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우승이 면죄부 될 수 없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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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최악의 축구 스캔들 관계자 ‘단죄’

 

6월27일 독일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은 호주를 1-0으로 이겼다. 의기양양한 분위기 속에 승리 기자 회견을 진행하던 이탈리아 선수단에 비보가 전해졌다. 지난해 은퇴한 전 이탈리아 국가대표 선수 지안루카 페소토(35)가 투신 자살을 기도해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대표단은 큰 슬픔에 잠겼다. 주장 파비오 칸나바로 선수는 기자회견을 중지했다. 팀 주전인 델 피에로 선수와 잔루카 참브로타 선수는 월드컵이 진행 중임에도 황급히 이탈리아로 떠났다.

지안루카 페소토는 6월22일 이탈리아 대 체코전을 직접 관전하며 후배들을 격려했던 신망받는 선배였다. 그는 A매치 스물한 경기를 뛰었고 지난해 은퇴한 후 이탈리아 명문 구단인 유벤투스의 매니저로 일해왔다. 페소토 씨는 토리노에 있는 유벤투스 본부 2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창문 15m 아래로 몸을 던졌다. 손에는 묵주를 쥐고 있었다.  다행히 주차해 있던 자가용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생명은 건졌으나 복합 골절상과 내출혈로 중상을 입었다.

페소토 씨가 투신자살 기도를 하기 나흘 전인 6월23일 이탈리아 검찰은 유벤투스 등 네 개 축구 구단 간부들을 승부 조작 혐의로 기소했다. 페소토 씨는 용의자 명단 26인에 끼지 않았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석연치 않았지만, 평소 그는 유벤투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자살을 기도한 일은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는 7월10일 마침내 2006 독일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탈리아 축구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올해 가장 큰 축구 뉴스는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역사상 최악의 축구 비리’로 기록될 승부 조작 스캔들이다.
승부 조작 사건은 이른바 ‘모지 스캔들’이라고도 불린다. 루치아노 모지는 유벤투스의 전 단장으로 1994년 취임 이후 팀을 일곱 번이나 세리에 A리그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화려한 영광 뒤에는 흑막이 있었다. 축구협회 간부들과 심판들에게 뇌물을 주며 승부를 조작하는가 하면 자신을 따르지 않는 선수나 심판들에게는 폭력도 일삼았다. 검찰이 감청한 전화 녹취록에는 모지 단장이 한 심판위원회 임원에게 고급 스포츠카 마세라티를 뇌물로 주려는 내용이 나온다.

유벤투스 전 단장, 뇌물 공여·협박 일삼아

이탈리아 검찰에 따르면, 주심·부심을 유벤투스에 유리한 사람으로 배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승부를 조작한 경기가 2004~2005시즌에만 스물아홉 경기나 된다. 또 모지 단장은 유능한 선수를 끌어오기 위해 상대 구단과 선수 사이가 나빠지도록 뒷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검찰은 약물 복용 관련 수사를 위해 전화 감청을 하던 도중 루치아노 모지의 비리를 확인했다. 녹취록만 1백72쪽에 달한다. 이번 사건의 실상이 폭로되면서 이탈리아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루치아노 모지는 이탈리아 축구계를 장악한 ‘큰손’이었다. 미국 언론은 그를 이탈리아 정치·경제를 장악한 베를루스코니 가문에 빗대어 ‘축구계의 베를루스코니’라고 불렸다. 이탈리아 언론은 그가 좌지우지하는 이탈리아 축구판을 일컬어 ‘시스테마 모지’라고 칭했다.

