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민단 와해 공 작 펼쳤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6.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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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이 조총련과의 56년 대립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5·17 화해 선언을 하자 일본 정부와 우익은 ‘민단 고사 작전’을 벌였다.

 
“민단은 일본에서 나가라” “독도는 일본땅”. 6월24일 정오, 일본 도쿄 시 중심부에 있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본부 건물 앞에 정차한 가두 방송 차량에서는 30여분 동안 요란한 구호가 흘러나왔다. 일본 극우단체 회원들의 실력 행사였다. 마침 민단 중앙본부에서 임시중앙위원회를 개최하는 날이라서 일본 각지에서 170여명의 중앙위원들이 속속 8층 강당으로 집결하던 중이었다.

민단 중앙본부 건물 앞에서 벌어지는 일본 우익의 시위와 가두방송은 지난 5월17일 이후 사흘이 멀다하고 반복되는 일과가 됐다. 민단 하병옥 단장이 그날 전격적으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조총련) 본부 건물을 방문해 서만술 조총련 의장과 함께 이른바 ‘5.17 선언’으로 불리는 6개항의 화해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나타난 일본 우익의 신경질적인 반응이다. 이날 중앙위원회의는 민단-조총련 화해 선언 이후 일본 우익의 총공세와 민단 내 보수파의 반발로 조직이 큰 혼란에 휩싸이자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린 행사였다.  

재적 199명의 중앙위원 중 171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1시에 개회된 회의에서 작심하고 달려든 민단 보수파들은 ‘하병옥 사퇴하라’ ‘공동성명 백지화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납북 김영남씨의 일본인 처였던 메구미씨가  1977년 납치된 장소인 일본 니이가타 현에서 왔다고 밝힌 한 중앙위원은 ‘민단에 친북세력이 침투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며 하단장 퇴진 바람잡기에 나섰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은 강경보수파의 돌출 행동을 지켜볼 뿐 큰 동요 없이 회의에 임했다. 하단장을 퇴진시키기 위한 중앙대회 소집 요구로 집약된 강경 보수파들의 주장은 집행부를 옹호하는 다수의 온건파 중앙위원들의 반대에 부딪쳐 관철되지 않았다.
민단이 조총련과의 56년 대립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5·17 화해 선언을 하자 일본

정부와 우익은 ‘민단 고사 작전’을 벌였다.

혼란의 중심에 선 하병옥 단장은 이날 “사실상 5.17 공동성명이 백지화됐다”고 발표하고, 그동안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추진한 조총련과의 화해 선언으로 내부 혼란을 끼친 데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런 사태를 몰고 온 책임을 물어 5명의 부단장을 경질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하단장은 “조총련과의 화해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며 앞으로 내부 공식 절차를 거쳐 천천히 추진해나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날 대회는 개혁 민단 구호를 내걸고 당선한 하병옥 단장 체제가 출범 4개월만에 사실상 백기를 드는 자리였다. 아울러 민단 개혁과 재일동포 사회의 화해를 마뜩찮게 본 민단 내 보수세력과 일본 우익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민단과 조총련이 60년 묵은 반목과 갈등을 딛고 화해의 시대를 열기로 한 5.17공동성명이 백지화되었다는 소식에 재일교포들은 대체로 심한 허탈감과 함께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5.17 선언이 발표된 직후 재일한인변호사협회 등 뜻있는 교포 단체는 저마다 지지성명을 냈다. 재일한인변호사협회 도쿄지역 이사로 있는 이우해 변호사는 “민단과 총련의 화해에 대해 재일교포 99%는 찬성했다. 이런 식으로 하병옥 단장의 개혁이 실패하면 민단은 곧 보수파들의 노인정으로 전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쿄 시내 신주쿠에서 한국음식점을 운영하는 이상기씨는 “기관대 기관 끼리 세계 만방에 알린 합의서인데 이렇게 깨뜨리면 민단의 신용은 이제 땅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챙피하다”라고 말했다.

국내 여론은 물론 세계 각국의 한인사회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민단-조총련 화해 선언이 잉크도 마르기 전에 물거품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민단내 수구 보수세력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본 정부를 포함한 일본 내 우익 세력들의 총공세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2월 ‘개혁 민단’을 구호로 당선된 하병옥 신임 단장은 민단의 수구 보수 틀을 과감히 깨고 젊고 개혁적인 민단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또 민족의 화해 화합이라는 시대 조류에 맞춰 조총련과도 적극 대화에 나서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따라 하단장은 신임 집행부 부단장 5명 가운데 2명을 과거에 민단 민주화를 내걸고 활동하다가 제명당한 적이 있는 한민통계 출신으로 채웠다. 

