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겁낸 검은돈, 해외로 뺑소니
  • 장영희 기자 ()
  • 승인 2006.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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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손들 미국 등지에 부동산투자··· 기업들은 수출입가격 조작으로 거액 유출

 내년에 실시될 금융실명제를 앞두고 부동자금들이 은신처를 찾아 떠돌고 있다. 이들 노출을 꺼리는 떳떳치 못한 돈들은 실명제 실시로 얼굴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자금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검은돈의 피신방법으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해외도피이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8조국이 됨에 따라 경상거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여서 조금만 머리를 쓰면 얼마든지 국외로 돈을 싸들고 나갈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돈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그야말로 ‘떳떳한 ’ 돈으로 감쪽같이 둔갑시킬 수 있어 전주들은 마음까지 편해진다.

지난해부터 전면 자유화된 해외여행을 이용, 해외여행 경비지출과 해외송금 등의 방식으로 나가는 돈도 크게 늘고 있다. 부동산투기, 사채놀이, 마약밀매, 뇌물수수 등 ‘지하’에서 벌어들인 돈의 전주들이 정체가 드러날 것에 대비, 금고를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증권 趙龍伯종로지점장은 “부동산은 토지공개념 발동이다 해서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이는 데다, 증시가 계속 침체상을 보여 투자수익률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고객들은 주식을 팔아 해외로 이전할 궁리를 하고 있다. 지난 13일 하루동안에 우리 지점에서만 4조원의 뭉칫돈이 증시를 빠져나갔다. 이미 해외를 다녀온 고객들은 교포들로부터 상당량의 국내자금이 미국 등 해외로 나가 부동산을 사거나 투자수익률이 높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더라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고 큰손들의 동태를 전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의 무역외수지 동향에 따르면 지나해 증여형식으로 국내를 빠져나간 돈은 11억4천만달러에 달했다. 이는 88년에 비해 2.3배가 늘어난 것이며 86년에 비해서는 10배 가까이나 증가한 규모다. 이 가운데 개인이 국외로 송금한 돈은 지난해 7억9천만 달러인 것으로 집계됐다. 물론 이 돈들을 모두 검은돈이라고 몰아붙이기는 어렵고 학비등 실수요에 의해 이루어진 자금이전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상당액의 돈이 떳떳치 못한 돈일 것이라고 일선 창구직원들은 보고 있다. 또 이 금액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잡힌 것에 불과하며 한국은행 관계자들은 족히 그 2∼3배에 달하는 국내자금이 해외로 달아나고 있는 것으로 진단한다.

 

원화 자기앞수표도 인기품목

지난해부터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급격히 많아지자 금융당국은 해외송금자의 송금창구를 1개 은행으로 제한하는 주거래은행제도를 도입하고 누적송금액이 연 3만달러를 넘기면 국세청에 통보, 자금출처를 조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송금으로 빠져나가는 돈의 행진을 규제하겠다는 의도이지만 이 방안도 거의 실효를 나타내고 있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행 첫달인 지난해 12월 단 1명만이 한도초과로 국세청의 통보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이 경우는 뭘 몰라 걸려든 사례라는 것이 금융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은행창구를 통한 송금방법은 가장 기본적인 수법으로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보다도 원화표시 자기앞수표를 아예 여행용 가방에 넣고 버젓이 세관을 통과, 돈을 빼내가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특히 재벌 총수나 정치권 고위층 인사의 경우는 거의 검색조차 없어 더욱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1월 ㅅ그룹의 ㅇ회장은 수행비서관을 데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세관을 통과하다가 거액을 소지한 사실이 적발돼 문제가 됐다. 미화 1만달러, 1천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7장, 1백만원짜리 자기앞수표 40장 등 30만달러 상당을 VIP룸을 통해 가지고 나가다가 검색원에 의해 걸려든 것이다. 수사당국은 ㅇ회장이 자본을 도피시키기 위해 밀반출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냈지만 이처럼 원화 자기앞수표는 해외로 가져나가기가 쉽게 되어 있다. 관세청의 林玉均심리담당관은 “현재 X-선 탐지기와 문형금속탐지기 등을 이용, 검색을 강화하고는 있지만 원화표시 자기앞수표는 잘 적발되지 않는 실정이며 그렇다고 모든 여객의 가방 속을 무차별로 뒤질 수도 없지 않느냐 ”며 정밀개장조사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은 사실상 경제에 우려를 줄만큼 금액이 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업들의 수출입가격 조작이 외화도피수법으로는 한단계 높은 수법이라는 것이 외환전문가들의 평가다. 기업들은 외국 거래처와의 복잡한 장부조작과 거래 상대방과의 철저한 담합으로 외화를 유출시키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하다. 고가품을 저가품으로 위장해 수출한 뒤 수출액의 차액을 현지에 떨어뜨려 놓거나, 반대로 저가품을 고가품인 것처럼 속여 수입해 실제로 지불해야 할 금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송금해 돈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기업들이 외국에서 받은 커미션이나 리베이트 등 갖가지 항목의 수입을 국내에 들여오지 않고 현지에 남겨두고 오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자회사가 현지생산에 소요되는 금액을 실제가격보다 높게 매겨 차익을 남기는 방법도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일반화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기업인들은 이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해외에 자금을 도피시키고 이 자금으로 현지 부동산을 사거나 비자금으로 쓰기 위해 현지 금융기관에 비실명으로 예금하고 있다고 대기업의 한 경리책임자는 털어놓았다.  

 

실명제 빨리 확정해 과민반응 가라앉혀야

부동자금들의 국외 도피 행진이 심상치 않자 금융당국은 방지책에 몰두하고 있으며 ‘국부유출 ’이란 차원에서 우려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거래가 규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설혹 자본유출의 성격이 강하지만 경상거래 경로를 빌린 유출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금융경제실 左承喜 박사는 “자본거래가 규제되어 있는 상태에서 경제에 주름살을 줄 정도의 과도한 자금유출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실명제 실시 방침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검은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는 이를 촉발시킨 실명제의 확정안을 빠른 시일내에 발표, 이들 부동자금들의 불필요하고 과도한 우려를 줄여 줄 필요가 있다. 금융실명제는 제도로서 정착을 더 중시해야지 지하경제 자금에 대해 벌칙을 가하는 것으로 우선적용해서는 안될 것 ”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은행 李昌圭이사는 “다시 규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돈의 물줄기를 국내에 잡아두려면 투자수익률을 높이는 여러 경로를 마련해주는 유인책이 시급하다. 이렇게 물꼬를 터줄 때 불안을 느껴 해외로 나갔던 돈들도 자본자유화와 증시회복으로 투자수익률이 기대되면 국내로 다시 유입될 것 ”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돈은 꼬리표가 달려 있지 않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와 어디로 이동하는지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정확히는 자금이동자만이 알고 있다. 또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움직이고 불안한 상태면 안전지대로 옮겨가려는 자본의 속성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최근의 금융실명제 실시를 우려해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돈의 급격한 해외탈출 현상은 어쩌면 불가피한지도 모른다. 左박사의 지적처럼 우선 금융실명제로 인한 과도한 불안심리를 제거해야 하며 이렇게 되면 해외유출 러시는 상당폭 꺾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경제안정기조를 회복해 투자유인책을 다각도로 마련해 주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금융실명제가 가진자들의 압력에 밀려 계속 우물쭈물할 경우 검은돈의 해외유출 등 부작용만 더 커질 것이며, ‘속빈 강정 ’이 된 채 실시될 경우 불로?자산소득을 양성화하고 과세공평을 기한다는 본래 취지도 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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