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김대중 ‘홈 그라운드’
  • 워싱턴.뉴욕.LA/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8.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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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김의 교포 인맥/DJ 그룹, 조직.활동 압도적.... YS측은 개인 인연 중심

 
국내 정치권의 눈으로 볼 때 미국은 ‘김대중의 홈 그라운드’나 마찬가지다. 재미 교포 사회에서 YS 인맥은 규모와 조직면에서 DJ 인맥에게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미국내 DJ 인맥이 주로 호남 출신 인사들만 북적대는 수준으로 축소되었지만, 한때 미국내 반독재 운동 세력은 사실상 DJ가 평정하다시피 했다.

 DJ의 40년 정치 이력에서 재미 교포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DJ가 재미 교포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유신 선포 이후 그가 미국과 일본을 떠돌면서 해외 반독재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그가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운동연합’ (민통연합)을 조직한 직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그 즉시 이 단체는 미.일 양국에서 ‘김대중 구명위원회’로 성격을 바꾸었고, 이를 계기로 생면 부지의 교포 청년들과 DJ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김대중 구명운동은 그때까지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재미 교포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악관 앞에서 교포들이 한국의 정치 문제를 쟁점으로 집회를 갖고, 그것이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에 보도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포들로서는 미국 땅에서 처음 겪는 정치 체험이었다.

 미국에서 김대중 구명위원회는 두 번 발족했다. 모두 민통연합 회원들로 구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 발족은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신군부가 DJ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직후이다. 당시 김대중 구명운동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던 인물들이, 미국에서의 반독재운동시조 격인 김재준 목사(한신대 창립자)․송정률 목사(국민회의 인천 부평 갑 송선근 위원장은 송목사의 아들)․전 주미 공보관장 이재현 박사.주미 외교관 출신 이근팔(이씨는 DJ 미국 망명 때 초대 비서실장).구명위 위원장 심기섭․김웅태 씨 등이다
 교포 사회에 동교동 가신 그룹에 버금가는 조직과 인맥이 형성된 것은 82년 DJ가 미국에 망명한 이후부터이다. 당시 DJ는 교포들에게 ‘골고다 언덕에서 수난 받고 온 예수’처럼 비쳤고, 미국 정계에서도 필리핀의 망명 정치 지도자 아키노와 함께 ‘민주주의 화신’으로 불렸다. 따라서 미국내 반독재운동 세력이 DJ중심으로 뭉칭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여한튼 당시 재미 반독재 세력은 DJ의 망명을 계기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국내 재야 명망가들인 이신범씨(현 신한국당 의원).문도환 목사.서경석씨(현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이우재씨(현 신한구당 의원).한완상씨(현 한국방송통신대학 총장), 그리고 광주항쟁의 상징인 윤한봉씨의 미국 망명도 한몫했다.

 
 
그러나 DJ는 망명 기간에 이근팔씨가 개인적으로 유지하던 자신의 워싱턴 사무실을 확대 개편하면서, 미국 주요 도시에에 사조직은 인권문제연구소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인권문제연구소 출범은 미국내 DJ 인맥의 세대 교체 또는 물갈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부터 재미 교포 사회에 새로운 ‘DJ 맨’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정동채 비서실장과 박지원 기조실장, 김경재 의원, 유종근 전북도지사 등이 당시 DJ의 츠근 그룹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이 당시 형성된 인권문제연구소 조직과 인맥은 지금도 미국에서 DJ의 집권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5월 박철언 의원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DJ 미국 인맥 관리의 사령탑 격인 이영작 현 인권문제연구소 소장(워싱턴 소재․이희호 여사의 조카) 등 주요 인사들이 모임에 참석한 것도 이들이 국내 정치 흐름과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려서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올여름 무릎 수술을 위해 예정됐던 DJ의 미국 방문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엘 고어 부통령․빌 게이츠․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이들도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DJ 사람들이다

YS 인맥, 국내 들어와 요직 맡아
 현재 국민회의 대변인실이 각 언론사에 보내는 각종 성명과 소식들은, 미국내 13개 인권문제연구소 지부에도 동시에 전송된다. 인권문제연구소 안병선 뉴욕지부 회장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정치권 뒷애기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기 때문에, 국내 정치권 동향에 관한 한 우리에게 문의하는 교포가 많다”라고 말한다. 안씨는 93년부터 김대중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하려다가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는 바람에 중단하기도 했다.

