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사일은 북.일 수교 노린 '다탄두 카드'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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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미사일을 쏘아 올린 배경에는 9월 이후 한반도 정세 변화를 염두에 둔 노림수가 있었다.

 
이제 북한 미사일 의혹 제2탄이다. <시사저널>은 지난 871호(2006년 6월23일자)에서 북한 미사일 소동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 5월 초부터 시작된 북한 미사일 소동이 때마침 미국 의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2007 회계연도(FY2007) 미사일방어(MD) 예산’ 통과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즉 북한 미사일 소동은 적대 진영 간의 ‘적대적 공생’의 한 신호탄이고, 급기야 7월5일(미국 시각 7월4일 독립기념일)을 북한이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미사일을 동시 다발로 발사함으로써 이 공생 관계가 정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같은 행태는 과연 무모한 것이었을까?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에 대한 기약 없이 자신의 목을 노리는 적의 창끝만 날카롭게 해준 것일까. 바로 이 점을 해명하는 게 ‘미사일 의혹 2탄’의 내용이다.

벼랑 끝 전술의 개량판?: 그 실마리는 7월5일의 발사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이날 마치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 4기와 중거리 노동 미사일 2기, 그리고 장거리 대포동 미사일 1기를 발사했다. 이 중 미국을 겨냥한 장거리 대포동 미사일은 그동안의 무력 시위가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종말을 보였다. 왜 그랬을까. 기술적 결함? 국가정보원의 정보와 군 당국의 기술적 전문성에 바탕한 분석의 결론은 대체로 이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베이징을 통해 확인된 북측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일종의 ‘계산된 실패’라는 것이다. 국내의 한 대북 소식통은 “발사 후 대포동의 추진력을 시험한 후, 40여 초 경과 시점에 의도적으로 항로를 변경했다”라는 북측의 설명을 전했다. 그렇다면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포동을 동원했지만, 대포동을 멋들어지게 성공시켰을 경우 야기될 미국의 지나친 ‘관심’은 사양한 셈이다.

따라서 발사의 실질적 의미는 일본 앞바다를 향해 날아간 노동 미사일과 스커드 미사일에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판매용. 앞의 대북 소식통은 “미국의 금융 제재 이후 북한은 돈 가뭄이 들었다. 목 돈 이 필요하고, 지금 평양에 이란의 구매 사절단이 와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북한 미사일을 ‘움직이는 광고탑’이라고 표현한 것이 이번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정치적 목적을 들라면, 바로 일본 열도에 대한  압박이다. 그것은 미사일 탄두의 지향 방향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다만 1998년에 비해 한층 세련된 방식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1998년과 달리 일본 열도를 넘기지 않고 그 앞바다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일본 열도에 공포와 충격을 줄지언정 복수심에 불타오르기 전 단계에서 자제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실질적 탄착 지점은 북의 동맹인 러시아의 연해주 앞바다, 즉 나홋카 근처이기 때문에 러시아 외에 다른 국가가 뭐라고 하기도 쉽지 않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가 북한에 대한 규탄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의 만류’를 듣지 않고 발사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점이 잘못인지 꼬집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내의 한 군사 전문가는  “고도의 심리전 전문가가 기획한 벼랑 끝 전술의 개량형”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왜 일본을 겨냥했을까: 북한 미사일 발사의 정치 군사적 효과가 주로 일본 압박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왜 갑자기 일본인가’라는 점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일본 앞바다를 겨냥한 북의 미사일 발사는 최근 북·일 간에 전개되어온 ‘미묘한 정세 변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최근 북한은 그동안 북·일 관계의 핵심 쟁점이었던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사망 문제를 둘러싸고,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성의 있는 자세를 보여왔다. 지난 6월29일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 메구미의 전 남편인 김영남을 보내 남측 기자들을 대상으로 직접 메구미 사망의 경위를 밝히도록 하는가 하면, 그 뒤 같은 주제로 일본의 다섯 개 언론사 기자들을 평양에 초청하는 등 그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데 바로 그 와중에 일본 열도 코앞으로 미사일을 날린 이유가 무엇일까.

요코다 메구미 사망 확인의 의미: 그 실마리는 바로 최근 북·일간에 전개되고 있는 요코다 메구미 사망 확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과정을 거쳐 추진된 것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이 김영남을 보내 요코다 메구미의 사망 경위를 밝히게 한 것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자리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 일본 여론이 계속 의문을 제기하자, 그렇다면 일본 기자들에게 직접 해명하겠다는 식으로 진행된 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면밀히 보면 이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미 남북 이산가족 상봉(6월29일)이 있기 3주 전에 북·일 양측이 접촉해 7월4일부터 8일까지 4박5일간 일본 기자의 평양 방문에 합의를 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금강산 및 평양 기자 회견의 수순 등 이 과정 전체가 북·일 양국에 의해 치밀하게 사전 기획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코다 메구미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렇게 양측이 치밀한 각본까지 짜가며 움직인 것일까.  북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북·일 관계 전반을 꽁꽁 묶어놓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 직후부터였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함과 동시에 대부분의 납치 피해자들이 이미 사망했다며 사과를 한 바 있다. 그의 이 발언을 계기로 일본 내에서는 납치 피해자 가족을 중심으로 북한의 사망 주장을 못 믿겠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났다.

