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民意’ 수용될 수밖에 없다
  • 민두기(서울대교수.동양사) ()
  • 승인 198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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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革과 守舊의 갈등 겪는 中國 어디로 가고 있는가

天安門 앞 광장으로 인파가 1백만을 헤아리게 되어 시위군중의 열기가 한참 뜨거웠을 때, 필자를 잦아온 어느 방송국기자와 다음과 같은 내용의 私談을 나누었다가 그 요지가 9시뉴스에 보도되기까지 한 일이 있었다. “시위군중이 내 건 요구를 정권당국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받아들인다면 중국당국이 누리고 있는 권위가 무너져 정권의 통제기능이 거의 마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권당국은 시위군중의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일단 군중의 요구를 억압한 뒤에 서서히 그들의 뜻을 수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필자의 어설픈 논평은 어정쩡한 것이 되고 말았다. 시위군중의 요구가 곧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그 요구가 억압될 것이라는 것도 논평했어야 옳았기 때문이다. 시위군중의 요구중에는 예컨대 언론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현직총리의 퇴진요구까지 있었다. 특정한 이념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를 통제하고 있는 정권이 과연 그 이념체계를 부정할지도 모를 독립적 언론활동을 언론자유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었을까? 공산당의 기구에 의해 선정된 국무원총리를 민중의 압력으로 갈아치울 수 있었을까? 아무런 예비적인 준비도 없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공산당의 권능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할 터인데, 창출된 정권의 제2세대도 제3세대도 아닌, 정권을 직접 창출한 바로 그 사람들이 그러한 사태를 용인할 것인가.

 

유연성 잃고 방어본능에만 충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폴란드나 헝가리의 조용한 혁명보다 훨씬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의 공산당정권은 폴란드나 헝가리처럼 進駐해온 소련군의 덕택으로, 말하자면 他力으로 생긴 정권이 아니라 스스로의 혁명투쟁으로 만들어낸 정권이기 때문이다. 그 폴란드나 헝가리에서도 오늘의 조용한 혁명은,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의 파업이 진압되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바웬사가 구금되는 등의 갖은 곡절 끝에 도래한 것이고, 헝가리 폭동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짓밟힌 뒤 오랜 세월을 지나서야 도래한 것이 아니던가.

 필자가 중국 정권당국의 억압방법을 언급하지 못한 것은 그럴만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나. 지난날 강력한 동차자인 國民黨을 상대로 투쟁을 해가는 과정에서 공산당은 기막히게 능수능란한 유연성을 보였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유연성이 ‘당연히’ 발휘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막강한 적대세력을 다룸에 있어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투쟁의 방향을 확실하게 잡으면서 지기 세력의 조직 · 단결은 유지할 수 있었던 그 유연성은 중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감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감탄’에 가려 오늘의 중국공산당은 권력탈취 활동시기의 그 공산당과는 현실적 기능, 역사적 위상을 달리하는 것임을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국민당과 싸울 당시의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허약한 입장에서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며 오늘의 공산당은 그 존재를 위협하는 적대자, 비판자를 갖지 않은 채 막강한 통치자로서 40년을 이미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비판자를 그 체제의 일부로서 갖고 있는 非共産體制가 아닌 공산당 통치질서 아래서 안주하던 중국은, 처음으로 일종의 도전, 저항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정권탈취자로서의 기민하였던 유연성은 간 데 없고 통치자로서의 방어본능에만 충실한 끝에 힘에 의한 억제로 도전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기는 일단 고비를 넘긴 듯 보였지만 그러나 그 대가는 값싸지 않았음은 집권당국자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물론 외부세계에서의 비난이나 경제제재 따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공산당 창당이래 근 80여년, 집권이후 40년동안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한, 黨의 권위에의 도전을 지금 경험하고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중국 최고의 엘리트 양성집단인 北京大 신입생이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고서야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은 경우는 미미한 일에 불과하다. 모든 국민들이 마음으로부터 경축을 보내야 할 건국 40주년행사를 계엄령하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권위를 도전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비상방법이었으며 값비싼 대가였던 것이다.

