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 재판’ 롤러코스터 탄 이건희 회장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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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재판이었다. 검사와 변호인 간에 설전이 벌어지지 않고 재판장과 검사가 공방을 했다. 지난 7월20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고등법원 404호 법정에서 열린 삼성에버랜드 항소심 재판에서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이상훈 부장판사)는 허태학·박노빈 씨의 범죄 혐의를 추가로 입증하라고 검찰에 요구했다. 이날 재판은 재판정이 기자들과 삼성 관계자들로 넘쳐나 서있는 사람도 여럿일 정도로 주목되었다.

허씨와 박씨는 각각 에버랜드 사장과 상무로 있던 1996년 10월, 전환사채(CB)를 발행해 주당 8만5천원이 넘었던 실제 가치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인 주당 7천7백원에 이재용씨 등 이건희 회장 자녀들에게 1백25만4천 주를 넘겼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회사에 9백억원이 넘는 손실을 끼친 혐의로 2003년 12월 기소되었다.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였다. 지난해 10월4일 1심 재판부는 업무상 배임죄를 인정해 허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박씨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2000년 6월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 등 법학 교수 43명이 에버랜드가 경영권 승계를 위한 편법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했다며 이건희 회장 등 33명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검찰은 고발장이 접수된 지 3년 만인 2003년 4월 수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두고 허씨와 박씨를 기소했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이재용씨의 계좌를 추적했고, 12월에는 삼성 계열사의 회계 감사를 맡았던 회계법인 세 곳을 압수 수색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해왔다.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부장 박성재) 검사들은 상당한 의지를 갖고 수사에 임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송필호 중앙일보 사장 등이 조사받았고, 이건희 회장 부자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등에 대한 조사가 남아 있는 상태다.

재판부, 예상 깨고 판결 미뤄

당초 법원 주변에서는 항소심 재판부가 이날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판결을 내릴까 생각도 했으나 공소장에 기록된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사실 관계가 분명치 않아 지금 판결을 내리면 형식적인 판결에 그칠 수 있다”라며 검찰에 석명권까지 발동해 추가 조사를 요구했다.

 
“1심에서 어떤 판결을 했건 항소심에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1심 판결 논리에 비약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룹 차원에서 공모를 했는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두 피고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라”는 재판부의 언급에서는 유죄 판결을 내린 1심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엿보인다.

재판부가 검사의 주장에 “같은 주장을 동어 반복하지 말라”고 일축하면서 검찰은 부담이 더 커졌다. 항소심 재판이 끝난 뒤 검찰 관계자들 가운데는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여론을 떠보는 식의 정치적 방법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판부가 ‘입증하라고 요구한 사항을 검찰이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죄이다’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재판부가 검찰에 입증을 요구한 구체적 내용은 ‘전환사채가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이재용 상무 등에게 넘기기 위한 일련의 계획 아래 발행된 것이라면, 허씨와 박씨가 에버랜드 주주들과 공모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그동안 삼성측 변호인들이 검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내놓았던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였다.

재판장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라고 말했지만 검찰은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짜고 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나. 검찰은 간접적인 증거를 통해서도 전환사채를 이재용씨가 인수할 것이라는 것을 허씨, 박씨가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본 반면 재판부는 다르게 본 것 같다. 현재 검찰로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특별히 더 내놓을 만한 내용이 없다”라고 말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재판부의 태도를 놓고 이른바 ‘김홍수 게이트’에 조 아무개 부장판사를 비롯한 판사 여럿이 연루되었다는 얘기가 검찰에서 흘러나온 데 대한 법원의 불편한 기류가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김홍수 게이트’와 관련해 법원과 검찰은 날로 감정 싸움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법원 주변에서는 “검찰이 구체적인 물증도 없으면서 판사를 소환해 조사했다” “판사 부인과 친척들의 전화 통화 내역을 막 살펴보고 있다”라는 따위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검찰은 “수사에 성역이 있을 수 없다. 검사들도 조사하고 있다”라고 맞받아쳤다.

 
곤혹스럽기는 삼성도 마찬가지다. 재판부가 겉으로는 삼성측에 유리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이날 삼성측 변호인들은 재판부에 “시간도 많이 지났고 검찰도 수사를 할 만큼 했으니 오늘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을 끈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니 빨리 결론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삼성측에서는 내심 허씨와 박씨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현 단계에서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 길게 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죄 판결이 나와 검찰이 상고를 하고 대법원에 가서 뒤집힌다면 부담이 더 크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는 현 정권 들어와서 대 법관들이 많이 바뀌는 등 대법원의 기류가 예전 같지 않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도대체 재판부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라고 답답해했다.

