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고 선수들, 돈 밝힐 만했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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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독재 정권, FIFA 배당금 ‘꿀꺽’ 가능성…‘내 몫 챙기기’ 당연

 
6월13일 오후 10시(한국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 발트 슈타디온 월드컵 경기장은 마치 서울 상암 축구장을 방불케 했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경기장을 붉게 물들인 가운데 노란 옷을입은 토고 응원단은 군데군데 박혀 있을 뿐이었다. 눈썰미 좋은 시청자라면 토고 응원단이 내건 응원 플래카드 가운데 ‘프리 토고(FREE TOGO)'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리 토고’는 군사독재 정부에 맞서 외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망명 토고인들의 구호다.

스포츠 시합에 웬 정치 구호를 내거냐며 불쾌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때때로 축구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이날 토고는 1-2로 한국에 졌다. 토고가 패배한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정치 문제였다.

토고 축구 대표팀은 시합 전날까지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오토 피스터 감독은 10일 돌연 감독직을 사퇴한다며 대표팀을 떠났다가 13일 경기장에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토고 선수들은 출전 수당 문제를 놓고 토고 축구협회와 신경전을 벌였고, 훈련을 거부하며 파업을 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출전 수당으로 1인당 15만5천 유로(약 1억8천7백만원), 승리 수당으로 3만 유로(질 경우 1만5천유로)를 달라고 요구했다.

애국심으로 무장된 한국인의 시각으로는 토고 대표팀의 내분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록 나싱베 토고 축구협회(TFT) 회장은 “월드컵이 선수들의 간을 키워놨다”라며 대표팀을 비난했고 토고 정부는 홈페이지에서 “선수인지 은행원인지 알 수가 없다”라며  악평했다. 많은 국내 팬들도 토고 선수들을 조롱했다. 토고는 1인당 국민소득이 약 1천5백 달러인 최빈국이다.

애국심보다 돈을 더 밝히는 현상은 토고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토고는 40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고 종교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으로는 왜 이적료로만 7백만 파운드(약 1백23억원) 몸값을 받는 아데바요르 선수가 출전 포기를 운운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간 토고 대표팀을 맡았다가 물러났던 외국인 감독들과 선수들이  협회를 탓하는 이유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토고 축구협회는 정말 돈이 없는 것일까. 월드컵에 출전한 32개국 축구협회는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출전보조금 100만 스위스프랑(약 7억75백만원)을 받았다. 여기에 조별 리그 한 시합당 2백만 스위스프랑씩 모두 6백만 스위스프랑(약 46억5천만원)을 배당금으로 받게 된다. 국제축구연맹 배당금만으로도 선수 23명 수당을 주고도 남는다.

물론 어려운 나라 경제 여건상 국제축구연맹 배당금을 모두 선수들에게 줄 수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돈을 관리하는 토고 축구협회가 국민이나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토고 축구협회가 부패로 얼룩져 있다는 점이다.
토고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기사를 쓰고 있는 언론 <포럼 주간>(Forum De La Semaine)은 2006년 1월12일자에 토고  축구협회 재무담당자인 티노 아드제테가 록 나싱베 회장에게 쓴 공개 편지를 실었다. 이 투고 형식의 편지에서 재무담당자는 나싱베 회장의 전횡을 고발했다. 그가 협회 수입을 착복하고 유용했다며,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토로한 것이다. “당신은 축구협회의 규정을 어겼습니다. 우리는 전세계 앞에 신뢰를 지켜 보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드립니다”

 
토고 축구협회의 부패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올해 1월19일 토고 현지발 르포를 통해 배부른 축구협회와 가난한 토고 축구인의 현실을 대조해 보였다. 토고 축구협회는 매년 25만달러(약 2억4천만원)를 국제축구연맹에서 최빈국 축구 보조금 명목으로 받고 있다. 또 한 스포츠 마케팅 회사로부터 협회 로고 등을 쓰게 허락하는 명목으로 2년간 32억원의 수입을 챙겼다. 하지만 토고의 14개 축구 클럽 가운데 이 돈을 만져본 사람은 없다. 토고 국영 방송사는 매주 두 경기씩 축구 중계를 하지만 이 수익 역시 축구인들의 몫이 아니다(나싱베 형제는 방송사도 소유하고 있다). 토고의 최고 클럽 팀이라는 에토와 필란테 팀이 한 달에 선수들에게 주는 월급은 10만원 정도다. 이 클럽 팀은 원래 축구협회로부터 매년 1천만원가량을 지원받았지만 나싱베가 축구협회 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이것마저 끊겼다.

독재자의 동생이 축구협회장

토고 축구인들은 도대체 협회 돈이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의아해한다. <포럼>에 용기 있게 투고를 한 아드제테 재무담당자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대표팀 운영 경비를 위해 4백만원 지원을 요청했으나 회장이 100만원으로 삭감했다고 주장했다.
협회 비리에 염증을 느낀 선수들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대회를 앞두고 1인당 출전수당과 승리수당으로 각각 2천만CFA(약4천만원), 1천만원을 요구했다. 나싱베 회장은 이런 요구를 묵살했고 그 결과는 네이션스컵 참패로 나타났다.

용감한 내부 고발자가 나싱베 축구협회장의 비리를 폭로했음에도 그를 기소하거나 협회 장부를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은 토고에 없는 듯하다. 그의 형이 바로 파우레 나싱베 현 토고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독재 정부는 흔한 일이지만 토고처럼 오랫동안 대를 이어 장기 집권하는 경우는 드물다. 1967년 쿠데타로 집권한 에야데마 나싱베 장군은 38년간 철권 통치를 해왔다. 인권단체 엠네스티에 따르면 1998년 에야데마 전 대통령 재선 때 수백명의 반대파 지지자가 죽었다.

2005년 2월 에야데마 장군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자 아들 파우레 나싱베가 아버지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토고 헌법을 무시한 쿠데타에 가까운 권력 승계로 국제 사회의 비난과 압력이 이어지자 파우레 나싱베 대통령은 2005년 4월 형식적인 대선을 치렀고 결국 당선되었다. 야당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했고 유럽연합은 토고에 대한 원조를 거부했다.

 
국제연합(UN) 보고서에 따르면 이 선거 기간에 4백~5백명이 죽었으며 수천명이 부상했고 3만명이 이웃 가나와 베냉으로 떠나 난민이 되었다. 더 타임스는 ‘이런 정권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축구 선수들에게 애국심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일이다’라고 보도했다.

물론 토고 축구협회와 승강이를 벌인 토고  선수들이 민주화 투사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정치적 요구를 내건 적은 없고, 무엇보다 돈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토고 축구협회가 도덕적으로 선수들을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국제축구연맹 배당금이 독재 정권 비자금으로 쓰이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선수들은 자기 몫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6월13일 토고 선수들은 독재 정권이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의 희망을 위해 경기장에 나왔을 것이다. 이날 주최측은 토고 국가 대신 한국 국가를 또 내보내는 촌극을 벌였다. 토고 선수들은 모욕을 참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 울려 퍼지는 국가를 따라 불렀다.  토고 국가 가사는 해방 투쟁을 노래하고 있다. “압제자(tyrans)들이 쳐들어 올 때~, 너의 심장은 자유를 향해 뛴다~. 토고여 일어나라! 실패하지 말고 싸워라.” 어쩌면 그날 토고 선수들이 싸운 대상은 한국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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