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판매기’ 읽자 무더위가 저 멀리
  • 이재무 (시인) ()
  • 승인 2006.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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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바야흐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 돌아왔다. 매년 겪는 더위라지만 올 여름은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다.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왔을 뿐더러 벌써부터 부려대는 성깔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가난한 집에 든 식객처럼 반가울 게 없는 더위는 생활 속에 일찍 찾아와서는 오래 머물다 가고 있다. 아주 진절머리나게 일상을 물었다 뱉었다를 반복하다가 지쳐 쓰러질 때쯤에서야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더위는 아닌게 아니라 그 성정이 여간 극성맞은 게 아니다. 막무가내로 악착같이 달려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찾고 더러는 해외로 나가고 있다.

억압적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비록 제한된 일정이나마 일탈의 해방감을 만끽하자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극장가는 스릴러 엽기 납량 등으로 아예 드러내놓고 호객 행위를 일삼고 있다. 그런데 더위도 가만히 눈여겨보면 여러 유형이 있다. 무겁고 텁텁하고 찝찝하고 후질근하고.....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더위를 피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이열치열형, 은둔형, 축제형, 여행형, 방랑형 등등

그렇다면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주로 독서를 통해 더위를 피하는 편이다. 작품을 통해 통념을 깨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과 발견을 만났을 때의 서늘한 감동이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피서였던 셈이다. 인간과 세계 이해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것과는 아주 다른 색다른 시편을 만났을 때의 시원한 감동을 그 어떤 청량음료가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올 여름도 나는 울림을 주는 시를 가지고 저 사납고 거친 더위에 맞서볼 생각이다. 여기 지난 여름 더위를 쩔쩔매게 했던 통괘하고 시원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淫俯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최승호 <자동판매기> 전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 지성사 펴냄) 중에서.

일상의 통념을 깬 시원함이 들어 있는 시편이다. 자동판매기와 매음녀 사이의 유사성을 지각한 행위에서 비롯한 이 통념 깨기는 반복 순환의 기계적 일상을 사는 현대인에게 성찰과 각성의 계기를 부여한다. 자의식 없는 나날의 일상은 부패를 넘어 죄악에 가깝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는 여전히 통념과 습관에 끌려가는 메마른 삶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돈을 넣어야만 작동하는 것이 자동판매기와 창녀뿐일까?

파시즘적인 자본 논리에 종속된 타락한 영혼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이면은 참으로 추악하고 참담하다. 종교적 구원까지도 돈의 권능으로 매매되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위와 같은 시편을 읽을 때 등골이 오싹하는 서늘한 감동이 불쑥 내습한다. 습관의 껍질이 벗겨지는 통렬함이 들어 있다. 기름에 엉키는 지푸라기처럼 온몸에 달라붙어 짜증을 부르는 더위가 저만큼 달아나는 게 보인다. 나에게만 그게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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