 교포 사회에서 DJ의 인맥이 이처럼 조직적이고 운동적인 접근을 했다면, YS의 인맥은 개인적인 인연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미국내 YS 인맥을 애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은 신한국당 부대변인 출신 임정규씨(현 동남공단 이사장)이다. 임씨는 72년 YS의 사조직인 한국문제연구소로 정치에 입문한 가신 그룹 1세대이다. 그러나 그는 유신 직후 연구소가 문을 닫자,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야당 총재 YS의 첫 해외 비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재미 반독재운동사에서 임씨는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뉴욕을 활동 근거지로 삼은 임씨는 생계를 내팽개친 채 거의 모든 교포 모임에 참석하는 ‘유일한 YS 맨’으로 통했다. 그러나 임씨뿐이었다. 물론 70년대 YS가 신민당 총재로서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각 도시 별로 행사와 안내를 책임진 인물들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내 YS 인맥을 싹을 틔우지 못했다.

 미국에서 YS 인맥이 그나마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83년 YS가 단식 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미국에서 ‘한국민주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던 임씨는, 이때 뉴욕에서 단식대책위원회를 결성해서 동조 단식을 하는 등 YS의 단식 투쟁을 교포 사회와 미국 언론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임씨와 함께 한국민주회의 공동 의장을 지낸 인물들이 워싱턴의 김석남씨와 필라델피아의 방무성씨(현 민주당 포항 북구 지구당위원장)이다. 임씨는 이때의 공로를 인정 받아 87년 YS의 해외 담당 특보가 되었고, 92년 대선에서는 나사본 해외사업단장을 맡아 10개국 교포 인맥을 집중 관리했다.

 임씨말고 뉴욕의 YS 인맥으로 꼽히는 대표적 인물은 김혁규 현 경남도지사이다. 박지원 국민회의 기조실장과 함께 교포 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한 김지사는 YS가 뉴욕을 방문할 때 눈에 들어 중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국내 정치권 진입에 성공한 인물들은 샌프란시스코 'YS 3인방‘인 노승우․김충일 의원과 허 건씨(현 최형우 의원 보좌역) 등이 있다. 이들이 YS와 첫 대변은 한 것은 75년 YS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이지만, 이들의 정치권 진입을 뒷받침해 준 이는 최형우 의원이다.

 5공 회유와 압박에 시달리던 최의원은 83년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대학에서 6개월간 도피 유학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이들이 최의원의 뒤를 돌보아 줌으로써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현재 미국내 YS 인맥이 대체로 ‘최형우계’로 분류되는 까닭은 최의원은 짧은 미국 생활 동안 형성된 인간 관계에 기인한다.

 양김이 전쟁을 미국 당에서 재연했던 양김의 인맥은 92년 대선을 끝으로 교포 사회에서 사실상 간판을 내렸다. DJ 인맥은 분루를 삼켰고, YS 인맥은 대부분 국내에 진입해 청와대와 신한국당 또는 재벌 그룹 고문 직을 맡아 승리를 구가했다. 이제 97년 대선을 앞두고 DJ계는 조직 정비 작업에 돌입해 있고, 미국에 남아 있는 YS 인맥은 신한국당 차기 주자들의 대권 경쟁 레이스를 민감하게 지켜보고 있다. 특히 YS 인맥의 관심은 신한국당 차기 후보 자리를 과연 민주계가 차지하느냐에 쏠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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