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멜로 드라마 반갑다, 장르 드라마
  • 박현정 (드라마틱 편집장)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8.2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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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들, 사랑 타령 줄이고 수사물 공포물 잇달아 방영

 
몇 달 전 방송문화진흥회가 연 비평 세미나의 토론 주제는 ‘시청자, 멜로에 지치다’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지칠 법도 한 것이, 조사에 따르면 최근 한국 드라마를 구성하는 소재의 70% 이상이 멜로라고 한다. 나머지 30%도 대부분이 사극이라는 사실을 볼 때, 사실상 멜로 드라마가 우리 드라마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0%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 드라마 왜 넘쳐났을까

<CSI>나 <춤추는 대수사선>과 같이 완성도 높은 미국, 일본 등의 장르 드라마를 접한 시청자들은 도대체 왜 한국 드라마는 허구한 날 사랑 타령뿐이냐고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사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에도 엄연히 장르 드라마들은 존재했다.

누구나 기억하는 손쉬운 예만 들어보아도, 일단 1971년부터 1989년까지, 자그마치 18년 동안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수사반장>이 있다. 시리즈를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범죄를 통해 20여 년간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온 식구들을 한 이불 속에 밀어넣고 떨게 했던 <전설의 고향> 역시 정통 호러물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가 하면 인민군 병사가 죽을 때마다 “오마니!”를 외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쟁 드라마 <전우>. 이 역시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엄연한 전쟁물이다. 70~80년대를 지나서 당장 90년대만 보아도, 심은하 주연의 <M>, 배두나 주연의 <R.N.A> 등이 인기를 끌었고, 여름이면 <신 전설의 고향> 등 납량 특집 드라마가 꼬박꼬박 제작되어 안방을 찾아오곤 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우리 드라마계가 멜로 일색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물론 그 답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 논리 때문이다. 최수종·최진실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미니 시리즈 <질투>를 비롯하여 90년대 등장한 트렌디 드라마의 커다란 성공은 이후 드라마계로 몰리는 자본의 절대 다수를 트렌디한 멜로 드라마의 제작에 치우치도록 만들었고, 또한 <사랑이 뭐길래>에서의 성공으로 크게 부각된 PPL(간접 광고)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그 추세를 더더욱 강화했다(사실 <전설의 고향>이나 <전우>에 제품 PPL을 삽입하는 것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장르 드라마 행보, MBC가 가장 빨라

드라마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광고를 아주 효과적·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소비를 주도하게 된 상황은, 드라마 제작 현장으로의 투자가 활발해지도록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모인 자본이 오로지 대박을 노리는 트렌디 멜로 드라마 일색으로 흐르게 했다는 점에서는 장르 드라마가 더욱 도태되는 환경을 야기했다. 특히 장르 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톱 스타나 화려한 ‘때깔’을 자랑할 수 있게 해주는 해외 로케이션, PPL과 결합한 사치스러운 소품과 배경이 아니라, 오로지 튼튼한 작가진에 의해 구축된 대본과 완성도 있는 만듦새가 긴요하다. 그런데 사실 후자를 만족시키기란 당연한 것이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투자 아래 제작되는 미국의 장르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면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을 만족시킬 만한 양질의 대본을 낸다는 것이 일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특수 효과나 컴퓨터 그래픽(CG) 촬영 등에 들어갈 제작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미국처럼 수십 명이 한 팀이 되는 작가진을 키워내는 데는 당장 한두 해 안에 해결되지 않는, 오랜 세월에 걸친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시청자들의 요구나 비판을 제작진이나 작가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그들 스스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한 개인의 의욕이나 의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산이 아닌, 시스템 차원의 복잡한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사극들은 ‘퓨전 사극’이라는 이름 아래 장르적인 성격을 시도한다. <대장금>과 <허준>은 아쉬운 점은 있으나 충분히, 전문가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현대로 왔을 때 까다로운 현실적·과학적 고증을 피해, 상대적으로 좀더 쉬울 수 있는 (학자들조차도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기에) 역사적 고증을 큰 무리 없이 소화해냈으며 극본의 완성도와 재미까지 성취하여 시청률 면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낳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본과 톱 스타가 투입된 멜로 드라마들이 연달아 실패하거나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장르 드라마에 도전하는 움직임은 점차 탄력을 알기 시작한다. 최근 대중음악계를 소재로 한 <오버 더 레인보우>도 멜로물에 전문 분야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구태의연한 성격을 벗어보려 한 점이 눈에 띄며 (한편으로는 대중음악계의 영역 확장이기도 하지만), <궁> 역시 부분적인 요소일 뿐이지만 대체 역사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경계 장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올 여름, 드디어 각 방송사가 그간 준비해온 본격적인 장르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르 드라마는 성격파 배우를 위한 ‘마당’

베스트극장에서 <가리봉 오션스 일레븐> 등 장르적 성격의 단막극을 꾸준히 선보여왔던 MBC의 행보가 가장 빨랐다. 지난해와 올해 초, 추리 다큐라는 형식의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으로 장르물 시리즈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타진해보았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비록 정규 프로그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열렬한 마니아들을 낳았고, 악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시도로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MBC는 4부작으로 <도로시를 찾아라>를 방영했고, 케이블 채널인 OCN도 자체 제작한 공포물 <코마>를 방영 중이다. KBS는 오는 9월 중순 <특수수사일지:1호관 사건>을 방영할 예정이고, SBS가 7월 극장 개봉 후 8월 중순 방영을 시작한 공포물 <어느 날 갑자기>(2월29일/ 네번째 층/ D-Day/ 죽음의 숲/ 4부작)도 점점 흥미를 고조하고 있다.

 
장르 드라마라는 영역이 개척되기 시작하는 것은 일단 연기력이 탄탄한 중년 배우, 그리고 연기파 배우나 성격파 배우들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없다. 여태 중년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력을 활용할 곳이 멜로 드라마 속에서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 역밖에 없었다는 것은, 한 나라의 문화적 환경이라는 차원에서도 커다란 손실이자 비극이다. 또한 성격파 배우들은 영화에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도, 드라마에서는 ‘미남미녀 주인공의 친구’와 같은 희화화된 단역으로 소모되었고 심지어는 PPL 전담 배우(PPL에 필요한 신을 모두 담당하는)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작가들 또한 그 풀이 넓어질 수있다. 심지어 SBS는 단막극 포맷(타 방송사의 베스트극장/ 드라마시티와 같은)을 포기함으로써 신인 작가의 발굴을 포기하려는 듯까지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톱 스타 몇몇의 몸값에만 편중되던 자본이, 성격파 배우들을 기용하는 한편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쪽으로 옮아가게 되면(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미국처럼 수십 명으로 구성된 팀이 가동되어 영화보다 독창적인 소재와 완벽한 플롯의 작품을 선보이는 일도 더 이상 꿈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이 시작하는 한국 장르 드라마들의 첫걸음에 무한한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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