 
조총련과의 화해는 역대 민단 단장들이 늘 공약으로 내걸었기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 차이라면 이번에는 하단장이 빈말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먼저 실천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하병옥 단장은 5월17일 오전 간부 6명과 함께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조총련 중앙본부를 방문해 서만술 의장 등 조총련 지도부를 만나 1시간여 회담을 한 뒤 6개항의 합의문에 서명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개항은 양 단체의 화해 화합 도모 및 교포사회 단합을 위한 협력, 6.15 민족통일대축전 일본지역위원회 공동 참가, 8.15 기념 행사 공동개최, 교육 민족문화 진흥사업 공동 노력, 교포사회 복지와 권익옹호 활동 협력, 합의 이행을 위한 실무 창구 설치 등이었다. 이날 공동 성명이 발표되자 한국은 물론 전세계의 한인사회에서는 두 단체의 화해 화합에 첫삽을 떴다며 크게 반겼다.

그러나 두 단체의 역사적인 화해 선언을 무산시키기 위한 기도는 공동 성명을 낸 당일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들이 일제히 일본 공안기관의 분석을 인용해 딴죽을 걸어댄 것이다. 주로 ‘일본인 납치사건 해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라든지 ‘두 단체의 화해를 계기로 민단 자금이 조총련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라는 따위의 내용이었다.

이튿날부터는 일본 공안기관과 민단 내 수구 보수파의 소식통을 인용한 ‘음모론’이 일본 언론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주일한국대사관 개입설’ ‘5.17 선언 김정일 지시설’ ‘민단 조총련 밀약설’ ‘하병옥 단장의 숨은 조총련 경력’등 각종 흑색선전이었다. 주일 한국 대사관 개입설은 민단 단장 선거를 치르기 직전인 지난 2월 초 나종일 주일대사가 과거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폈던 한청계열 출신 민단지부장 17명을 공관으로 불러 식사 대접을 했다는 점에 근거했다. 당시 총영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부탁으로 구명운동을 도운 분들에게 식사나 대접하는 단순한 자리이다”라고 배경을 설명했지만 민단 보수파는 이를 본국정부의 선거 개입 음모라고 퍼뜨렸다.

민단 조총련 밀약설은 일본 공안기관에서 흘러나왔다.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민단이 조총련계 동포 모국방문 사업과 재일 탈북자 지원사업, 재일동포 참정권 확보 운동 등을 중지해주기로 조총련 측에 몰래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공안이 흘린 이런 가설은 전혀 근거없는 모략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일본 공안기관, 민단·조총련 밀약설 퍼뜨려

하병옥 단장에게 친북인사라는 색깔론을 덧씌우는 작업은 일본 언론의 몫이었다. <산케이신문>과 <주간 문춘>등에서는 일본 보수 논객들의 글을 통해 하단장이 과거 조총련계 대학 출신이라며 5.17선언에 대해 사상 시비를 걸고 넘어졌다. 그러나 확인 결과 1954년 도일한 하단장이 도쿄 법정대학생 시절 조총련계 조선학교에서 3년간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는 전력을 마치 ‘조총련에 포섭된 민단 단장’인 것처럼 과장해 공격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단장이 재일동포 사업가 출신으로 30여년 이상 보수적인 민단 중앙본부의 의장, 부단장 등 핵심 보직을 맡아왔다는 점에서 이제와 해묵은 색깔론 시비를 거는 일본 우익의 행태는 치졸한 흑색선전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재일동포 사회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교포 치고 과거 조총련계에서 운영하는 민족학교를 나오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지난 2월 단장선거에서 하단장의 민단 개혁 주장에 맞섰던 민단 보수파의 대표 정진 후보와 그를 추종하던 간부들 다수도 조총련계 조선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 언론들이 눈에 보이는 민단- 총련 화해 무산 공작에 나섰다면 일본 정부는 보이지 않지만 치밀하게 작전을 구사했다. 그 핵심은 일본 정부의 조직적인 민단 고사작전이었다. 취재 결과 이 작전은 위력적이었고, 그 결과 하단장은 두달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5.17 공동선언을 백지화하는 길을 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5.17 공동 선언 이후 일본 정부는 크게 세갈래로 민단을 압박했다. 우선 일본 국회에서 의원과 행정부측의 질의 답변 형식을 빌어 민단에 대해 앞으로 조총련과 같은 수준의 제재를 취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한 의원이 경찰청장을 상대로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테러 당시 제정한 ‘피괴방지법’ 적용 대상에 조총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번에 조총련과 손잡은 민단에 대해서도 같은 법을 적용할 의사가 없는가”라고 물었던 것. 이에 대해 경찰청장은 “그렇지 않아도 민단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이시하라 도쿄도 지사는 화해 선언 직후 민단 중앙 본부 건물과 부지에 대해 지금까지 세금 부과를 면제해오던 조치를 취소하겠다고 흘렸다. 일본인 납치를 저지른 북한의 대리격인 조총련과 화해하려는 민단에 대해 더 이상 도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도쿄 시내에 있는 민단 중앙본부는 땅은 민단 앞으로 되어 있고 영사관이 들어있는 건물은 대사관 용지로 간주해 지난 50여년간 세금을 면제 받았다. 

