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소박한 참여에서 사회운동 前衛로
  • 이문재기자 ()
  • 승인 198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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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8일로 결성 15년째 맞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70년대 사회운동 앞장…분단극복 민족통일 문학운동이 과제

 1974년 11월17일, 일군의 젊은 문인들이 서울 종로구 관철동 한국문학사 편집실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뜻이 통하는 문인들에게 연락을 취해 서명작업을 받느라 분주히 움직였고 廉武雄씨가 쓴 선언문을 필사하느라 광주 중앙여고 교사이자 시인인 梁性佑씨 등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준비가 갖춰지자 서울 화곡동 高銀시인의 집에 모여 동대문시장에서 끊어온 광목에다 큼지막한 구호를 썼다.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 “시인 김지하 석방하라.” 미리 연락이 된 30여명의 문인들은 이튿날인 74년 11월18일 오전 10시, 광화문 의사빌딩(현 교보문고 자리) 앞에서 ‘101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선언문을 낭독하자마자 고은, 朴泰洵, 李文求, 趙海一, 李時英, 宋基元, 尹興吉씨 등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날부터 한국문학, 한국지식인사회는 하나의 전기를 맞이한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는 바로 이렇게 결성된 것이다. 자실은 유신 치하의 암울한 70년대를 지나오면서 한국 보수문학은 물론 정치권력, 그리고 당시의 지식인 사회를 각성시키는 사회운동의 맨 앞을 달려왔다(68면 ‘자실이 걸어온 길’ 참조).

 자실이 결성되던 74년 전후의 시대 상황은 우선 문단에서 김지하 시인이 투옥돼 있었고 정치적으로 개헌청원서명운동, 문인ㆍ지식인간첩단사건, 민청학련 사건, 조선ㆍ동아투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민주회복국민회의결성 등 일련의 움직임으로 꿈틀거리던 위기의 시대였다.

 

“문학운동이 ‘화살’을 쏘았다”

 ‘순수한 문학적 양심과 인간적 이성’에 바탕하여 이 땅에 현실참여란 새로운 ‘문학운동’을 뿌리내리기 시작한 자실의 활동은 이문구씨의 말처럼 문인들의 위기의식, 즉 독재탄압에 대한 “문화수호적 입장 표명”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들 문인의 이론적 ‘공통분모’로 작용된 것이 75년 발표된 白樂晴씨의 민족문학론이었다.

 백낙청교수의 민족문학론은 그 이전의 시민문학론, 리얼리즘문학론, 농민문학론, 민중문학론 등을 “민족의 주체적 생존과 인간적 발전을 요구하는 문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민족문학론은 분단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여 “문학자체의 발전에도 기여하고 분단의 극복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자실은 70년대 후반 재야운동의 중요한 몫을 맡아왔습니다. 당시 지식인 사회가 전적으로 자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 문학운동이 ‘화살’을 쏘았던 것이지요.” 자실15년을 돌아보는 고은 시인은 “그후80년대를 겪으면서 우리 문학운동은 역사속에 자기를 실현할 만큼 성숙해왔습니다”라며 87년 9월 자실의 이념을 시대상황에 맞춰 확대ㆍ발전시킨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라는 조직체계에서 그 의의를 새롭게 찾았다.

 자실 15년은, 84년까지의 제1기, 87년 9월까지의 제2기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제3기로 나뉘다. 84년까지의 제1기는 긴급조치에 맞서, 김지하로 대표되는 옥중문인들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구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민청련, 동아ㆍ조선투위, 기독교인권위원회 등 재야지식인 단체와 손잡고 YH사건 등 반독재투쟁의 선두에 서온 것이었다. 특히 ‘민족문학의 밤’ ‘구속문인의 밤’ 등의 행사와 심지어 ‘문학인 단식 농성’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국제뉴스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78, 79년의 여러 ‘문학운동’들이 그 정점을 이룬다.

 “백낙청과 같은 문학이론개발, 고은과 같은 ‘활동가’, 김지하로 대표되는 투사” 이 세 요소가 자실의 70년대를 이끌어나온 에너지라고 박태순씨는 말한다. 활동가로서 구호를 외쳐대면서도 자실문인들은 작품을 계속 발표해왔다. “작품다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정치꾼’으로 매도당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고은씨는 말한다.

 70년대 자실의 ‘문학운동’은 한국사회 전반에 민중이란 개념을 전파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민중은 70년대의 학생운동권에 실천논리를 제공해왔으며 80년대 들어서는 인문사회과학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박태순씨는 자실의 문학운동이 우리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의 수용폭을 강조한다. 이시영씨는 자실이 “표현 자유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으며, 해방 이후 사라졌던 문학 고유의 정치성을 회복해주었다”라고 그 의미를 평가한다.

