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내부에서 ‘인간’을 발굴하다
  • 이문재 (시인) ()
  • 승인 2006.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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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가씨가 대중문화에서 희망을 발견하다니. 나에게 아가씨, 대중문화, 희망은 충돌하면 충돌했지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의미들이 아니었다. 아가씨라는 인식의 주체와 거리가 멀었다. 결혼 여부를 기준으로 한 익명적 호칭이었다. 게다가 아가씨는 총각이라는 말처럼 그 사용 빈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나에게는 신여성이나 모던 보이처럼 사전에만 존재하는 말처럼 보인다.

그런 아가씨가 대중문화의 숲을 산책하며 희망을 보았다. 그런 아가씨를 주어로 내세웠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대중문화나 희망이기 이전에 아가씨, 아가씨다. 아가씨의 이름은 정여울씨. 1973년생이다. 국문학 연구자이면서 문학평론가에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가 하면 출판 기획도 한다.

대학 다닐 때는 운동권이었고, 졸업한 뒤 논술도 가르친 바 있다. 한마디로 ‘유목적 삶’을 살고 있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소설가는 “학자로서 살기에는 타고난 끼가 몸을 들쑤시고, ‘딴따라’로 살기에는 이미 먹물이 많이 든 아가씨”라고 평한다.
아가씨에게 있어 대중문화란 곧 미디어였다. 정확하게는 미디어의 덫. 야생의 자연이 아니라 인공의 도시를 자연으로 알고 자라난 세대는, 새벽 닭 우는 소리나 밤하늘의 은하수보다 알람 시계나 <은하철도 999>가 친숙한 ‘미디어 키드’다. 브라운관을 통해 말과 삶과 세상을 배운 세대다. 아가씨가 보기에, 미디어는 현대인의 정서적 태반인 동시에 ‘정서적 마약’이었다. 그리하여 아가씨는 ‘가장 미디어적이고 대중적인 것에서 그 탈주적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미디어가 없어도 행복한 시간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아가씨가 가로지르는 대중문화의 숲은 다채롭다. 책과 텔레비전 드라마·영화·대중가요의 안팎을 어슬렁거리면서, 대중문화의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데, 이것을 말하기 위해 저것을 불러오는 비교 분석적 방법을 자주 동원한다. <다빈치 코드> <진주귀고리 소녀>와 같은 대중적 책, <안녕 프란체스카>와 같은 새로운 드라마, <범죄의 재구성> <홍반장> 같은 영화를 거쳐, 도심 뒤란에 숨어 있는 고택 수연산방에 이르기까지 그가 답사한 숲의 생태는 다양하다.

‘고백의 언어’로 진정성 확보

유목민(노마드)이 지불해야 할 정신적·사회적 고통은 외면하고, 무엇인가를 훌쩍 뛰어넘어 자유로운 이미지만 난무하는 대중적 노마드를 비판할 때, <다빈치 코드>에 내장되어 있는 천박한 탈장르적 기획 의도를 까발길 때, 아가씨는 예민한 감식력을 가진 지식인이다. 반면에 칸트를 읽거나 김훈을 읽을 때, 아가씨는 겸손하면서도 행복한 독자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가씨의 글(쓰기)이 진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심판자나 추종자의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다. 공간을 분석한 <래미안 아파트 vs 선유도>라는 짧은 글에서 드러나 있듯이, 그의 글(쓰기)은 고백의 언어일 때 힘을 갖는다. 글쓰기는 ‘기억하기’이거니와, 미디어의 융단폭격에 맞서는 주체는, 마포 만리재 골목길로 숨어들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가씨는 미디어의 내부에서 희망을 발굴하려 한다. “아무리 미디어가 가공된 상품일지라도 결국 ‘인간’의 상처와 무의식이 녹아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피와 숨결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처와 무의식을 탐사하는 아가씨의 무기는 관찰과 고백이다. 특히 자기 고백. 대중문화를 관찰한 책은 부지기수이지만, 대중문화를 관찰하며 글쓰는 자의 내면을 이렇게 자주, 그리고 솔직하게 진술한 책은 거의 없었다. 아가씨는 아직 사어(死語)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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