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 개편 계약서’ 주객 뒤바뀌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7.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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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을 통해 서울 상륙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정계 개편의 중심 축으로 떠오른 민주당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갑을 전쟁’, 정치권에서 지난 7월26일 재보선의 성북을 지역구 선거를 표현하는 말이다. 성북을 선거구 투표 결과가 정계 개편 계약서에서 갑과 을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예상을 깨고 민주당 조순형 후보가 당선됨으로서 갑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을로 내려앉고, 을이었던 민주당이 갑으로 올라섰다는 평가다.
사실 재보선 이전 상황을 보면 민주당은 을에 가까웠다. 원내 제1당인 열린우리당(142석)의 10분의 1(11석)의 의석도 안 되는 소수당이었고 정동영 김근태와 같은 확실한 대선주자도 없는 불임정당이었다. 민주당이 정계개편의 축이 되기에는 입지가 너무 좁았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에서부터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광주 전남을 독식하고 전북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민주당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수도권에서는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조순형 후보의 당선으로 민주당은 고대해 마지않던 서울 상륙작전에 성공하게 된다.

서울 상륙을 위해 민주당은 말 그대로 성북을 선거에 ‘올인’ 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패배의 면죄부 찾기에 골몰한 동안 민주당 지도부는 전국에 소집령을 내렸다. 선거 캠프 관계자는 “지역에서 여성국장들이 대거 올라와서 전화 작업을 했다. 다른 캠프와 화력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전북도당위원장인 정균환 전 의원은 “전라북도 당원들이 모두 나서 성북을에 살고 있는 친구 친척을 설득하는 전화를 했다”라고 말했다.

전국 당원 동원해 총력전 끝에 승리

조순형 후보의 당선은 갑과 을의 관계를 확실하게 바꿔 놓았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열린우리당은 대권 숙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민주당은 숙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정계 개편의 축은 이제 민주당으로 넘어왔다”라고 평가했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가 민심의 흐름이 민주당에게 유리한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지난 총선에서는 수도권에서 우위에 있던 열린우리당이 그 여파로 호남에서도 우위를 보였지만 이제 호남에서 우위를 보이는 민주당이 수도권에서도 우위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거 운동기간 유세에 나선 손봉숙 의원은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과 우연히 마주쳤다. 손 의원은 염 의원에게 “어차피 합칠 텐데, 조재희 보구 그냥 사퇴하라구 그래. 날도 더운데 헛힘 쓰지 말고”라고 농을 쳤다. 유권자들의 사표심리를 자극하는 말이었는데, 한화갑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가 “열린당(열린우리당)은 어차피 없어질 당이다. 민주당을 찍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호남출신 유권자들, 합당 전제로 전략적 투표 

흥미로운 사실은 민주당의 이런 주장이 호남출신 유권자들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자신을 열린우리당 성북을 지구당의 대의원이라고 소개한 한 유권자는 “유권자들 머릿속에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이미 합당되어 있다. 주변의 열린우리당 당원들 보고 조순형 후보를 찍으라고 권하고 있다. 모두들 조 후보에게 전략적 투표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계 개편의 중심축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민주당 내부에 정계 개편을 할 수 있는 동력이 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민주당 내부에서도 회의적이다. 아직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열린우리당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서 의원들이 떨어져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도 의원들의 대이동이 당장 있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정계 개편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있는 민주당의 행보에 주목해볼 인물이 있다. 바로 국민중심당 이인제 의원이다. 선거운동기간 이 의원이 조순형 후보의 지원 유세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다시 서부벨트가 묶이는 것 아니냐? 신DJP연합이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 세력화해야 하는 국민중심당은 당분간 민주당과 함께 ‘반노 비한나라’ 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인제 의원의 한 측근은 “반노 비한나라 연대는 이인제 의원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이 의원 역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이 아닌 제3의 정치세력을 만드는데 관심이 많다”라고 말했다.

국민중심당과 연합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전력할 듯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이 보조를 맞출 다음 목표는 바로 함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민주당 12석과 국민중심당 5석을 합치면 17석이 된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3석이 모자란다. 민주당 측에서는 3석 확보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다. 유종필 대변인은 “여론 부담이 있겠지만 단체 행동을 하면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옮기면 철새라고 하지만 다섯명이 같이 옮기면 ‘독수리 5형제(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라고 부르지 않나”라고 말했다.

