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라틴아메리카!
  • 안철흥 기자 · 서수란 인턴기자 (ahn@sisapress.com)
  • 승인 2006.07.28 14: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머나먼 남미 대륙을 찾는 한국인이 빠르게 늘고 있다. 눈동자를 뒤흔드는 풍경과, 심신을 울리는 삶과 음악…. 남미에는 ‘나’를 바꾸어놓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내딛던 순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변했다.” 국내에도 개봉했던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들은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떠나며, 어떤 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꿈꾸며 짐을 꾸린다. 어떤 여행이든, 떠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겁고, 설레고, 두려운 일이다. 여행은 가끔 여행자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게바라처럼.

 
지난 7월25일 저녁. 서울 종로의 한 술집에서 색다른 번개 모임이 열렸다. 정장을 갖춰 입은 회사원에서 가벼운 캐주얼 차림까지 행색이 다양하다. 세계 일주를 꿈꾸는 이들이 모여 있는 다음 카페 ‘5불생활자’ 회원 중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의 번개 모임이다. “부에나스 노체스.” 회원들이 도착할 때마다 이런 외침이 터졌다. 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다.

라틴아메리카를 8개월 동안 여행하고 최근 돌아온 김정훈씨(33·회사원)가 여행담을 늘어놓았다. “콜롬비아가 인상적이었죠. 특히 그곳 사람들의 친절에 반했어요. 그전까지는 게릴라와 마약 상인의 소굴로만 알았거든요. 여행을 안 갔다면 지금도 편견에 빠져 있겠죠.” 김씨의 말에 조현균씨(36·프리랜서 웹 개발자)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조씨는 조만간 라틴아메리카로 떠날 계획이다.

국내에서 배낭 여행 붐이 분 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배낭 여행 목적지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유럽과 미국이 인기 여행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배낭족들의 연륜이 쌓이면서 특별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늘었다. 얼마 전까지 배낭족 사이에서 인도 열풍이 불었으나 요즘은 라틴아메리카가 꿈의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페루 대사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페루를 찾은 한국인 여행객이 1만5천 명을 넘었다. 페루에는 잉카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를 비롯해 관광지가 상대적으로 많다. 칠레를 방문한 한국인 여행객은 페루보다 훨씬 적은 3천 명 수준. 하나투어가 제공하는 라틴아메리카 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이들은 한 해 평균 3백 명 정도다. 이 수치는 최근 수년 사이 급속히 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남북으로 1만3천km, 동서로 5천km에 달하는 거대한 대륙이다. 포르투칼어를 쓰는 브라질을 빼고는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또 대부분이 가톨릭교를 믿고 있고 풍속도 비슷해 동질감이 강하다. 남미의 음악과 춤, 자연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볼 때 지구 정반대쪽에 있는 이곳을 여행하기는 만만치 않다. 왕복 항공료만 최소 2백만원이 넘고, 건성건성 둘러보더라도 1개월 이상이 걸린다. 라틴아메리카는 특별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섣불리 덤빌 수 없는 여행지다. 이곳이 배낭족들의 마지막 코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꿈꾸는 이들은 대부분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철저히 준비한다. 다음 카페 ‘5불생활자’와 라틴아메리카 전문 여행사 ‘비바라틴’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아미고스’가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놀이터이자 정보의 보고로 통한다.

다음 카페 5불생활자에서 ‘미노’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김미정씨(32·방송작가). 그녀는 현재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가 특별히 고른 여행지는 브라질. 어린 시절 조제 마우로 데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매료되었다는 김씨는 “삶을 즐길 줄 알고 생동감 넘치는 라틴 사람들의 일상을 책으로 쓰고 싶다”라고 말했다. 여행 계획을 정리한 그녀의 수첩에는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100% 리얼 정보’들이 하나 둘 채워지고 있다.

 
김씨의 여행 이력은 꽤 다양하다.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김씨는 3년 전 갑자기 모든 것을 훌훌 털고 1년간 세계 일주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그녀는 터키의 매력에 빠져 7개월간 눌러앉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 240+1>을 썼다. 그때 이후 여행하고 책 쓰는 일이 그녀의 또 다른 일이 되었다. 김씨는 최근 아프리카 여행기 <컬러풀 아프리카 233+1>을 출간했다. “두 차례 긴 해외 여행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왕복 항공권을 끊은 적이 없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보고 느끼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게 진짜 여행이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4개월차 신혼 부부 권영준(31·회사원)․조보경(30) 씨에게 삶은 곧 여행이다. 이들은 3년 전 터키에서 처음 만났다. 따로 여행하던 둘은 이내 의기투합했고, 파키스탄과 인도를 함께 돌았다. 마침내 결혼까지 이른 이들이 다음 목적지로 선택한 곳이 라틴아메리카다. 결혼까지 한 젊은 직장인이 장기 해외 여행을 떠나기란 쉽지 않다. 이들 부부 역시 직장이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연애 시절부터 약속한 데다 아이가 생기면 힘들 것 같아서 결단을 내렸다. 권씨는 출국 전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다.

 
이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6개월간 버티기로 작정하고 뽑은 예산은 1천5백만원. 최대한 알뜰하게 계산했지만 만만치 않은 액수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은 여느 신혼 부부와 다르다. 결혼식을 최대한 단출하게 치렀고, 결혼 축의금은 여행 경비로 저축했다. 살림살이도 최소화했다. 임대 아파트를 얻었고, 가전 제품은 모두 중고로 장만했다. 장롱과 소파 등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아서, 옷가지들은 박스에 넣어 보관 중이다. 또 월급의 절반을 적금으로 붓고 있다. 권씨는 “금전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무엇보다 여행이라는 목표가 있기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다. 우리에게 여행은 삶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김미정씨와 권영준·조보경 부부가 ‘라틴 입문자’에 속한다면, 이원종씨(37·비바라틴 대표)는 이곳을 10년 동안 45회나 드나든 전문가다. 이씨는 ‘실수’로 남미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6년, 당시 대학생이던 이씨는 미국 여행 도중 여행 경비를 몽땅 분실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있던 그에게 배낭족 한 명이 다가 오더니 멕시코로 가라고 했다. 물가가 싸서 돈 없이 여행하기에는 제격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은 여행이 그의 인생을 아예 바꾸었다.

 
그는 여행 경험을 살려 라틴아메리카 전문 여행사 ‘비바라틴’을 운영하고 있다. 2000년 문을 연 비바라틴은 국내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전문 여행사다. 페루에 현지 지사가 있어서, 남미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씨는 비바라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아미고스’라는 이름의 커뮤니티를 개설해놓았다. “라틴아메리카요? 일단 ‘비바라틴’ 회원으로 가입하세요” 취재 도중 만난 배낭족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었다.

비바라틴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한 한국인은 지금까지 1천 명 정도다. 여행 사진작가 신미식씨(45)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지난해 페루와 볼리비아를 여행한 뒤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여행책을 냈고, 사진전을 열었다. 그가 경험한 라틴아메리카의 매력은 무엇일까. “인도가 자신의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행지라면, 라틴아메리카는 앞을 내다보게 하는 곳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자연을 접하면서 한없이 감탄사가 나왔다. 또 어디를 가든 개방적․역동적인 문화의 기운이 느껴져서, 마치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