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양의 어머니 金正恩씨, 사랑과 寬容을 호소
  • 박상기 기자 ()
  • 승인 198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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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딸을 집으로 보내 주세요”

聖母昇天日이자 수경이가 돌아온다는 날. 잊을 수 없는 하루다. 역시 내 딸은 意志대로 판문점을 넘어 귀환했다. 별다른 사고는 없었기에 마음은 놓이지만 집에는 오지 못할 내 딸. 이렇게 무섭고 서러울 줄이야.

 수경이를 보러 서울대학병원으로 갔다. 겹겹이 싸인 전투경찰. 그 사람의 벽을 넘기란 불가능했다. 기자들의 사진 세례만 받고 수경이 못보고 돌아오는 허무함을 성당에서 기도로 달랬다. 하느님, 내 딸을 구원하여 주소서.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林秀卿양(21 · 한국외국어대불어과 4년)이 돌아오던 날, 그녀의 어머니 金

正恩씨(53)가 불안과 실의를 가까스로 견디어 내며 쓴 일기 내용이다. 그로부터 8O여일이 지나 한여름의 폭염같던 ‘뉴스의 태풍권’에서 벗어났지만, 감옥안에 딸을 둔 어머니로서 살얼음판을 내딛는 심정으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막내딸을 만나러 서울대학병원 대신 서울구치소를 찾아가는 점과 몇분간의 면회를 통해서나마 딸의 신색을 살필 수 있는 점이 다르다고 할까.

 

“그애가 죽었으면 나도 죽었을 겁니다”

 “우리 수경이가 北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고 뭔가 집채만한 덩어리가 눈앞을 덮치는 것 같았어요. 어리니 어린 것이 평양이 어디라고….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고

애간장에 녹아내리는 날들이었지요.”

 金씨는 그날의 충격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란 표현으로 대신했다. 全大協의 대표로서 딸아이가 짊어지고 갔던 ‘통일과 민족에 대한 열정’은 이해해 볼 겨를조차 없었다고 한다. 평범한 중산층의 가정을 꾸려가며, 오직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가르치는 것을 의심할 바 없는 자기몫의 생으르 여기고 살아온 金씨로서는 ‘하늘의 달’처럼 높아 보이는 그런 문제에 딸아이가 목숨을 건 행동을 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온 여대생은 틀림없는 자신의 딸이었고, 흐린 영상으로 나타나는 딸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은 ‘그애가 그곳에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위안이자 또 두려움이기도 했다.

 혹시 저 애가 북쪽 사람들의 꾀임에 빠져그들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자 않을까. 저쪽 사람들은 과연 우리 수경이를 무사히 보내줄 것인가. 어떤 경로로 돌아오며, 돌아오면 또 어찌 될 것인가.

 끝없는 불안과 의문의 늪에 빠져들었지만, 사태의 眞相에 접근해볼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특히 7월 27일 딸이 文奎鉉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하여 귀환하려다 좌절, 斷食에 들어갔다는 뉴스를 듣자 땅밑이 한꺼번에 꺼져버리는 것같았다.  단식을 며칠 계속하다가 탈진되어 실신했다는 방송을 들을 때는 이제 딸을 영영 잃어 버리는구나 싶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수경이가 죽었으면 나도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겁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자식을 잃고 견딜 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도 그렇지요. 면회 가서 수경이를 만나면 절대로 나약한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그 애와 떨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굳어져 감옥문을 뒤돌아 보곤 하지요. 얼마전에 수경이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엄마도 마음을 강하게 가지세요. 엄마가 왔다가면 내 마음도 싱숭생숭해요’라고 썼더군요. 제딴에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남자들처럼 군대에 가 있는 셈치라’고 말하지만 어디 그렇게 마음이 달라지겠어요.

 “金씨의 말을 빌면, 수경양은 어릴 적부터 ‘유난스레 귀엽고 정이 가는 아이’였다고 한다. “언니의 옷을 물려입혀도 투정 한번 없고 어려운 심부름을 시킬 때도 군말없이 듣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화장실에 가느라 새벽 서너시에 일어나보면 그때까지 제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딸을 보고 놀란 적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문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수경양은 대학 2학년 때인 1987년말에 단편소설 <잃어버린 영혼>을 써 외대문학상에 응모, 佳作에 뽑히기도 했다. 막연하게나마 김씨는 수경이가 장차 신문기자나 작가가 될 거라는 기대를 품어왔다. 林양의 소설 <잃어버린 영혼>은 운동권 대학생인 형과 전투경찰인 동생이 시위현장에서 만나 형제간에 애증의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대학생인 형은 학생시위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는 동생을 이렇게 설득한다.

 “이 땅에서 자라고 이 땅에서 교육받은 우리가, 우리의 분단된 조국 한반도를 사랑하는 우리가 용공 · 좌경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 말마따나 대학생들은 선택받은 환경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더욱더 사회진보를 위해 앞장서야 해. 선택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고 침묵을 당연시해야 한다는 건 엄청난 오해야.”

