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에 죽고 사는 ‘개그 고시생들’
  • 차형석 기자 · 김범래 인턴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7.2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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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공채 합격하려 매일 수시간씩 ‘연습 또 연습’…TV 유머 프로가 교과서

 
지난 7월24일 오후 3시, 대학로 신연아트홀. 인덕대학 개그 동아리 ‘개그 스토커’가 하는 공연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개그 고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단 한 번의 웃음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것은 과장하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개그맨 지망생인 이수지씨(22)는 4분짜리 ‘시네마’ 코너를 반복했다. 극장 매표소 직원 역이다. “손님, 강혜정씨가 결국 최민식씨의 딸로 판명되는 <올드보이> 표 두 장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으로 판명되는 <식스센스> 표 두 장 말씀이십니까?” 일종의 ‘스포일러성’ 개그이다.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가 어조를 조정하기도 하고, 표정을 찡그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조금이라도 웃기기 위해서. 웃음은 말과 타이밍에서 나온다. 웃음이 쏟아져 나오는 그 빈틈을 찾기 위해 이씨는 자신의 말과 표정을 부단히 변주했다.

 
이수지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개그맨을 꿈꾸었다. 동아방송대에 입학해 개그동아리 ‘중독자’에서 활동하다가 지난해 여름에 대학로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로 무대 위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극단에서 막내이다 보니 무대에 서기가 어려웠고, 어렵사리 무대에 올라도 단역이었다. 이씨는 다시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KBS 공채 개그맨 가운데 인덕대 출신이 많은 것을 보고 지원했다(딸린 기사 참조). 학교 개그 동아리가 대학로에서 공연하고,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지금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시네마’ 아이디어도 ‘알바’를 통해 길어올린 아이디어다. 목표? 개그맨 공채에 합격하는 것이다.

같은 동아리에 있는 주우성씨(22)도 이수지씨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 06학번인 주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로의 코미디 극단 생활을 했다. 아침부터 청소하고, 낮에 포스터 붙이고 홍보하고, 저녁에는 공연하고, 밤에는 선배 개그맨들에게 아이디어를 물어보고 지도를 받는 생활이었다. 선배들도 많이 물어볼수록 좋아했다. “아이디어를 자꾸 ‘검사’받고, 지도받으면 나만 도움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나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갈 수 있으니까.” 대학로 자취방에서 한 달에 몇 십만원으로 ‘짠돌이’ 생활을 견뎌야 했던 것을 빼면, 그에게 좋은 경험이었다. 매일 공연하면서 연기를 몸에 익힐 수 있었으니까.

요즘 주우성씨는 대부분 시간을 개그에 바친다. 학기 중에는 학교에 모여 여섯 시간 정도 모여 연습을 하고, 방학 중에도 개그 동아리 공연을 위해 매일 함께 아이디어를 모으고 연습한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신문, 뉴스, 책,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을 닥치는 대로 본다.

그에게 방송 3사의 개그 프로그램은 ‘교과서’이다. 개그 프로그램은 세 번씩 돌려본다. 첫 번째는 즐기면서, 두 번째는 대사와 호흡을 관찰하면서, 세 번째는 동작과 표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좋은 대사는 노트에 적어두고, 좋은 개그 코너는 ‘내가 하면 어떻게 각색해볼까’ 실제로 연습해본다.

요즘은 개그맨 출신들이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웃음이 방송 프로그램의 빠질 수 없는 밑반찬이기 때문이다. 유재석처럼 개그맨으로 시작해 전문 MC로 진출한 경우도 있고, 박경림이나 이혁재처럼 웃음을 주면서도 개그맨이라고 부르기에는 모호한 방송인들도 있다. 개그계 사람들은 대개 이들을 ‘버라이어티 방송인’이라고 부른다.