 10ㆍ26과 5ㆍ17을 겪으며 시작된 80년부터 84년에 이르는 기간은 文學內 창작활동, 이론정립에 치중하면서 ‘민중문학론’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외형적으로는 자실의 침묵기였다. 故 蔡光錫씨를 필두로 한 자실의 젊은세대는, 70년대의 민족문학이 지식인 작가(속성)에 의해 객관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지식인 참여문학’이라고 비판하면서 민족문학을 민족적민중문학론-노동문학론으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이 시기에 노동자시인 박노해가 등자하면서 지식인작가들은 충격을 받는다.

 

민족문학론 비판과 문학론의 다양화

 민족문학론을 비판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다양한 문학운동론은 87년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자실은 이 시기를 겪자마자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된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문학운동론은 기존의 민족문학론, 민주민족문학, 민족해방문학, 노동해방문학론 등 다양한 변모를 보이고 있다. 이들 문학운동론은 크게 “민족의 통일을 우선하는” 민족해방문학론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우선으로 하는” 노동해방문학론으로 나뉘어 최근 대결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백무산 시인으로 대표되는 “소시민성을 극복한” ‘현장 작가’들이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자실이 확대 개편된 이후 작가회의가 역점을 둔 것의 하나가 분단극복 통일문학운동이었다. 88년 7월 7ㆍ4남북공동성명 16주년을 맞아 작가회의는 ‘남북작가회의’를 제창한 바 있다. 작가회의는 공개서한을 통해 “민족통일운동에 선도적 서기 위한 작가적 자세를 정립”하고 “남북간 작품교류, 모국어와 민족정서의 동질성 보존을 위한 공동 작업, 현지답사반 교환”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작가회의의 판문점 예비회담 개최 시도는 당국에 의해 봉쇄당했다.

 한편 문학운동과 동시에 자실 소수 문인들이 민족문학ㆍ민중문학론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을 때 김현, 金治洙 등 이른바 ‘知性主義 문학’ 문인들은 민중문학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실을 87년까지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던 평론가 金炳翼씨는 권력과 보수문단에 대한 자실의 저항은 높이 평가하지만 “민족문학론과는 다른 입지에 있는 작가들도 권력과 사회 모순에 대항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작품으로는 비민족문학 쪽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87년 이후 사회구성체논쟁을 축으로 하는 민중문학론은 앞에서 열거했듯이 외부적으로는 분열상을 보인다. 민조문학 내부에서도 노장층들은 “진보적인 이론만 있고 작품은 없다”는 비판적인 지적을 하는 반면, “다양한 이론개진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작가들도 있다. 이와 같은 윗 세대들의 반응을 姜亨喆시인은 “문학운동이 노동ㆍ농민운동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유한 운동으로 재조정되는 시기”라고 정리하고 있다.

 진보적인 문학운동론을 바라보는 젊은 知性主義문학론자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현단계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다. 평론가 南眞?씨는 “계급ㆍ계층을 초월하는 하나의 이름 아래 절대 다수를 포용하는 논리는 한계에 직면했다”면서 “문학계에도 선명성 경쟁에 휘말려 구호가 작품을 압도하는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된 “사회과학의 성과를 곧바로 창작에 대입시켜 문학을 실천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는 운동의 폭을 좁히는 역효과를 낼지 모른다”고 했다.

 ‘젊은 한국문학’이 민족ㆍ노동해방문학과 자유ㆍ해체주의문학의 양립상을 보이는 가운데 자실을 계승한 작가회의는 90년대의 민족통일문학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앞두고 있다.

 

자실이 걸어온 길

● 74. 11. 18 고은 백낙청 이문구 신경림 조태일 박태순 등 ‘자유실천문인협의회’결성(대표간사 고은), ‘101인 선언’발표

● 75. 2. 10 자실, 민주회복국민회의 등 14개단체와 국민투표 불참 등에 관한 성명 발표

● 78. 3. 13 동대문천주교회에서 ‘김지하구출위원회’결성(위원장 김승훈ㆍ고은)

● 78. 4. 24 성공회에서 ‘민족문화의 밤’ 개최

● 78. 8. 13 고은 등 YH농성사건 배후조종혐의로 구속됨

● 79. 11. 24 명동 YWCA사건

● 80. 3. 20 자실 기관지《실천문학》창간

● 84. 12. 19 자실 총회, 제5선언문 채택

● 85. 8. 23 무크지《실천문학》폐간

● 86. 9.  제1회 ‘민족문학교실’ 개설

● 87. 2. 24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 진상발표를 요구하는 ‘87문학인선언’발표

● 87. 4. 29 4ㆍ13호헌조치 반대성명

● 87. 5. 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족(고은ㆍ이호철ㆍ문병란 등 공동대표로 참가)

● 87. 9. 17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 개최

● 88. 2. 3 범 문학인 502인, 김남주시인 석방 탄원서 제출

● 88. 7. 2 ‘남북작가회의’ 제의

● 89. 3. 27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 판문점행 저지 항의시위

● 89. 4. 24 문화ㆍ예술인고동시국선언문 발표

● 89. 10.  제3회 민족 문학교실 개최

● 89. 11. 16 자실15주년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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