 

林양. 김일성독재 · 권력세습 비판도

 기법상 미숙한 점은 있지만, 이 소설은 적어도 대학생 임수경의 의식을 엿보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운동권 학생을 좌경 · 용공세력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 대학생이면 마땅히 현실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사회진보’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가 표현한 ‘사회진보’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런 삶이 가능한 틀은 어떤 사회라고 생각했는지는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林양이 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을 격렬히 비난, 대다수 국민들의 비난을 샀지만 반대로 金日成에 의한 독재정치와 金正日의 권력세습 문제 등에 대해서는 북한을 거침없이 비판해 북한의 지도층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外紙의 보도나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김일성뱃지나 인공깃발을 거절했다”는 그녀의 진술 등을 고려하면, 임양을 북한의 대남전략에 동조, 추종한 학생으로 본 수사기관의 시각에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치지도자와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우리 수경이가 실정법을 어긴 부분은 인정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법을 어긴데 대해서 마땅히 처벌받아야겠지요. 그렇지만 검찰의 기소내용을 보면 우리 수경이가 완전히 빨갱이로 몰려 있어요. 국가보안법상의 지령수수 · 잠입탈출 · 회합통신 · 금품수수 · 찬양 고무 동조 · 이적단체 가입 · 자진지원 군사상의 이익공여 등 엄청난 죄목들이 연줄연줄 걸려 있는데, 수경이는 절대로 그런 애가 아닙니다. 그애의 행동을 한 젊은 대학생의 열정,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젊은이의 열정으로 보아주면 안되나요? 사자굴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참으로 당당하게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치면서 민족애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김씨는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이 수경이를 사랑과 관용의 시선으르 보아주길 간구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가족들은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비난의 시선과 정체불명의 전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가자가 취재하고 있는 동안에도 익명의 전화가 걸려와 갖은 욕설과 악담을 퍼부어댔다. 언제나 ‘똑같은 목소리’의 그 송화자는 이름을 숨긴 채 막무가내로 협박을 하고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11월 6일이 수경이 생일입니다. 이제야 만 21살이 된 애니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모든 자식 기르는 부모님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지도자와 사법부에 간절히 호소하고 싶습니다. 우리 딸이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추위에 떨면서 잠을 설칠 감옥의 딸에게 넣어 주려고 김씨는 요즘 굵은 털실로 바지를 뜨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데, 채 한뼘을 뜨기도 전에 막내의 얼굴이 눈앞을 가린다고 한다. 딸의 入北 이후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金씨의 마음속에는 더 진하고 뜨거운 母情이 샘솟고 있는 듯했다.

 

林양 入北에서 귀환까지

-6.21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

-6.30 동베를린발 소련항공편으로 평양 순안공항 도착. 고려호텔서 첫 내외신 기자회견.

-7.1 능라도 경기장의 축전 개막식 참석. ‘전대협’ 깃발따라 단신 입장.

-7.2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구경 및 환영 리셉션 참석.

-7.3 평양 인민문화궁전서 전대협의 호소문 낭독 후 2번째 기자회견.

-7.7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공동으로 ‘남북청년학생공동선언문’ 8개항       발표.

-7.8 평양축전 폐막.

-7.10 金亨稷 사범 대학 방문을 시발로 13일까지 북한 대학 순방.

-7.14 2박 3일간 금강산 관광.

-7.17 동명왕릉 관광. 북한 예술촬영소 방문.

-7.19 평양 인민문화궁전서 ‘국제평화대행진 준비위원회’ 참석

-7.20 5백여 북한 학생 및 외국인과 백두산 三池淵에서 대행진 발대식.

-7.23 행진대와 함께 평양 도착.

-7.25 행진대 개성 도착.

-7.26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林양 동행 위해 文奎鉉 신부 북한 파견.

-7.27 文신부와 함께 판문점 도착. 두차례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시도했으나 실패. 북측 통        일각에서 단식 농성 돌입.

-7.30 단식농성 4일째. 기자회견을 갖고 전대협과 국민에서 보내는 ‘호소문’ 및 세계 각        국의 국회, 정부, 정당에 보내는 ‘편지’ 발표. 판문점을 통한 안전귀환 호소.

-8.1 북한 방송. 6일간의 단식농성 중단 발표. 임양은 기자회견서 8월15일 판문점 귀환 재       시도 발표. 文신부 현 정부비판 연설장면이 국내 TV에 방영.

-8.2 평양 외국인병원 입원.

-8.12 혁명열사릉에 헌화하고 인민문화궁전에서 내외신 기자회견.

-8.13 장충성당 미사에 참석. 평양시 학생들 주최 환송회 참석.

-8.14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평양군중 집회 참석. 개성 도착.

-8.15 文신부와 함께 판문점 통과 귀환. 서울대 병원에 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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