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알코올 전쟁 벌이다
  • 모스크바 · 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6.08.1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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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술 판매 현황 꿰뚫는 새 제도 강행…주류 업자들 ‘파업’ 등 강력 반발

 
'연인 없이는 살아도, 보드카 없이는 못 산다’는 러시아인. 그들은 정말 술을 좋아한다. 중국인이 마오타이주(茅臺酒)의 부드러움을 자랑하면, 러시아인은 즉각 보드카(‘사랑스러운 물’이란 뜻)의 깨끗함을 뽐낸다. 그런 러시아 국민이 요즘 술에 굶주리고 있다. 알코올 전쟁이 터져 술 구하기가 어려워진 까닭이다. 논쟁이 가열된 와중에 대선 전초전이 시작되었다는 관측도 나돈다.

술 전쟁 하면,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가 언뜻 떠오른다. 그는 1985년 ‘주류 판매 금지’ 캠페인을 펼쳤다. 고르비 캠페인은 보드카에 마냥 취한 시민들이 도통 일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취해진 불가피한 조처였다. ‘사회주의는 술로 망했다’라는 말이 회자(膾炙)할 정도로 술은 소련 사회의 암적 존재였다.

그러나 이번 술 전쟁은 그때 상황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신종 알코올 전쟁은 주류 판매를 둘러싸고 정부와 주류 업자 간에 벌어진 주도권 싸움이다. 좀더 자본주의적인 알코올 전쟁이다.
지난 7월 말 러시아 주류 판매상들은 집단 파업을 선언했다. 람스토르·페레크로스토크·시지모이커티넨트 등 대형 매장에는 보드카·코냑· 포도주·맥주·위스키 등 일체의 알코올 음료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아예 진열대에서 술을 치워버린 상점도 있다. 일간지 ‘가지에타’에 따르면, 모스크바 1만5천 매장 중 9천여 곳이 주류 파업에 동참했고, 일파만파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문제의 발단은 7월1일부터 시행된 ‘주류유통에 관한’ 법(제102조)이다. 일명 ‘주류·판매·통합 전산망·시스템(EGAIS)’은 모든 주류에 새 인지를 붙여 판매 현황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새 법안에 따라서 연방세무국(FNS)은 주류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모든 정보를 관리하게 되었다. 주류 유통의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주류에 부착하는 새 인지는 정교하게 도안되어 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바코드에 홀로그램까지 넣어 만든 새 인지는 러시아 주류 시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이 확실하다. 즉 정부가 주류 시장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는 셈이다.

주류 업계는 새 제도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정부가 엉뚱한 제도를 도입해서 주류 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주류업을 고사시키려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주류협회 표트르 카늬긴 회장은 “주류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고, 조만간 주류 회사 중 20%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주류협회는 ‘새 제도를 당장 철회하지 않을 경우, 9월부터는 진짜 술은 구경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며 미하일 프라드코프 러시아 총리를 압박했다.

시민들, 정부 시책 적극 지지

정부가 예정을 앞당겨 이 제도를 강력하게 밀어 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초 내년에 시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짜 보드카의 생산과 유통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지난 6월 초부터 국산 및 수입 주류를 조사해온 ‘러시아·소비·감시국’ 위생의(醫) 게나디 아니셴코 씨는 한 달 반 사이 모스크바와 근교 도시에서 유통된 가짜 보드카가 자그마치 14만2천ℓ에 이른다고 밝혔다.
새 ‘주류 유통법’ 입법에 관여한 두마(하원) 경제분과위원회 의장 발레리 두라간노프는 법안을 도입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국민 건강을 지키겠다는 것. 매년 술로 숨지는 시민 7만(일반 통계는 4만명)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얘기다. 생명을 앗아가는 주범은 물론 2억5천ℓ의 가짜 술. 다음은 탈세를 근절하고 국세를 착실히 걷겠다는 것. 주류 유통의 투명화로 불법 거래를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전문가들은 판매 주류의 50~70%가 불법 거래된 상품이라고 추정한다. 불법 거래는 지방에서 더욱 심각하다. 일례로 오렌부르크 지방에서 판매되는 술은 99%가 불법 유통된 것이다.

 
두라간노프 의장은 획기적인 의견도 내놓았다. 그동안 금지해왔던 사마곤(알코올농도 70%의 독한 밀주)을 허용하자는 제안이다. 판매는 금지하되, 가정용으로는 허용하자는 것. 사실상 비싼 보드카는 서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고, 싸구려 보드카는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연유로 지방에서는 사마곤을 담아 먹는 가정이 많고, 또 이를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결국 무용지물에 불과한 ‘밀주 금지법’을 현실화하자는 제안이다.
이번 술 사태를 2008년 대선과 연관 짓는 언론도 있다. 러시아의 굵직한 인터넷 회사 ‘램블러·매스·미디어’는 사태의 중심에 게나디 아니셴코가 있다고 본다. 그는 ‘조류 독감’ 문제로 언론에서 유명해진 이후 푸틴 대통령의 신임을 샀고 대권 후보 명단에도 올랐다. 이른바 크렘린의 의중을 꿰뚫은 그가 주류업을 장악하는 역할로 푸틴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하고 동시에 대중적 인기를 끌어 모아 차기 대권을 노린다는 논리다.
지금까지 주류업은 권력의 통제권을 벗어난 절대 성역이었다. 익명의 한 주류 업자는 “소련 붕괴 이후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 출신의 주류 수입업자들과 국내 술 제조업자들은 관리들과 결탁해서 떼돈을 챙겼고, 챙긴 돈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이제는 손댈 수 없는 아성을 쌓았다”라고 주장했다. 상황 논리로 볼 때 아니셴코가 이런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데 총대를 맸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 하나가 나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단 ‘여론’의 지원을 받아 사회학자들이 ‘가상 투표’를 실시했는데, 예상외로 게나디 아니셴고가 전폭적인 지지율(51%)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 뒤를 게나디 쥬가노프 공산당 당수(6%), 지르노프스키 자유민주당 대표(5%), 쇼이구 비상대책부 장관과 드미트리 메드베제예프 부총리(2%), 세르게이 이바노프 부총리(1%) 등 이었는데, 득표율이 미미했다.
이 통계 자료는 새로 시행된 ‘주류 유통법’이 시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간지 ‘우트로(아침)’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구매자의 23%가 중대 문제라 생각한 반면, 46%가 사소한 문제라고 응답했다. 이는 부당한 방법으로 떼돈을 벌고 있는 노브만(신흥 졸부)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과 더불어 고유가로 풍족해진 경제 덕분에 건강 제일주의로 돌아선 시민 의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새 제도를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사회국 회원인 그리고리 톰친은 술의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한편, 시장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가 경제의 흐름을 막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또 제도의 현실적 문제점도 제기되었다. 인터넷 후진국 러시아에서 컴퓨터 전산망을 이용해 주류 유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과연 충분하냐는 의문이다. 사실상 새 제도가 도입된 이후 판매 실적을 보고하는 중간에 전산망이 마비된 경우가 허다하다고 업자들은 불평하고 있다.
에너지에 이어 술까지 장악한 크렘린의 다음 표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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