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e스포츠에 열광하나
  • 안은주 기자 · 김회권 인턴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6.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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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대회장마다 10~30대 팬 인산인해…두뇌 게임과 곱상한 게이머에 매료

 
지난 7월1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 교복을 입은 10대 소녀들이 세중게임월드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국내 대표적 컴퓨터 게임 대회인 ‘SKY 프로리그’ 준플레이오프를 보기 위해서였다. 경기는 오후 2시부터 열릴 예정인데 소녀들은 오전 10시부터 자리를 꿰찼다. 아침부터 온 이유를 물었더니 ‘늦게 오면 자리가 없어 서서 봐야 한다. 그러면 선수들 얼굴을 보거나 사진 찍기가 힘들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20대 대학생부터 30대 직장인까지 젊은층 3세대가 모두 모였다.

1년 전 이맘때도 마찬가지였다. ‘2005 SKY 프로리그’ 결승전이 있었던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경기가 열리던 저녁 6시 무렵, 12만 관중이 해변을 가득 메웠다. 해변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로 컴퓨터 게임 대회가 생중계되었고, 관중은 월드컵 축구를 보듯 탄성과 환호를 내질렀다.

e스포츠, 흔히 말하는 컴퓨터 게임이 폭발적 인기를 모으며 젊은 세대의 대표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e스포츠’라는 용어는 2000년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만들어냈다). e스포츠의 대표 종목인 스타 크래프트 리그의 경우 연간 60만~70만명이 스튜디오나 경기장을 찾는다. 임요환 같은 스타 게이머는 웬만한 연예인 뺨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팬 카페 회원 수만 70만명이 넘는다. 요즘 설문 조사를 하면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의사, 변호사가 아니라 프로 게이머이다. 실제로 각 프로 게임단 연습생 선발 과정에는 1천여 명씩 지원해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다. 

e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게임 전문 채널의 시청률도 예측을 뛰어넘는다. 게임 전문 채널 온게임넷은 13~25세 남성을 기준으로 할 때 평균 시청률이 30%를 넘는다. 이 시청자층에서는 87개 케이블 채널 가운데 시청률 1,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왜 e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일까. 삼성경제연구소는 e스포츠가 한국 젊은이들의 독특한 기질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안재 수석연구원은 “우리 민족의 집단적 놀이 문화는 게임을 매개로 함께 모여 경쟁하고 응원하는 e스포츠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젓가락 문화에서 비롯된 뛰어난 ‘손끝 기술’이 프로 게이머들의 우수한 경기력으로 나타나면서 관중을 매료시켰다”라고 말했다. 이런 특성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 인프라와 게임 케이블 방송의 발전이라는 외적 요인과 만나며 e스포츠의 대중화를 견인했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을 ‘PC방 놀이’에서 ‘함께 즐기는 게임’으로 도약시킨 일등 공신은 스타 크래프트 게임이다. 스타 크래프트가 처음 유행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 게임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하고는 곧 스러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스타 크래프트 게임은 국내 출시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각종 e스포츠 대회를 주도하며 ‘e스포츠〓스타 크래프트’라는 공식까지 만들어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 짧은 경기 덕에 몰입 쉬워

전문가들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스타 크래프트의 속성이 ‘두뇌 승부’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기질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승원 MBC 게임 해설위원은 “스타 크래프트는 게임의 흥미를 잘 살린 훌륭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자 사람에 따라 게임의 양상이나 성격이 달리 나타나는 역동적인 게임이다. 그래서 리그가 계속되어도 관중을 질리게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경기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빠르면 5분 안에 끝나는 경기 속도도 인기 요인 가운데 하나다. 게임 대회장에서 만난 이상석씨(24)는 “야구나 축구는 하이라이트나 결과만 봐도 되는데 게임은 미묘한 과정에서 결과가 달라지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한다. 게다가 경기 시간도 짧아 더 몰입할 수 있고 재미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e스포츠 열성 팬 김철성씨(26)는 “e스포츠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다. 야구나 축구는 경기를 보더라도 내가 직접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스타 크래프트는 나보다 잘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 내 게임에 응용하는 재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함께 즐기는 게임’ 시대가 본격적인 ‘게임 관전 시대’로 전환된 것은 2000년대 들어 게임 방송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온게임넷이나 MBC게임에서 주최하는 스타 리그를 통해 선수들의 탁월한 기량이 알려지자 게임 마니아 중심으로 관전객이 늘었다. e스포츠 문화가 확산되자 정부와 기업까지 나서서 e스포츠 발전의 지렛대를 자처했다. 이는 e스포츠가 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상자 기사 참조). 기업은 프로 게임단을 창단하며 e스포츠 마케팅에 열을 올렸고, 국회와 정부에서는 프로 게이머들의 병역 활동 무대가 될 ‘상무팀’ 창단까지 논의했다. 문화관광부는 서울 용산에 세계 최초로 5백명 규모의 상설 경기장도 건립했다.

