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권위가 살아나야 한다
  • 김상익 편집위원 ()
  • 승인 2006.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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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익의 교육일기]

 
아들이 이 글을 읽으면 무척 싫어할 터이지만, 칼럼 첫 회에서 나는 그 애의 담임 선생을 면담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그런데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성적이라는 담임의 말보다 더 끔찍한 내용은 따로 있었다. 아들 녀석이 수업 시간에 선생보다도 말을 더 많이 한단다.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서 친구들과 떠든다고도 했다. 

내가 아무리 게으르고 무관심한 학부모였다고 해도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다가 저녁 때 학원가서 공부한다는 기이한 풍속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최근에 딸 아이에게서 확인한 바로는 학원에서도 공부는 별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면 학원 선생한테 물어보라고 대답한다는 지독한 농담도 돌아다녔다. 심지어 학원에서 잠자는 학생에게 학원 선생이 하는 말, 넌 학교에서 뭐하다가 학원에 와 잠자니? 이런다나 어쩐다나. 

미국에 가서 개학한 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자녀들이 어떤 선생한테 어떻게 교육받는지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체험해 보라는 학교측의 공식 행사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아이들이 이동 수업을 받듯이 이 교실 저 교실 둘러보며 학과목 담당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민주당 지지자는 교실 벽에 존 F. 케네디의 대형 사진을 걸어놓고 자기의 정치 성향을 드러냈다(나는 학창 시절에 태극기와 박정희 사진밖에는 본 기억이 없다). 과학 선생의 교실은 각종 도구가 진열된 실험실이었다. 선생들은 자신감과 의욕으로 충만해 있었다. 학부모들은 선생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보냈다. 

수업 시간에 떠들면 가차 없이 추방

나중에 아이들한테 전해 들으니 수업 시간에 떠들면 가차 없이 추방당한단다. 교실에 늦게 들어가면 눈치가 보여 지각을 하느니 차라리 수업을 빼먹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정당한 사유 없이 수업에 빠지면 그날 오후 당장 집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남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범죄 행위’로 간주된다. 한 마디로 수업 시간에 선생의 강의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는 용서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너희들을 열심히 가르칠 책임이 있다. 나는 선생으로서 그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러니 내 강의를 선택한 너희들은 내 수업을 방해할 수 없다. 내 교실에서는 내 원칙을 따라야 한다.’ 

미국 사회가 가진 미덕 중의 하나는 법과 질서(Law and Order)에 대한 존중이며, 이는 학교 교실에서도 예외가 없다. 미국 고등학교 선생들이 자기 교실 안에서 행사하는 권위는 절대적이며, 그것은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의 권위에 ‘딴죽’을 걸지 않는다. 

4년 전 교실에서 선생보다 더 말을 많이 하던, 그러니까 수업 훼방꾼이었던 아들은 미국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그 나이에 무슨 특별한 깨달음이 있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학교 분위기가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하긴 아들이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기특한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모처럼 마음을 다잡고 수업 시간에 강의를 집중해서 들으니 공부가 제법 재미있어지더라는 것이다). 하여튼 골치깨나 썩이던 녀석이 완전히 ‘범생이’로 탈바꿈해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숙제부터 한다. 때로는 에세이를 쓰느라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희한하게도 그 좋아하던 게임도 끊었다).  

아들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당연히 미국의 선생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했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선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무질서가 지배하는 교실 분위기 속에서 허공에 대고 혼자 50분 동안 떠들다가 교단을 내려서는 선생들의 딱한 처지가 떠올랐다. 그런데도 선생을 무릎 꿇리는 학부모의 폭력은 또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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