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주자들, 재미 교포 쟁탈전
  • 워싱턴.뉴욕.LA/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8.1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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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다투어 미국 방문, 재미 후원회 구성확대 전쟁... 교포 1세대, 지연.학연 따라 분열
정치권이 여름 휴가를 맞았다. 여의도가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휴가에 국민이 잠시 고치 아픈 정치를 잊고 지내낸는 동안, 재미 교포들은 한국 정치인들 때문에 더욱 바쁘게 생겼다. 외유를 떠난 의원 상당수가 미국행을 택한 데다가, 여야 대권 주자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기니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애틀랜타올림픽 선수단을 격려하러 미국을 다녀온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민감한 발언을 함으로써 여야로부터 경계의 눈총을 받았다.

최형우 의원은 공화당 대권 호보 봅 돌 의원 초청을 받아 공화당 전당대회를 둘러보고 있다. 공식 일정이 끝나면 최의원은 마이크로소프트사 빌게이츠 회장과 넷스케이프사 마크 앤드리슨 사장을 각각 만나기로 했다. 국민에게 정보화 시대를 준비하는 지도자상을 보이겠다는 계산이다.

홍보용 사진 찍을 절호의 기회
그런가 하면 김덕룡 정무장관은 8월에만 두 차례 미국을 방문하는 셈이다. 8월5일 휴가 때 알래스카에서 가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를 만난 김장관은, 민주당 공식 초청으로 22일부터 전당대회를 둘러본다. 그는 이때 앨 고어 부통령과 면담할 계획이고, 이후 뉴욕에 들러 미주 한인상공인 대표자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8월1일 계보 의원들을 이끌고 백두산 산행에 나섰다가 11일 귀국한 김윤환 의원도 이 달 말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하러 미국에 간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를 예정이다. 총선 이후 ‘대권주자의 배낭 여행’이라는 독특한 행보를 걸어온 박찬종 신한국당 고문은 여행 삼아 9월 초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대권 도전 선언 이후 사사건건 DJ와 대립해온 국민회의 김상현 지도위 의장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 기조연설과 휴가를 위해 8월말 워싱턴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민주당 이기택 총재는 올 여름 여야 정치 지도자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어디 그뿐인가. 9월 초 중남미 5개국을 순방하는 김영삼 대통령은 귀국길에 보스턴에 들러,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개혁’을 주제로 강연한다. 대통령을 포함해서 올 여름 미국을 방문하는 여야 정치 지도자 수행 의원까지 합하면, 한국 정치가 여의도를 벗어나 미국 땅에서 재연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여름 휴가철 정치 지도자들의 미국 방문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중견 정치인들이 이처럼 한꺼번에 몰리듯이 미국 땅을 밟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물론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의 양대 정당 전당대회라는 이벤트가 있기는 하다. 운만 좋으면 선진 정치 현장에서 미국의 내로라 하는 정치 지도자들과 그럴싸한 홍보용 사진 몇 장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이유 때문만일까. 미국을 방문한 국내 정치인들의 코스는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공식 일정 앞뒤로, 또는 공식 일정 사이사이 교포 모임이 줄지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에 있는 심복이 나서서 교통 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불려다니다 파김치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이런 현상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교포 사회에 인맥을 만들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니, 누가 초청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행사를 만들어서라도 가야 할 판이다. 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면 해외 후원회 조직, 특히 재미 교포 후원회 조직은 ‘필수 품목’이니까.

국내 정치인 중에 가장 탄탄한 재미 교포 조직을 가진 DJ측을 보자. “선거 대만 되면 아예 전화통을 붙잡고 삽니다. 부동표 성향의 지인들에게 우리 당을 찍으라고 선거운동을 하는 거죠. 아마 웬만한 봉급쟁이 한달 월급 정도는 국제 전화비로 날아갈 겁니다. 사정이 허락하면 직접 본국에 들어가서 뛰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DJ의 미국 조직인 인권문제연구소 뉴욕 지부 전․현직 회장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이들의 말에 다르면, 한국내 지인들에게 재미 교포의 권유는 상당히 잘 먹힌다고 한다. 미국 인권문제연구소는 지난 총선때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선거 관련 여론조사를 벌여 총재에게 보고하다가, 당료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DJ를 위해서라면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당 이기택 총재가 8월5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다. 이총재를 맞이한 사람들은 미주 통일산하회 샌프란시스코 지부 회원 20여 명. 이총재의 사조직인 통일산하회 미주 지부는 한동안 해산 상태였는데, 최근 조직 복구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총재는 주로 영남 출신 교포 YS인맥 일부를 자기 조직으로 흡수해 왔다. 이날 공항에 나온 샌프란시스코 조직 책임자는 “내년 대선에서 뛰려면 지금부터 조직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군소 정당 총재지만, 국내 정치 진입에 뜻을 둔 교포들에게는 KT가 정치에 입문한 기회를 줄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김대중 김덕룡 김상현 김윤환 김종필 박찬종 박철언 서석재 이기택 정대철 최형우.... 교포 후원 조직을 비교적 활발하게 K동하는 중견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이들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초선 의원들까지 재미 교포 후원 조직을 만드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최형우.김덕룡 의원과 두루 친하다는 한 교포 인사의 전언, “지난해 한 신한국당 초선 의원이 내게 찾아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상의하더군요. 교포 후원회를 만들어 줄 수 없느냐는 겁니다.”