프로 게임단이 창설되고 e스포츠가 활성화하면서 팬은 더 급격하게 늘었다. SK텔레콤·KTF·팬택·CJ 등 자본력 있는 대기업들이 창단한 팀별로 팬 그룹이 형성되었고, ‘내 팀’ 또는 ‘내 선수’라는 의식을 가진 팬들 중심으로 e스포츠 경기를 더욱 열심히 보고 관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SK텔레콤이 운영하는 ‘T1'의 주장인 임요환 선수의 등장은 ‘오빠 부대’가 나서는 단초가 되었다. 실력뿐 아니라 외모 역시 곱상한 덕에 게임을 즐기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까지 e스포츠의 관객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임요환 선수의 뒤를 이어 홍진호, 최연성, 이윤열, 박성준 선수 같은 스타 게이머가 다수 배출되었고, 이는 더욱 많은 소녀 팬을 경기장으로 이끌었다. e스포츠협회에 등록한 프로 게이머 2백8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개인 팬 까페를 가지고 있다. 

운동장에서 햇빛과 씨름하느라 검게 그을리고 울룩불룩한 근육으로 다져진 운동 선수들과 달리 PC 앞에 매달려 있느라 햇볕 한 줌 받지 않은 창백하고 곱상한 얼굴의 게이머들은 10대 소녀들의 ‘테리우스’로 충분했다.

게다가 이 ‘테리우스’들은 연예인과 달리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소녀들을 더욱 열광시킨다. 게임 대회장에서 만난 여고생 임예령양(17)은 “솔직히 잘생긴 게이머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온다. 바로 눈앞에서 선수를 볼 수 있는 종목은 e스포츠밖에 없다. 좋아하는 선수들과 함께 사진 찍고 악수도 할 수 있어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소녀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게이머의 경기라면 빼놓지 않고 본다. 또 다른 여고생 한소진양(17)은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속한 팀 경기는 거의 다 본다. 학교나 학원 때문에 못 본 경기는 재방송이나 다운받아서 본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게임보다 게이머를 즐기는 것이다.

전문가들 “e스포츠 아직 볼거리 부족하다”

소녀 팬들과 달리 게이머뿐 아니라 게임까지 즐기는 남성 팬들은 오빠 부대와는 다른 방법으로 e스포츠를 확산시킨다. 그들은 경기를 보고 선수를 응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수별 ‘클랜(똑같은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모임)’을 만들어 ‘팬 클랜 리그(아마추어 대회)’까지 만들었다. 홍진호 선수 클랜(JHF)에서 활동하는 윤지원씨(22)는 “팬 클랜 리그는 여름과 겨울 방학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다. 좋아하는 선수의 팬 카페 회원들끼리 게임 대회를 열어 서로 친목을 다지는 자리다”라고 설명했다. 팬 클랜 리그에는 홍진호, 이윤열 선수 등 선수 열두명과 팬 카페 회원 2백여 명이 참가한다.

그렇다고 e스포츠가 모든 젊은층을 휘어잡은 것은 아니다. e스포츠가 10만명을 넘어 20만, 30만 관중을 끌어들여 젊은이들의 확고한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볼거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스포츠계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한빛스타즈 이재균 감독은 “우리 업계의 최대 고민 가운데 하나가 관중이나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할 볼거리를 더 늘리는 방법이다. 경기 진행 방식을 재미있게 하고 선수들로 하여금 신기술이나 신전략을 개발하게 해야 한다. 아울러 경기장 내 풍부한 볼거리와 흥미로운 이벤트 등을 제공해 팬들의 만족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또 게임 대회를 다종화해야 e스포츠 인구가 더 확산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유승호 교수(강원대·영상문화학)는 “스타 크래프트 위주의 게임 대회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카트라이더와 같은 다른 게임 대회도 개최해 게임 시장의 저변을 늘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을 세계 속의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시킨 바 있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온·오프 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바람몰이를 하는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명실상부한 ‘e스포츠 종주국’으로 안착시키는 일등 공신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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