 

모지가 축구계를 장악한 수단 중 하나는 GEA라는 스포츠 매니저 회사였다. GEA는 모지 단장의 차남 알레산드로가 운영하고 있다. 2004년 11월 유벤투스가 패하자, 당시 심판진을 탈의실에 감금한 것도 GEA였다. GEA측은 심판 판정 시비가 일 만한 장면은 아예 뉴스에서 방영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LA7의 한 축구 토크쇼 진행자인 알도 비스카르디에게 전화를 걸어 ‘재생 영상을 자꾸 보여주지 말라’고 협박한 뒤, 값비싼 시계를 주겠다고 회유했었다. GEA 에는 이탈리아 사회의 거물급 인사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탈리아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리피 감독도 월드컵 직전, GEA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았다. 아들이 GEA에 근무하고 있으며, 리피 감독 자신도 GEA 회원이었다.

검찰 수사 이후 유벤투스의 모든 이사진이 사퇴했다. 유벤투스를 고리로 출발한 검찰 수사는 고구마 줄기를 캐듯 확대되어, 현재 AC 밀란·피오렌티나·라치오 등 네 개 팀 임원들이 공식 기소되었다. 구단의 임원들뿐만 아니라 구단 자체에도 징계가 내려졌다. 7월5일 스테파노 팔라치 검사는 스포츠재판부에 유벤투스에 대해서는 3부 리그(세리에 C) 강등을, 나머지 세 팀에 대해서는 2부 리그(세리에 B) 강등을 요청했다.  유벤투스와 AC 밀란은 이탈리아 축구를 이끄는 양대 기둥인데, 이 두 팀이 세리에 A에서 쫓겨나면 이탈리아 리그 자체가 몰락할 수도 있다.

세리에 A는 그동안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 스페인의 프리메가 리가와 함께 세계 3대 명문 리그로 불려왔다. 하지만 재판 결과에 따라 세리에 A에 속한 세계적 스타들이 다른 나라 리그로 옮아갈 가능성이 높다.

유벤투스 전 단장, 뇌물 공여·협박 일삼아

흥미로운 대목은 이탈리아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 의지다. 이탈리아 축구 클럽은 정치와 경제계 고위 세력과 연결되어 있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성역 가운데 하나였다. 유벤투스는 피아트 그룹을 설립한 아그넬리스 가문이 대주주로 있는 클럽이다. 피아트 그룹이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검찰 수사로 주가가 폭락하는 피해를 보았다. AC 밀란의 경우 ‘살아 있는 황제’라고 불리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집안 인사가 회장이다. AC 밀란측은 “승부 조작을 주도한 것은 유벤투스다. 우리는 승부 조작의 피해자다”라며 검찰 수사에 강하게 불만을 나타냈다.
사회 유력한 인사보다 더 검찰을 압박하는 것은 여론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검찰이 선수들을 소환해 조사하는 것은 경기력을 떨어뜨린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검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찰은 5월24일 오후 대표팀 주전 골키퍼 부폰 선수를 불러 조사했고, 월드컵 개막 1주일을 앞둔 6월4일 오전에는 주장 칸나바로 선수를 소환했다. 부폰 선수는 자신이 뛴 시합의 토토 복권을 구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반나절은 축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반나절은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찰이 대표팀에 베푼 배려는 기소 발표 시점을 예선 E조 경기가 끝난 뒤로 미룬 것이 전부였다. 만약 한국의 경우였다면 국익을 위해 수사를 자제하라는 목소리가 나올 법 했다. 스캔들 내용이 폭로되면서 월드컵에 나설 예정이었던 이탈리아 유명한 심판 세 명이 경기 배정을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극적으로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쥐자 동정론이 확대되고 있다. 우승 선수 스물세 명 가운데 열세 명이 비리 혐의로 강등 위기에 처한 4대 클럽 소속이다. 7월10일 이탈리아 대표팀이 우승컵을 안고 귀국하자 60만 인파가 로마 시내에 모여 이들을 환영했다. 네 개 클럽 축구 팬들은 사면을 요구했다.

하지만 기도 로시 이탈리아 축구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사면 요구를 일축했다. “독일에서 국가 대표팀이 거둔 승리는 우리 축구 전체가 병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축구계에 위기가 닥치고 회오리가 불더라도 건강한 부분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번 월드컵 우승으로 이탈리아 축구계를 정화할 필요성이 더 시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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