두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르헨티나는 자동차 경제에서 자전거 경제로 뒷걸음질쳐 왔다.

 지난 30년 가까이 위로만 치솟던 한국경제가 최근 2∼3년 동안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르헨티나의 예를 인용하며 한국경제가 자칫하면 침체와 후퇴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과연 이 비유는 적절한 것인가?

 한국경제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는가?

 산업연구원의 金熙宙박사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역사로부터 이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경험은 우리에게 먼저 성장과 복지의 조화문제를 생각게 한다. 국민경제 성장과 복지증대의 요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개인 혹은 여러 이익집단이 개별적 입장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였고 나아가 사회복지의 확대도 가져오지 못했다.

 다음으로 경제성장 과정에서 계층간의 갈등이 얼마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공업화와 더불어 싹튼 계층간의 갈등이 정치적ㆍ경제적으로 이데올로기화하면서 자기몫에 대한 요구가 집단행동으로 표현됐는데, 그 결과는 경제의 성장도 복지의 증대도 가져오지 못했다.

 계층간의 갈등은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바 이러한 갈등은 오히려 보완관계로 전환시켜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경제적ㆍ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특히 경제에 있어서 정책과 아울러 사람의 문제 또한 중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상대적 빈곤을 줄이기 위해 가진자가 보다 큰 양보를 할 필요가 있음을 아르헨티나의 경험은 가르쳐준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정부의 지속적이고 일관성있는 정책, 장기적 비전을 가진 정책이 절실함을 일깨워준다.

 경제개발이나 反인플레정책에 대한 이해집단의 압력에 의해 정부가 정책의 일관성을 상실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때 생산성 증대나 경제의 안정 등 어느것 하나 성취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경험에는 경제발전과정에 있는 모든 개발도상국들에 적용될 수 있는 普遍的 교훈이 있다. 그러나 지구의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경험은 역시 그 나라의 역사적ㆍ자연적 특수성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한계도 갖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