납치 피해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북한과 그들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일본의 피해자 가족들이 벌이는 이 진실 게임의 상징적 인물로 등장한 게 바로 요코다 메구미라고 할 수 있다. 도쿄의 한반도 전문가는 “현재 납치 문제는 요코다 메구미의 생사 확인 문제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면서 “요코다 메구미가 사망했다는 북한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면 일본 여론도 북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이로써 납치 문제는 일단락됐다며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라고 지적했다. 이 얘기는 곧 북·일 수교 교섭의 가장 큰 걸림돌이 메구미의 사망 사실 확인 문제이고, 북이 이 문제에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그 다음 수순이 북·일 수교 교섭이라는 점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6월 초, 북·일 베이징 비밀 회동의 진실: 북·일 양국은 이미 양국 관계 정상화의 뇌관을 뽑아내는 작업에 이심전심으로 착수한 상태이다. 특히 7월4일부터 8일까지 4박5일간 진행된 일본 다섯 개 사의 언론인 평양 취재는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와 보조를 맞추는 일본 언론 관행으로 볼 때 일본 정부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해 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의 누가, 6월 초 북과의 비밀 접촉, 그리고 그 뒤 ‘북·일 수교의 뇌관’인 메구미 문제 제거 작업을 지휘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에서 발행되는 <주간현대> 7월1일자 기사는 이와 관련해 매우 놀라운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 기사는 시간적으로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그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의 배후, 그리고 의도까지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한마디로 납치 문제에 대한 강경 대응 주장으로 ‘벌떡 일어선 사람’,  최근까지도 북한 인권법이나 각종 대북 제재 조처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 얼마 전까지 다 죽어가다 미사일 소동 이후 기사회생해 더욱 방방 뜨고 있는 바로 그 사람,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배후 인물이라는 것이다.

 
낮에는 대북 강경, 밤에는 북측과 수교 교섭을 벌이는 그의 이중 행보와 관련한 특종 보도로 <주간현대>는 가히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매체다. 특히 ‘특종! 아베 관방장관 전격 방조(방북) 계획’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제목을 단 이 기사는 출처를 ‘일본 정부 관계자’라고 밝혔고 매우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적시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였다. 내용인즉, ‘지난 6월 초 아베 장관이 자신의 최측근 인사인 이노우에(井上義行·43) 정무비서관을 베이징에 파견해 북측 인사와 접촉했고, 이 자리에서 자신의 요구사항 세 가지를 들어주면 올해 9월 자신이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총리 의자’를 넘겨받는 즉시 북한을 전격 방문해 북·일 수교 교섭을 성사시키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주간현대>는 이 기사에서 아베 장관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북일 수교 교섭의 모델은 바로 1972년 7월 총리에 취임한 다나카 가쿠에이 씨가 총리 취임 후 두 달 만에 중국을 전격 방문해 중·일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던 방식이라고 밝혔다. 다나카 총리가 이를 통해 막대한 대중국 이권을 챙겼듯이, 아베 역시 1조 엔에 이르는 대북 정부개발원조(ODA) 이권을 장악하는 게 목표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 전격 작전 같은 계획의 전 단계가 되는 세 가지 요구 사항의 하나가 바로 지금 북·일간에 진행되고 있다. 우선 첫 번째 요구는 1970년대 일본 항공기 요도 호를 납치하고 북한에 정치 망명한 아홉 명의 납치범 중 생존자 네 명을 소환할 것. 이는 북한이 수락. 두 번째는 일본인 납치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공작원 신광수와 김세호(다른 이름으로 박세호 또는 최순철) 등을 인도할 것. 이는 북이 거절. 대신 국내에서 처벌하겠다 했고 일본측이 양해. 마지막 세 번째가 요코다 메구미를 비롯해 북측이 이미 사망했다고 주장한 납치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법 제시이고, 금강산 평양을 무대로 한 김영남 기자 회견이라는 형식으로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베의 전격 방북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즉 김영남을 동원한 메구미 사망 확인 노력의 뒤에는 오는 9월 아베의 총리 취임과 함께 전격 방북을 통한 북·일 수교 교섭이라는 일련의 뒷그림이 작용한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아베 장관이 대북 이중 행보를 보여왔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특히 북측에 북·일 수교 교섭 성과를 고이즈미 재임 시절이 아닌 자신의 연대로 미뤄달라고 할 정도로 집념을 보여왔다는 사실도 암암리에 유포되어왔다. 이러한 그의 집념들과 최근 베이징에서 취합된 정보를 통해 보면 ‘베일 북·일 접촉설’은 신빙성이 매우 높다.

북`·일 관계에 정통한 서울과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들의 전언에 따르면, 고이즈미-아베를 정점으로 한 일본 수뇌부의 대북 비밀 외교는 고이즈미 총리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올해 초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에는 일본측이 미국에 북·일 수교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막대한 금액의 대가를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어 있다.

즉 현재 미·일 간에 전개되고 있는 주일 미군기지 재조정 비용과 관련해 미국이 일본에 약 3조 엔의 이전 경비를  댈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 해병 제3원정군을 미국령인 괌으로 이전하는 비용 등 매우 부당한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비용들이 요코다 메구미 등 납치 문제와 북·일 수교에 대한 일본 처지를 양해하는 대가라는 것이다. 또한 지난 6월 하순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및 엘비스 프레슬리 생가 방문 등 일련의 ‘닭살 애정 표현과 이벤트’로 화제가 됐는데, 그 이면에도 북·일 수교를 둘러싼 양측의 거래가 숨어 있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초점은 9월로 맞춰져 있다: 결국 모든 초점은 9월이다. 미국에서 미사일방어 예산이 통과되고 일본에서는 고이즈미에서 아베로 정권이 이양되는 시점이 변화의 타이밍이 될 공산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북의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북·일 관계의 쟁점이 납치 문제에서 일본 안보 문제로 이동하는 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납치 문제의 원칙적 해결을 주장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아베 장관으로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남은 임기 중에 이 문제를 물타기 또는 해결하고 넘어가는 것이 부담을 줄이는 길일 수 있다. 대신 북의 미사일 발사로 야기된 안보 문제 해결이라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명분을 내걸고 평양행을 결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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