에버랜드 항소심 재판 이후 검찰 주변에서 주목된 것은 ‘이건희 회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그동안 검찰 내부에서는 “항소심 선고 이후에 이회장을 소환해야 한다”라는 의견과 “그 전에 조사하는 것이 낫다”라는 주장이 맞서왔다. 이때처럼 이번에도 각각 “항소심 재판부의 결정으로 이회장 소환 시기가 상당히 늦춰지거나 아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는 시각과 “아니다. 구석에 몰린 검찰이 오히려 더 강하게 삼성을 압박하는 쪽으로 행보할 것이다”라며 또 전망이 갈린다.

검찰은 그동안 여러 차례 브리핑에서 ‘정면 돌파’를 시사했다. 서울중앙지검 이인규 3차장은 7월 초 브리핑에서 “검사들이 자신감에 차 있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을) 소환하겠다”라는 말도 했다. “공개적으로 (이건희 회장을) 소환하지는 않겠지만 출장이나 서면 조사는 없다” “주인이 바뀌는 일인데 머슴이나 일꾼이 주인 몰래 할 수 있겠냐”라는 따위 언급도 나왔다.

물론 최근 들어 미묘한 변화도 엿보인다. ‘김홍수 게이트’가 터지고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보석으로 풀려난 뒤 검찰은 에버랜드 사건과 관련해 입을 잘 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재용 상무의) 소환을 검토 중이다” “당장 (이건희 회장을) 소환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라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에버랜드 항소심 재판부의 재판이 끝난 뒤인 7월21일 대검의 한 관계자는 “지금 이회장을 부른다고 특별히 더 나올 것이 없다. 할 얘기는 이미 변호인에게 다 했다. 따라서 그를 소환하는 것은 무리한 행위이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반인을 소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소환’은 현실적으로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소환→불구속 기소 가능성 높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검찰 수뇌부는 이회장을 소환하는 데 신중론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몽구 회장을 잡아넣더니 이번에는 이건희 회장이냐는 식으로 ‘검찰 수사가 경제를 망친다’는 ‘경제부담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검찰이 처한 안팎 상황을 종합해볼 때 ‘이건희 소환’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분석이다. 서울중앙지검에 출입하는 한 일간지 기자는 “이런저런 분석이 있지만 검찰은 결국 이회장을 소환할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검찰의 한 소식통도 “소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그를 조사하지 않으면 엄청난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이인규 3차장이 “허씨, 박씨 사건에 대한 판결과 이회장 부분이 크게 연관성이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분석에 무게를 싣게 한다.

 
검찰이 이회장을 소환 조사하고 불구속 기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이회장은 삼성에버랜드(당시 중앙개발)가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과정, 제일제당을 제외한 중앙일보사 등 주주들이 주식 보유 비율에 따라 배정된 전환사채를 청약하지 않은 과정, 그 전환사채가 이재용씨등 이회장 자녀들에게 넘어가는 과정 등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사받을 것으로 보이는 ‘몸통’이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이회장의 딸인 이부진·이서현 씨가 에버랜드 전환사채 청약일인 1996년 12월3일 이회장으로부터 각각 16억여 원을 증여받아 전환사채를 매입하는 등 곳곳에 이회장이 개입한 정황이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를 조사조차 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거센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리라고 보는 것이 현실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다. 검찰이 역시 삼성에 약하다는 비판과 함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논란이 다시 일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에 출입하는 한 일간지 기자는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을 경우 ‘김홍수 게이트’와 묶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문제를 부각시키는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 수사가 막바지까지 진척된 상황에서 ‘완성’을 위해서는 이회장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보는 수사 검사들의 의지를 수뇌부가 뚜렷한 명분 없이 꺾을 경우 조직이 흔들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른바 ‘경제부담론’도 큰 고려 요소가 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을 구속할 당시 검찰이 ‘경제부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문건을 만들었고, 구속을 전제로 소환했던 정회장의 경우와 이건희 회장에 대한 소환은 질적으로도 다르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건희 회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단순히 이번 사건에 국한해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검·경찰 수사권 조정 문제, 판·검사를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를 수사하는 공직부패수사처 신설 문제 등과도 관련이 있다. 검찰이 이 사건을 잘못 처리했을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으며 불리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검찰은 수사의 정도를 걸으며 공을 법원에 넘길 것으로 보인다. 단 이럴 경우 에버랜드 사건의 수혜자에 불과한 이재용 상무는 소환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삼성 또한 이회장이 소환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대비한 흔적이 있다. ‘공개 소환 조사’가아닌 ‘호텔 등 제3의 장소에서의 조사’를 삼성 관계자들이 언급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조사를 하고도 욕을 먹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검찰은 에버랜드 항소심 다음 재판일인 8월24일 이전에 ‘비공개, 검찰 청사 소환 조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회장이 소환된다면 불구속 기소될 것이 유력하다. 조승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검찰이 의지가 있다면 이회장에게 업무상 배임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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