지난 8월1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DJ와 JP를 정면 공격함으로써 갑자기 뉴스 메이커로 떠오른 신한국당 이신범 의원이, 로스앤젤레스 한인 식당에서 후원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이의원은 80년대 중반 5년여 미국에서 반독재운동을 해서 지인이 많다). 야당 총재들과 치른 일전을 치하하는 말이 오가고 술잔이 몇 순배 돌 때쯤해서, 고등학교 동기라는 한 참석자가 소리를 질렀다. “너, 대통령 생각 없으면 안 밀어줘!” 서울의 어느 동창회 모임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재미 교포 1세들이 한인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이런 현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당 합당 직전까지만 해도 교포 사회는 YS와 DJ를 지원하는 야당 세력과 친정부 인사로 구성된 여당 세력이 확연하게 갈라져서, 서로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YS가 3당 합당을 결행하고 집권함으로써 교포 사회에서도 더 이상 여야의 구분은 사라졌다. 정치 쟁점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인 방송들, 총선 개표 중계 방송
그렇다고 오직 본국의 정치 동향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던 교포 1세들이 어느날 갑자기 본국에 대한 관심을 끊고, 미국의 정치에 열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교포 1세대들의 촉각은 여전히 본국을 향해서만 열려 있다. 교포들이 흔히 하는 말로 ‘우리 주 지사와 상언 의원 이름은 몰라도, 지난 총선에서 내 고향 국회의원으로 누가 몇 표 차이로 당선됐는지 훤히 꿰고 있는’ 현상이 여전히 벌어지는 것이다. 지난 총선 때 미국 주요 도시에 있는 한인 방송들은 아예 개표 중계 방송을 하기도 했다.

물론 94년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이후 교포사회에서도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과거 반독재운동 세력들이 이제는 이민자 권리운동이나 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22․26쪽 기사 참조).

그러나 한편에서는 과거 여야로 갈라져서 대립할 때보다 더 천박한 양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금은 DJ와 결별했지만 DJ의 망명 시절 측근이었던 워싱턴의 심기섭씨는 “서로가 모시는 정치인이 본국에서 사이가 안 좋아지면, 그동안 잘 지내던 교포들끼리 괜히 치고박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전한다. 심씨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특히 3당 합당 이후에 도드라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후원회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지연이나 학연을 딸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국 저치에만 지대한 관심을 쏟는 교포들에게, 중견 정치인 특히 여권 실세와 가깝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권력’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은 교포 사회에서 행세할 수 있는 간판(비록 교포들끼리이기는 하지만 미국 땅에서 정치행위를 하는 일종의 대리 만족일 수도 있다)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것이 아니면 최소한 사업적 목적이든 나중에 국내 정치에 진입하려는 목적이든 본국에 ‘든든한 배경’을 만들어두는 일종의 투자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 실세가 미국을 방문할 때면, 지인들끼리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얼마전 최형우 의원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교포 한 사람이 전담해 마크하는 바람에 최의원을 잘 아는 인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나온 일화는 그 바닥에서 유명한 일이다.

교포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이니, 바야흐로 한국의 차기 대권 경쟁에 대해 온갖 소문과 제 나름의 분석이 범람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올 여름에는 차기 대권 주자들이 제발로 미국을 방문해서 교포 사회를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97년 대권 경쟁은 미국 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예를 들면 DJ이 미국 사조직인 인권문제연구소는 조직의 96년 첫째 목표를 ‘내년 선거를 위한 대비’라고 못박았다. 이 연구소는 이를 위해 교포 사회 및 미국 요로의 어피니언 리더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직 확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과거 YS 인맥들도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 있다. 요컨대 민주계인 최형우 의원과 김덕룡 장관 중에 과연 누구를 지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뉴욕의 YS 인맥인 홍종학씨(부동산업)는 “우리들 처지에 매우 난처하다. 두 양반이 힘을 합치면 좋은데, 혹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분열하는게 아닌지 걱정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투표권도 없고 지금 동원력 면에서도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재미 교포가, 도대체 한국 정치인들에게 무슨 효용이 있기에 앞다투어 교포 후원회를 조직하고 공을 들이는 것일까. 한 교포 인사는, 자신의 정치적 무게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액세서리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애기다.

제2의 김혁규.유종근을 꿈꾸는 사람들
그러나 지난해 지방 선거 때 뉴욕 한인들의 ‘모델 케이스’로 곱혔던 김혁규 경남지사와 유종근 전북지사의 최근 성과를 보면 애기는 달라진다. 현재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잘 살린 ‘세일즈 지사’로 유명하다. 전라북도와 뉴욕한인회는 올 여름 자녀 교환 방문을 실시했다. 이 사업에 막후에서 움직인 재미 교포들은 한때 유지사와 함께 활동했던 DJ 인맥들이다. 김혁규 지사도 마찬가지이다. 김지사 역시 YS 인맥인 김동빈씨(평통회장)를 경남무역 뉴욕지사장으로 임명해서, 자치단체의 해외 진출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교포 인맥을 정치 자산으로 활용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직 드문 예다. 미국 정치 지도자나 빌 게이츠 같은 유명 인사들과의 면담을 주선하는 거간으로라도 자신의 교포 인맥을 가동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물론 그것 역시 국가이익을 위한 의원 외교하고는 거리가 멀다.

국내 정치인과 교포와의 관계가 국가 이익을 향한 쪽으로 개선되려면 두 가지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학연과 지연으로 편을 가르는 국내의 정치 풍토가 바뀌어야 하고, 교포 방송이 한국의 선거 개표 상황을 중계 방송하는 시대가 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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