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농간에 울고 웃는 세상
  • 표정훈 (출판 평론가) ()
  • 승인 2006.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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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책] <도박>/역사·사회학·철학까지 두루 다뤄

 
얼마 전 단골로 이용하던 동네 PC방이 성인 게임장으로 신장 개업했다. 필자가 사는 서울 근교의 읍 단위 지역에만 대략 예닐곱 곳이 성업 중이다. 성인 게임장을 자주 간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든 것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인 세상에서 그나마 성인 게임은 우연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단다. 영국의 사회학자 거다 리스의 <도박>(김영선 옮김·꿈엔들 펴냄)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우연은 절대적인 민주주의이며, 기술의 효능을 무력화하고 개인적 자질과 노력, 교육에 기초한 모든 차이를 무효로 만든다. 러시아 작가 고골리는 말했다. “게임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카드 앞에서 평등하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고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주의할 점. 적어도 성인 게임장에서의 우연이란 게임 기계를 제작한 사람과 게임장 업주의 의도에 따른 제한된 우연이다.

도박을 죄악·낭비·범죄·병리 현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유는 시대마다 달랐다. 서양에서 도박을 죄악시하는 것은 종교 개혁과 근대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도박은 신의 선택을 제비뽑기 결정으로 전락시키고, 부의 창출을 노동의 대가와 분리시켜 우연의 농간에 맡기는 짓이라는 비판이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도박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비판했다. 

보험도 일종의 도박?

19세기 이후 산업화된 서구에서는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고, 도박은 노동력과 시간과 돈을 모두 낭비하는 짓으로 비판받았다. 오늘날에는 도박이 주로 병리적 차원에서 문제시된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에서 도박 풍속이 절정을 이루었던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에, 도박이 귀족들의 과시 소비였다는 점이다. 부르주아가 개인적인 부에 가치를 둔 반면, 구 귀족들은 땅과 혈통과 명예, 세습에 가치를 두었다. 구 귀족들은 도박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과시하려 했다. 

 
도박의 가장 큰 특성으로 반복과 권태를 든 것에도 수긍이 간다. 게임은 금방 끝나기 때문에 반드시 반복되어야 한다. 도박자는 기대감과 긴장감을 경험하기 위해 게임을 하지만, 게임은 거의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한다. 한판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지나고 나면 허탈감이 찾아든다. 도박장을 나온 도박자는 실제 세상이 자기가 방금 떠나 온 세계에 비해 너무 심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도박은 권태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본래의 지루한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현대 사회의 일상이 뜻밖에 도박과 가깝다는 사실은 우울하다. 안정성과 고정성이 사라지고 불확실성·가변성·이동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축을 하거나 보험을 든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위험과 불확실성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본질이 우연과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험회사들은 우리의 고민인 재난이 결코 발생하지 않거나 굉장히 적은 확률로 일어날 것이라는 소신으로 일종의 내기를 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도박이라 부르지 않고 보험이라 부른다. 이만하면 이 책은 도박의 역사, 도박의 사회학, 나아가 도박의 철학까지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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