 도쿄만이 아니라 요코하마 시에서도 5.17 선언 이후 민단 지부가 소유한 건물과 부지에 대해 취해왔던 고정자산세 감면 조처를 취소하고 올해부터 270만엔(약 2천5백만원)의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통보해왔다고 한다. 일본 전역의 민단 지부 건물은 그동안 마을회관과 같은 공익시설로 분류돼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지만 일본 정부가 민단의 화해정책 이후 노골적으로 재정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세청·경찰청, 민단계 상공인 몰아붙여

일본 국세청과 경찰청은 보다 직접적이고 강도 높은 방법으로 5.17공동 선언 이후 민단계 상공인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민단 중앙본부 최정태 상공인회장은 “일본 금융권은 교포 상공인들에게 돈줄을 죄기 시작했고, 세무서와 공안에서는 교포 업소들에 노골적으로 감시를 강화해 다들 죽을 맛이다”라고 전했다(인터뷰 참조). 재일동포 상공인들은 주로 일본 공안기관의 직접 감독을 받는 업종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전국 1만6천여개 파친코 업소 중 70%가 한국계로 분류되는데 이 사업은 경찰과 세무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문을 닫게 할 수 있는 곳들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교포 상공인들은 5.17 선언이 일본 정부의 심기를 건드려 자기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며 하단장의 화해 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사실상 5,17 선언을 무산시키고자 한 일본 우익과 공안 세력의 총공세는 결국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5.17선언을 사실상 백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민단 내 각 정치세력의 역학관계 변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단장 선거에서 개혁파인 하병옥 후보에게 낙선한 보수파의 대표 정진 후보 진영에서는 이번 기회를 적극 활용해 개혁파를 몰아내고 단장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보수파들은 중앙위원회의 결정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하단장 퇴진 성명을 발표하며 물러서지 않을 기세이다.

민단은 창단 후 60년 동안 사실상 재일본 반공 전위대로서 본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지지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조직을 장악하고 대물림해왔다(부속기사 참조). 이 구도에 변화를 일으킨 사람이 바로 제16대 단장인 하병옥씨였다. 민단이 수구 보수의 반공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스스로 궤멸할 것이라는 시대적 위기의식기 높아가자 과거 보수주의자였던 원로 그룹 일부가 민단 개혁 기치를 내건 하단장을 지지로 돌아서면서 지난 2월 선거에서 그가 압도적으로 당선한 것이다.

민단 내에서는 신용상 상임고문, 문경서 고문, 정동화 고문 등이 그런 인물로 꼽힌다. 김영삼 정부 시절 민단 단장을 지냈고 보수파의 대부로 꼽히는 신용상 상임고문은 기자에게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기에 나는 모든 문제에 중립적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2월 민단 단장 선거에서 사실상 하병옥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는 내부 평가를 의식한 듯 “이번 사태가 민단에 위기일지 발전의 기회일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단 개혁과 재일동포 사회의 화해를 지지했던 이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일본 정부와 우익세력의 조직적 와해 책동에서 찾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하병옥 단장의 리더십 부재도 한몫을 했다고 지적한다. 민단 중앙본부의 한 간부는 “하단장의 변화와 개혁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반대파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넘어설 대비책도 없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사태를 그르쳤다”라고 말했다.

기존 민단 조직의 보수적 특성을 고려해 6개월에서 1년 정도 개혁적 조직 정비 작업과 화해 조치에 대한 설득 작업을 벌인 뒤 공식 절차를 거쳐 추진했더라면 현재와 같은 반대세력의 명분은 크게 약화됐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단장은 과거 유신정권 시절 민단 내부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제명당한 세력들에 대한 대사면과 화해 조처를 취하지 않은 채 서둘러 이들을 통해 조총련과의 6.15공동행사 등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조총련과의 협상은 민단 내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지지세력에게조차 비밀로 했다. 개혁파의 한 간부는 “5.17 공동선언을 한 당일에라도 확대간부회의나 지지자 모임을 열어 배경을 설명했더라면 내부에서 사태가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하단장 당선에 일등공신으로 분류되는 민단 상공인회와 부인회 등 최대 지지세력 조차도 하단장의 비밀스런 개혁 추진 방식에 불만을 품으면서 선거에 진 보수파들이 그 틈을 비집고 급격히 사태를 확대했던 것이다.

경위야 어떻든 조총련과의 56년 대립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화해 선언을 이끌어내면서 전세계 한민족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던 민단은 스스로 합의서를 뒤집음으로서 부끄러운 조직으로 전락했다.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하단장이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끝내는 민단이 양분되는 사태를 맞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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