주로 동아리와 극단에서 활동하며 배워

 
‘개그 스토커’ 김승혜씨(20)는 개그계 데뷔를 꿈꾸면서 함께 ‘버라이어티 방송인’ 활동도 준비한다. 개그맨 지망생이었던 김씨는 고3이었던 지난해 초 대학로 생활을 경험해보고자 어머니와 함께 전남 순천에서 서울로 ‘개그 유학’을 왔다. 지방에서는 고등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는 것 이상으로는 준비가 어려웠다.
올해 1월 그녀는 MBC 팔도모창대회에 나가 대상을 차지했다. 아이비 노래를 박경림 버전으로 불렀다. 이 팔도모창대회는 박경림, 박슬기 등이 거쳐갔고, 두 사람이 방송계에 진입한 무대다. 김승혜씨는 수상 이후 기획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기획사에서는 ‘개그우먼보다는 버라이어티 방송인이 낫다’고 추천했다. 김씨는 “기획사는 5년 계약인데 얽매여야 하고, 출연료도 나누는 단점이 있지만 매니저가 오디션 자리를 잡아주고, 여러 경로를 통해 방송사에 진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때문에 좋다. 현재는 비디오 자키(VJ)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 세 사람이 대학 개그 동아리를 하고 대학로 공연을 하면서 개그계로 가는 길 초입에 들어섰다면 김현정씨(25)는 개그 등용문의 거의 막바지에 서있는 격이다. 김현정씨는 개그 아마추어들이 무대에 서는 KBS <개그 사냥>에 출연하고 있다. ‘예쁘고 사랑받는 여자와 대비해 구박을 받지만 당당하고, 엉뚱한 귀염둥이 캐릭터’로 나오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준 개그맨’들의 경쟁 무대이다. 김현정씨는 “프로야구로 치면 2군격”이라고 표현했다. 오디션을 통과한 40~50여명이 20개 정도 코너를 만들어 경합을 한다. 이 가운데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팀은 12팀 정도. 일주일 내내 방송사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짜고 연습을 한다. 한 팀이 매주 10개 정도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나름대로 대학로나 대학에서 ‘난다 긴다’ 하는 지망생들이 모여 경쟁하기 때문에 이들 입에서는 ‘전쟁’,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한마디로 웃겨야 산다.

‘개그 유학생’도 등장

김현정씨는 대학로 활동보다는 독립군처럼 개그맨 시험을 준비했다. 개그맨이 되고 싶었지만 어떡게 해야 할지 몰라 개그맨 지망생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이 커뮤니티에서 지금은 개그맨이 된 유민상씨를 만나서 팀을 짜서 야외 공연을 시작했다. 신촌의 한 극장 야외 무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1시간 정도 공연하고 자발적으로 돈을 받는 형식이었다. 어차피 많은 개그맨 지망생들이 대학로 무대에 서는 것도 “내 개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알아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게릴라 공연 대신 대학로 극단 공연을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야외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느꼈다. 정말로 웃겨서 웃는 것인지, 억지로 웃는 것인지.

 
지난해 <폭소클럽>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세 달 후에 제 발로 걸어나왔다.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가는 것 같았고, 아직 실력을 쌓지 못했다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이었다. 김씨는 “그때만 해도 한 70%는 개그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부모님의 반대도 누그러졌지만, 부담이 컸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개그 독립군’처럼 활동한다. 혼자서 아이디어를 짜고 그에 맞는 상대를 골라 팀 활동을 한다. 이제는 개그맨도 춤과 노래를 잘 해야 하기 때문에 춤을 함께 배우고 있다. 그녀는 “외모가 웃길수록 더 말로 웃겨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내가 하고 싶은 개그는 말로 웃기는 개그이다. <개그콘서트>에 내 코너를 만드는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심리적 압박감에 제 발로 걸어 나오기도

6년째 개그맨 공채를 준비하고 있는 박성광씨(26)·박영진씨(26)도 이제 8부 능선에 오른 ‘준 개그맨’들이다. 7월 중순에 방송된 <개그사냥>에서는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룬 ‘동화중계석’ 코너가 심사위원들로부터 ‘베스트 개그’로 꼽혔다.

동아방송대 동기인 두 사람은 개그 동아리 ‘중독자’ 생활을 시작으로 2년 동안 대학로 소극장 생활을 했다. 대학로의 거의 모든 소극장 무대에 서보았다. ‘얼굴에 철판 깔기’ 훈련으로 지하철에 무작정 들어가 두 사람이 개그를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대학로 자취방에서 함께 지낸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인터넷을 보려면 근처 TTL존 같은 무료PC방을 이용할 정도로 생활이 빠듯하지만, 대학로를 떠날 생각이 없다. “방송에서는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면 작가들이 도와준다. 그 전에는 대본없이 두 사람이 연습해서 했는데. 이제 프로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개그맨으로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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