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위기관리 시스템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6.05.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직후 국가 수뇌부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국방장관은 종적이 묘연했고, 그 사이 군부 세력은 역모를 꾀했다. 1979년,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던 순간이었다.

고약한 가정이지만,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어디로 가야 할까? 야당 대표가 어이 없이 피습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다. 정답은 ‘청와대 벙커’다. 청와대 면회실을 통과해 조금만 가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위기관리센터가 입주한 지하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과 그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종합상황실이 마련되어 있다. 상황실에 설치된 커다란 상황판을 통해 한반도 전역에 배치된 아군·적군 부대의 현황과 이동 경로, 한반도 상공에 떠 있는 각종 비행기의 종류와 속도, 한반도 주변 해상을 항해하는 군함·여객선·어선 따위의 속도와 경로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된다. 영광 원자력 발전소 같은 핵심 기반 시설의 정상적인 가동 여부, 전국의 산불 발생 현황도 클릭 한 번으로 속속들이 알 수 있다. 영화 <에어포스 원>이나 <인디펜던스 데이>에서처럼 국가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도부가 모여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인 셈이다. 상황실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하면 대통령이 직접 조종사나 함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김대중 정부 때까지만 해도 이런 종합상황실이 없었다. 1, 2차 서해 교전 같은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대통령은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서야 간접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NSC 사무차장 겸 위기관리센터장을 맡고 있는 류희인 위기관리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던 2003년 1월 인터넷 대란이 발생했고, 한 달 뒤에는 대구 지하철 참사가 터졌다. 이를 수습하며 출범한 참여정부는 핵이나 전쟁 같은 군사적 위협뿐 아니라 테러나 각종 재난 같은 비군사적 위협으로까지 위기 영역을 넓혀 대처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가장 먼저 탄생한 것이 종합상황실이다”라고 설명했다.

2003년 6월 종합상황실이 가동된 후 후속 조처도 잇달았다. 종합상황실 옆방에 가면 <북핵 사태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 <북핵 사태 국방부 실무 매뉴얼> 같은 다양한 위기관리 지침서가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다. 표준 매뉴얼은 국가 위기 영역을 전통적 안보와 재난, 국가 핵심 기반 세 분야로 나눈 뒤, 전통적 안보 분야 12개, 재난 분야 11개, 국가핵심기반 분야 9개 등 모두 32개로 위기 상황을 추려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적시했다. 실무 매뉴얼은 32개 위기 유형마다 관련 부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당 부처의 대응 방안을 적어 놓은 지침서다. 32개 위기 상황마다 관련 부처가 평균 10여 개에 달해 실무 매뉴얼은 2백72권이나 된다.

예를 들어 <풍수해 재난 I>이라고 적힌 지침서를 보면, 태풍이 발생했을 때 관심(Blue)→주의(Yellow)→경계(Orange)→심각(Red)이라는 네 단계 위기 수준별로 관련 부처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행정자치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운영하고, 국무조정실은 필요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건의하고, 교육인적자원부는 학교 시설을 이용한 이재민 장기 수용을 협조하고, 국방부와 경찰은 피해 복구와 치안을 담당하고, 농림부는 피해 농작물 응급 복구와 농·축산물 수급안정 대책을 마련하고, 환경부는 쓰레기 처리와 비상급수 대책을 시행하고… 하는 식이다. 실무 매뉴얼에는 대국민 담화문이나 부처별 보도 자료까지도 예시되어 있다. 과거에는 주요 사태가 발생한 후 부처별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례가 왕왕 빚어졌지만, 이제는 빠져 나갈 구멍이 없어진 것이다.

32개의 위기 상황 중에는 ‘대통령 권한 공백’도 있다. 대통령 유고 사태를 가정한 표준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담당 비서관을 흘끗 쳐다본 후 결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얼마 후 탄핵 사태가 벌어졌다. 류희인 위기관리비서관은 “그때는 매뉴얼이 채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래도 기본 골격은 잡혀 있던 상태라 고건 총리부터 매뉴얼에 따라 움직였고, 혼란 상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24일 인천국제공항에서는 항공기 사고를 가정한 위기 대응 통합 연습이 있었다. 매뉴얼에 적시된 내용이 실제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한지를 점검하고, 부처별로 손발을 맞추어보자는 것이 통합 연습의 취지였다. 건설교통부가 주관이 되어 항공안전본부·서울지방항공청·인천국제공항공사 등이 총출동했고, 비행기 화재 진압, 사상자 응급 처치와 수송, 폭발물 점검 등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정상호 항공안전본부장은 “예전에도 가상 훈련은 했지만 개별적이었다. 통합 훈련을 하면 상황이 닥쳤을 때 부처 간에 훨씬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훈련장에는 외교통상부 담당자도 참석했다. 이번에는 국내 항공기 사고를 가정한 것이라 외교부의 역할이 미미하지만, 외국에서 항공기 사고가 터지면 외교부가 바빠지기 때문이다. 외국에서의 항공기 사고를 가정한 통합 훈련은 조만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릴 예정이다.

 
2004년 동남아시아 쓰나미 때나 2005년 미국의 카트리나 재난 때, 2005년 2월과 12월 영·호남 폭설 때, 그리고 얼마 전 독도를 둘러싸고 한·일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정부는 위기관리 매뉴얼 덕을 톡톡히 보았다. 카트리나 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구호팀이 현장에 도착해 찬사를 받았고, 2005년 2월 영남 지역에 100년 만에 폭설이 내렸을 때도 큰 문제 없이 수습되었다. 매뉴얼이 만들어지기 전인 2004년 3월 폭설 때 1만 대가 넘는 차가 최장 37시간이나 고속도로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중국 외교관리가 청와대를 방문해 위기관리 시스템을 배워 가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한층 진화해서 엄습할지 모를 일이다.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대통령이 청와대 벙커를 찾고, 정부 관리들이 위기관리 매뉴얼을 꺼내 봐야 하는 위기 상황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