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칼럼] ‘작은땅 큰마음’을 향하여
  • (본지 칼럼니스트 소설가) ()
  • 승인 198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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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한대의 승용차는 국회의사당을 지척에 둔 거리를 시속 2∼3마일 정도로 서행하며 ‘멸공’을 외쳐댔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불구대천이라는 걸 강조하는 걸로 미루어 어떤 종교단체에서 나온 듯한 그 자동차의 보네트는, ‘멸공’ 두 글자로 아예 도색되어 있었다.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차 안에서 마이크를 지고 한껏 볼륨을 높인 확성장치를 통해 소리치는 남자와 행인들에게 삐라를 건네주는 여자의 표정은 그러나 퍽 덤덤해 보였다. 선전을 주관하는 측은 지금은 그런 때라고 믿었을 것이다. 역시 무표정한 채 그 소리를 듣는 사람 중엔 새삼스럽게 1950년대 전후의 거리풍경을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무변화의 변화와 변화 속의 무변화

 그보다 열흘 전쯤 서울에서는 경남대학 주최로 마르크시즘에 관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으며, 이 모임에는 소련과 동유럽을 포함한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참가했다. 이 두가지 상황을 맞바로 대비시켜 당면한 현실의 의미를 양분하는 것은 부질없다. 다만 무변화의 변화와 변화 속의 무변화를 아울러 확인할 따름이며, 어떻든 한국은 국제적인 ‘사랑방 손님’이나 주인으로 나앉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한쪽하고만 트고 살다가 중문과 쪽문까지 열고, 지금껏 “누구시더라?”하며 백안시하던 낯선 타인과도 기꺼이 어울린 것이다.

 이때 필요한 마음가짐은 크고 넉넉한 것이라야 한다. 바깥의 외인들과는 웃는 낯으로 악수를 나누면서 집안 단속이 지나쳐 앞뒤 이치가 안 맞고,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모를 만큼 혼돈 속에 빠뜨린다면, 모처럼의, 또는 필연적인 개방도 서로 맞들기 어렵다. 眼高手卑랄까, 이미 눈과 마음은 높은 데에 올라서서 드넓은 곳을 향하여 視程거리를 확대해가는 자세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밑을 굽어다보면 너무나 좁고 옹색함을 발견한다. 특히 끊임없이 지속되는 정치적 소모전에 모두들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형편이다. 한낱 고십거리가 대단한 정쟁의 소재인 양 시끌짝하게 이어지는 사이, 본래의 원천적인 현안은 오리무중으로 사라지는 느낌이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법을 내세워 나는 아니라고 되돌아선다. 유니섹스의 기풍이 어느새 정치세계에도 번졌는지 ‘사나이 부재 현상’이 도처에 만연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최근 장편소설《격정시대》의 저자이자 연변서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김학철씨와《샘이 깊은 물》을 통해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난번 소련서 온 이상조씨와 더불어 팔로군 안의 조선의용군지대에서 같이 항일전을 벌이다 다리 하나를 잃은 노혁명가는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서울) 와서 저의 眼界가 많이 넓어졌습니다. 예전에는 남조선 반동이라고 외쳤습니다만 와 보니 되레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회주의가 변경되는 건 아닙니다만, 여기서 많은걸 따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낙후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상조씨가 자신을 가리켜 여전히 혁명가이고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밝힌 것처럼, 올해73세인 그도 그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김옹이 말한 ‘우리 사회주의’는 그가 국적을 두고 있는 중국을 지칭하는 것인데, 아무튼 칭찬을 듣는 기분은 괜찮았다. 국적은 다를망정 한국민족으로서의 본래적 감정은 영원하다는 이 기골찬 노인네 앞에 끝내 당당한 민주주의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더 좀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심정이 그 다음에 일었다.

 정치를 하되 쩨쩨하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따위 신경전으로 시종하여, 안 그래도 물린 감이 있는 시민들의 정치의식에 박차를 가하지 말기 바란다. 사태 해결이나 진전에 도움을 주는 행위는 없고, 우물가 싸움이나 삿대질이 서로 멱살을 잡는 泥田鬪狗로 상승되는 것 같은 ‘各個전투’만이 판을 친다. 하나의 예로 각 당의 대변인 성명이나 촌평을 들 수 있다. 사사건건 언급하지 않는 일이 없는데다, 어떤 때는 배배 꼬인 말씨름으로 상대방의 신경을 긁고 정치의 품위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의 혐오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한국언론 특위의 고십기사가 끼어들어, 노출된 상황에 명쾌한 사리나 이치로 대처하기보다는 음습한 시각과 싸움을 충동질하는 측면마저 생긴다. 정당 대변인의 말의 자제와 신문 고십란의 폐지는 그러므로 전향적으로 생각해볼 문제이다.

‘外皮’는 개방인데 ‘內皮’는 전과 다름없는 현실

 밖에서 본 한국의 자화상은 일단 그럴싸한 모양으로 비치고 있음이 분명하며, 그만한 자긍을 가질 만한 단계에 와 있다. 하지만 막상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허점투성이인 게 실상이다. 정치는 노상 ‘병목현상’을 뚫지 못하고, 그 안에는 가스가 가득 차 있는 듯한 실정이어서 보기에 딱할 뿐더러, 불투명한 感情移入을 국민들의 생활 각반에 미치게 하고 있다. 언론기관에는 또다시 정보기관원들의 출입이 목격되는 ‘역코스’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밖을 향해 내민 손의 外皮는 개방인데 內皮는 전과 다름없는 현실 날조의 반역사적이다. 이제와서 학원 프락치사건이 대두되는 사회는 음험하다. 동갑내기 청년을 폭력으로 살상한 소행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똑같은 방법으로 죽은 그들의 동료나 선배들도, 그와같은 반지성적인 ‘죽임의 반복’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학원프락치가 云爲되고 그에 대한 혐의의 눈이 대학내에서 번득이게 만든 책임과 죄는 더 크다. 몇 십배나 더 질이 나쁘고, 나잇살이나 먹은 자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에게 부끄럽다.

 저러다간 일본의 천황제를 흉내내어 ‘百世一系’쯤 노릴지 모를 김일성부자가 상존하는 것도 그렇고, 반공은 불가불의 명제요 조건이다. 그렇더라도 대응하는 방식은 1950년대와 같을 수가 없고 같아서도 안된다. 그들 주변의 ‘멸공 대상국’들이 이미 탈바꿈의 몸부림 끝에 우리와 손을 잡아가는 마당에, 낡은 ‘멸공 장갑’을 낀 채 악수할 수는 없잖은가. 한 사회주의 혁명가는 입에서조차 대한민국에 대한 종전의 인식이 “창피하다”고 털어놓는 터에, 이 땅의 내부가 옛날로 되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창피한 일이다.

 ‘恒産의 여유’가 지금은 절실하다. 언제나 작은 땅덩이를 넓게 사는 마음가짐으로 미래를 겨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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