민주당 주도로 원내교섭단체가 구성될 경우 정치권에 큰 파장이 예상된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정계 개편은 설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먼저 행동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민주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경우 정계 개편에서 ‘선방’을 날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급부상과 관련해 다음으로 주목해볼 인물은 추미애 전 의원이다. 민주당 주가가 오르면서 추 전 의원의 주가도 덩달아 오르고 있다. 추 전 의원의 귀국과 관련해 갖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현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것이라는 설, 고건 전 총리가 ‘희망연대’ 공동대표로 추대할 것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주가 오른 추미애 전 의원, 곳곳에서 러브콜

애초 7월 말에 귀국할 예정이었던 추 전 의원은 개인적 사정에 의해 귀국이 조금 늦춰졌다. 갖은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추 전 의원은 당분간 독자 행보를 걸을 것으로 보인다. 추 전 의원의 한 측근은 “현실정치로 바로 뛰어들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핵 문제나 동북아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추 전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려 했던 민주당 역시 추 전 의원이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추 전 의원이 역할을 해줄 시점을 10월 재보선으로 보고 있다. 10월 재보선에서 수도권 지역에 출마해 민주당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

당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대선 후보 영입에도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는 독자적인 대권후보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강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당 후보가 없기 때문에 영입 후보에게 불리한 ‘어드밴티지 룰’이 특별히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지도부에서는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선 주자 영입과 관련해 최근 민주당에 나타난 기류 중의 하나는 ‘고건 짝사랑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더 이상 일편단심으로 고건 전 총리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대안으로 오르내리는 인물은 바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다.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에서 나오면 ‘제3지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건 전 총리에 대해서도 저자세 벗어나 

민주당은 이번 성북을 선거 결과로 고 전 총리와의 관계에서도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의원들 입장에서 민주당에 입당하는 것이 고건 전 총리 밑으로 가는 것보다 국회의원 배지를 유지하는데 유리하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종필 대변인은 “만약 고 전 총리가 대선에서 지면 동참한 의원들은 정주영 박찬종 이인제 정몽준과 함께 했던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 미아’가 될 것이다. 그런 모험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가 대선 후보 영입만큼 비중을 두는 일이 있다. 바로 18대 총선을 대비하는 일이다. 18대 총선에서 제1야당을 만들기 위한 세력 확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의 목표는 정권 탈환이다. 그러나 18대 총선도 봐야 한다. 대선에 풀베팅 하는 것보다는 이듬해 총선에서 탈 적금을 차곡차곡 부어 제1야당의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 앞으로 민주당 행보와 관련해서는 내년 대선보다 내후년 총선에 방점을 두고 역산하는 것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도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제 세력을 모으는 것인데, 유종필 대변인이 말한 ‘해불양수(海不讓水, 바다는 모든 물을 사양하지 않는다)’가 민주당의 방향을 대변한다. 민주당이 세력 규합에 나섰다는 것은 조순형 후보의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국민중심당 이인제 의원을 비롯해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 뉴라이트 김진홍 목사·유석춘 교수 등이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민주당은 앞으로 국민중심당, 열린우리당 일부, 한나라당 일부, 그리고 고건 전 총리를 아우르는 제 세력 규합의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다.

"바다는 모든 물을 사양하지 않는다"

이런 세력 규합에 있어서 ‘대마’는 바로 열린우리당이다. 애초 민주당에서는 열린우리당의 분화가 이루어져 민주당과의 통합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시점으로 올해 연말이나 내년 초를 예상했다. 그러나 재보선 선거 패배 충격으로 자중지란에 빠진 열린우리당이 대통령 탈당을 요구하는 등 계파 투쟁이 가열되면서 시간표가 당겨질 것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 분당 시간표에 맞춰 민주당의 시간표도 탄력적으로 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에게 이런 낙관적인 시나리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보면 갈등의 불씨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 대표와 공천자 신분이었던 한화갑 대표와 조순형 후보의 관계는 조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제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한 대표는 자칫 의원직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기지만 조 의원은 6선 의원으로 화려하게 컴백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역학관계가 180도로 바뀌는 것이다.

당 관계자들은 조순형 의원이 선거 과정에서 한 대표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만큼 쉽사리 반기를 들지는 못하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조순형 의원과 가까운 당의 한 관계자는 조만간 갈등이 표면화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두 진영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조순형 의원보다 조순형 의원 뒤를 볼 필요가 있다. 조순형 의원을 통해서 반한화갑파의 활동 공간이 넓어졌다. 앞으로 친 한화갑파와 반 한화갑파의 대회전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이런 당내 갈등을 봉합하고 내년 대선 과정에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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