 최근의 <人民日報>(10월10일자)는 건국 이후 40년이 지났고 天安門앞의 ‘動亂’을 성공적

으로 진압한 뒤인 시점인데도 아직도 안정과 단결을 호소하면서 “옛날의 길(文革식의 길)로는 되돌아가지 않을것” 이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안정과 단결을 아직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을 방증해주는 것으로서 최근 중국의 한 지식인이 필자의 한 친지에게 보내온 편지에 쓴 “痛甚! 痛甚!”의 네 글자를 소개함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로 天安門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강화된 ‘정치학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엄존해 있는 것이다. <인민일보>의 또 다른 논설은 ‘動亂에 말려들어 과오를 범한 同志’와 ‘부르조아 자유화(개혁주장을 중국당국은 이렇게 표현한다)의 입장을 완고하게 고수하여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은 구분돼야 한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소극적인 개혁주장자와 적극적인 개혁주장자를 구별하여 前者에게는 관용을 베푼다는 뜻이 될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정권당국자가 이렇게 구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소극적인 개혁주장자’가 엄존해 있고 그 숫자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들 소극분자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은 수 없는 것은 단시 그들의 수가 많기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그들의 지향 · 소망이 비록 소극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총서기 江澤民은 최근 옛친구인 중국계 미국인 하워드 차오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앞으로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여전히 경제건설이라고 했다고 한다. 趙紫陽에 대해서는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는 공식적인 비난은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趙紫陽시대의 경제정책에 있어 그 원칙에나 지도사상에 잘못은 없었으며 다만 구체적 실시과정에서 편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趙紫陽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지상과제는 여전히 경제건설이다.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은 鄧小平의 개혁정책이 시작된 이래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문제이다.

 

至上課題는 경제건설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애써 구축해놓은 사회주의체제 자체가 종내는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중국이 정말 강대국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이 1979년에 경제개발정책을 쓰게 된 배경이었고 그 인식은 지금도 변할 까닭이 없다. 그러기에 江澤民이 자기의 최대과제가 여전히 경제건설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건설을 하다보니 효율은 증대시켜야 되겠고 그래서 어떤 ‘편향’이 생겨, 그것이 극대화되어 天安門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현재의 당지도부는 보고 있다. 문제는 그같은 ‘편향’이라는 것의 위험이 전혀 예상못했던 게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사람들을 天安門광장으로 내몬 동기 중 중요한 것의 하나가 인플레였는데 생필품의 생산증대를 위해 통제경제의 틀을 크게 벗어난 가격자유화를 확대하면 인플레의 위험,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風險’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부득불 가격자유화를 실시했었는데 그 風險은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風險’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이다.

 ‘부르조아 자유화’사상만 하더라도 그것이 금년 4월부터 天安門광장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胡耀邦을 실각케 했을 정도로 그때 이미 현저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文革때처럼 부르조아 자유화사상을 ‘일소’하려 한것이 아니라 통제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묶어 두려던 것인데 거기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江澤民이 말한 그 ‘편향’을 불가피하게 했던 상황, 부르조아 자유화사상을 발생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즉 경제건설에 있어 효율을 높여야 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날 경제건설을 시작했을 때 당이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쥐고 하다보니 효율은 저조하고 부패가 만연하였다.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당의 권한을 축소할 필요가 생겼다. 黨 · 政분리론은 그래서 나왔다. 이제 부르조아 자유화사상에 대처하가 위해서 다시 당통제권을 강화하는 모양인데 당통제의 지나친 강화가 경제건설의 효율에 큰 장애라는 것을 江澤民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혀 준비가 없던 상태에서 1백만 군중을 天安門에서 맞이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 중국은 ‘경험’도 쌓았고 ‘준비’도 할 수 있다. 지난날의 유연성을 다시 회생시켜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1백만 군중을 앞에 놓고 ‘당장’ 어떤 결정을 하여 정권의 기능이 마비될 위험을 걱정치 않아도 될 만큼 ‘시간’도 벌었다.

 여기서 생각되는 것이 문화대혁명의 과오의 책임을 거인 毛澤東에게 감히 지움으로써 당의 위태로웠던 국면을 수습했던 전례이다. 전례를 살려 부패 · 비능률, ‘부르조아 자유화’사상과 다시 직면하여 보다 유연한 신축성을 갖고, 天安門사태를 겪고서도 ‘여전히 엄존하는’ 여러 요구를 수렴하면서 절대절명의 과제인 경제건설을 추진하는 길말고 다른 길이 있는 것같지 않다. 제13기 5中全會에서 파벌안배가 어떻게 되든, 어떤 결의안이 나오든, 또는 鄧小平의 사망이라는 ‘예상되는 변수’가 언제 작동을 하든, 공산당은 天安門앞에 모인 군중의 요구를 보다 능숙한 솜씨로 수렴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당위라기보다 절대적인 필요이다. 몇달 전 필자가 방송국기자에게 했던 말은, 그렇게 되는 과정에의 성찰이 소홀하기는 했다. 그러나 군중의 소망을 결국은 수렴할것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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