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
  • 글 · 사진 허용선(여행 칼럼니스트) ()
  • 승인 2006.08.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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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열도 곳곳에 서화 · 시문 등 '자취' 생생 · · · 내년에 4백 주년 기념 행사

 
오는 2007년 조선통신사 4백 주년 기념 행사가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열릴 예정이다. 4백 주년 기념 행사를 앞두고,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좇아봤다. 조선통신사는 중세 시대 일본의 권력자인 바쿠후 장군을 만나러 간 조선 정부의 공식 사절단이다. 1404년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수백 년 동안 수차례 이어진 조선통신사 여행은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크게 공헌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들의 환영은 성대했다.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한 해 예산에 맞먹는 돈을 지출하며 통신사 일행을 맞이했다. 통신사 일행과 일본측의 경호 및 접대 요원까지 합친 규모는 1천5백 명 가까이 되었다. 당시 통신사 일행이 여장을 풀 섬에서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섬이 바다 밑으로 잠긴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일본측에서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새로운 대륙 문화와 신기술을 배우기 원했다. 따라서 사절단은 의사·공무원·유학자·목공·침사(옷 기술) 등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과 학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일본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많은 것을 배우려고 했다. 김지남의 <동사일록>에는 ‘시와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 때문에 가는 곳마다 견딜 수 없었다. 접대 책임자와 심지어는 말을 돌보며 심부름하는 일본인, 유학자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종이와 벼루를 가지고 와서 날마다 글과 글씨를 요구했다’라고 적혀 있다.

 
사절단이 한양을 떠나 다시 돌아올 때까지 평균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사절단은 대마도, 시모노세키, 가미노세키, 도모노우라, 우시마도, 교토와 에도(도쿄) 등을 방문했다. 일본측의 요청이 있을 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소가 있는 닛코까지 가기도 했다. 조선통신사는 방문하는 곳마다 아름다운 조선 도자기·서화·시문 등을 남겼고, 일본인들은 화려한 행렬도를 병풍이나 판화로 그렸다. 조선통신사의 자취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시마도·도모노우라·가시모카마가리·가미노세키 섬 등에서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우시마도는 강풍이 불어도 해수면이 잔잔한 천혜의 항구 도시이다. 이곳 해유문화관에는 조선통신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통신사 일행이 타고 온 배를 일본인들이 본떠 만든 모형, 사절단 의상, 행렬도, 어린 소녀의 춤 공연 모습 등이 꼼꼼하게 전시되어 있다. 부근에 있는 혼렌지는 당시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던 아담한 규모의 사찰이다. 안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선물로 준 도자기와 현지 소감을 담은 서예 작품이 걸려 있다. 글 중에는 ‘모기가 너무 많아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재미난 글귀도 있다. 우시마도에는 조선통신사를 따라온 소녀들이 추었다는 ‘가라코 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도모노우라 섬에 조선 태종의 글씨도 남아

시모카마가리 섬에는 쇼토엔이라는 이름난 정원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통신사가 타고 온 배를 과학적으로 연구해 만든 모형이 전시되어 있고 사절단의 옷, 음식, 행렬도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사절단 일행에게 대접한 음식상도 볼 수 있는데 한 끼 식사마다 세종류 국과 15가지 반찬이 나왔다고 한다. 시모카마가리 섬에는 조선통신사 기념공원 및 통신사 일행이 기항한 선착장, 당시 경찰들이 있던 곳 등이 자리한다.
도모노우라의 ‘후쿠젠지 타이초로’라는 절에는 태종(조선 제3대 왕)이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왔을 때 직접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후쿠젠지 타이초로의 일출 모습에 반한 태종은 ‘동일본 제일의 경치’라는 글씨를 현판에 새겼다. 이 절 부근에 있는 역사민족자료관에는 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를 많다. 이곳은 ‘조선통신사’라는 비디오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상영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한·일 양국의 우호 증진에 기여했던 조선통신사 여행은 18세기 중반에 끝났다. 이 무렵부터 일본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며 조선통신사를 비하하는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 통신사 일행이 올 때 부담하는 막대한 접대비를 문제 삼아 초청 인원과 절차를 축소시켰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에서도 더 이상 파견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한·일 문화 교류의 첨병 구실을 했던 조선통신사의 뜻을 살려 교류를 늘리려는 노력들이 최근 다양한 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동북아 긴장이 갈수록 높아져 가는 이때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조선통신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통신사 자료는 일본 국제관광진흥기구(JNTO) , www.welcometojapan.or.kr에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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