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높고 물 깊어 고단한 울림
  • 유혁준 (음악 칼럼니스트) ()
  • 승인 2006.08.2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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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제 여름 음악 축제’의 현주소

 
장면 1. 지난 7월30일 저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30분 앞두고 로비는 이미 시민들과 관광객으로 빼곡했다. 오는 9월21일 빈 필하모닉과 함께 내한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그가 18년 전 총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의 화려했던 명성을 되찾고 세계 5대 극장의 반열에 우뚝 선 마린스키 극장의 연록색 외벽은 대단히 로맨틱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5월23일에 개막해 8월5일까지 계속된 ‘백야의 별(Stars of White Nights)’ 축제의 끝자락인데도 객석은 완전히 매진되었다. 네 시간이 넘는 공연이 끝나자 청중은 모두 기립해 가수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 음악 축제는 여타의 다른 축제와 달리 대규모 오페라와 발레를 거의 매일 무대에 올리고 있으며 이 밖에 러시아만의 자랑인 발레와 심포니 콘서트 연주회도 병행한다. 무엇보다 이 축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전체에서도 여름 시즌 동안 엄청난 관광 수입을 안겨준다. 삼성, LG를 비롯해 러시아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들이 후원하고 싶어하는 축제 1순위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면 2. 지난 8월3일 저녁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트슈필하우스에서는 올해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의 화제작이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 첫 공연이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대축제극장 앞에는 메인 후원사 ‘아우디’에서 제공한 차량에서 내리는 귀빈(VIP)과 시내 호텔에서 마차를 타고 와 입장하는 성장 차림의 남녀가 꼬리를 물었다. 오페라가 열리는 저녁 7시를 전후해 잘츠부르크 시내의 교통은 마비되었다. 나비 넥타이에 턱시도를 한 중년 신사와 아슬아슬한 드레스로 한껏 멋을 부린 여인들이 택시에서 내려 공연장에 들어선다. 이러한 현상은 축제가 시작된 7월23일~8월31일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1781년 6월8일 모차르트는 마침내 잘츠부르크의 통치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와 결별했다. 대주교는 모차르트 엉덩이를 걷어차게 하는 벌을 내린 후 그를 잘츠부르크에서 쫓아냈다. 그로부터 2백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잘츠부르크는 현재 지구상 모든 도시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공간이 되었다. 놀랍게도 모차르트가 자신을 버렸던 잘츠부르크 전체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모차르트 탄생 2백50주년을 맞은 잘츠부르크는 현재 매일 도시 인구의 세 배에 해당하는 45만명의 관광객이 머물며 천문학에 달하는 돈을 뿌리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1920년부터 모차르트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펼쳐지고 있는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 잘츠부르크 전역의 14개 공연장에서 열린 올해 축제의 두 축은 모차르트와 현대 음악이었다. 모차르트의 22개 극음악 외에도 모든 장르의 작품이 1960년 묀히스베르크 산의 바위를 뚫어 완성한 페스트슈필하우스를 중심으로 울려 퍼졌고,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들이 총집합해 음악의 성찬을 차려놓았다. 부러웠다.

이렇듯 여름에 세계 음악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음악 페스티벌은 이제 예술의 장을 넘어 막대한 돈을 끌어 모으는 황금 어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럼 공연장 수만 따지면 이미 선진국 수준을 뛰어넘는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우선 떠오르는 음악 축제는 제주국제관악제였다. 지난 8월20일 오후 8시 제주문예회관 대극장. 제주 전역에 9일간 금빛 나팔의 열기를 내뿜었던 제11회 제주국제관악제의 피날레 연주회가 국제관악콩쿠르 입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화려하게 열렸다.

기획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년 전 일본 하마마쓰에서 제8회 아시아태평양 국제관악제가 열렸을 때, 제주고교 연합관악대가 한국 대표로 참가했는데 이때 지휘를 맡았던 이상철씨(현 제주국제관악제 조직위 부위원장)는 그곳의 열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축제가 해마다 여름철이면 휴양 인파가 몰리는 ‘바람의 섬’ 제주에서 개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4천만원이라는 초라한 예산으로 시작된 제주국제관악제는 어느덧 국내 여름 음악 축제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축제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제주·인천 페스티벌 ‘알찬 성장’ 눈길

2000년부터는 여섯 개 부문의 국제관악콩쿠르를 신설했다. 이 경연은 세계 젊은 관악인들의 의욕을 높이고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마련한 한국 최초의 국제관악콩쿠르였다. 차기 축제부터는 세계콩쿠르연맹에 공식 등록되는 국내 최초의 콩쿠르가 될 전망이다. 그야말로 축제와 교육이 한자리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관악인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축제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여름 음악 축제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국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걸출한 관악의 거장들이 매년 제주를 방문하고 있다. 그동안 ‘축제’라는 거창한 꼬리표를 달고 속 알맹이는 형편없는, 그들만의 잔치가 얼마나 많이 국내에서 자행되어왔는가? 특히 ‘여름 음악 캠프’ 라는 미명 아래 자신의 제자만 모아 개인 레슨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인 일부 기형화된 캠프가 난립하는 우리의 여름 음악 문화 속에서 제주의 여름 축제는 이제 세계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4억3천만원의 예산으로 진행된 올해 축제는 ‘섬, 그 바람의 울림’을 주제로 2006 세계마칭쇼밴드챔피언십 제주대회가 동시에 열려 참가한 외국인 연주자만 2천여 명을 넘어섰다.

 
여기에 인천시의 의욕적인 지원으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인천 & 아츠’ 페스티벌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페스티벌은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이 예술감독을 맡아 단숨에 주목되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올해는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단 10주년을 맞아 아시아를 대표하는 연주자들이 모두 모여 음악을 통한 화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클래식 음악에서는 인근 도시 부천보다 열악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인천에 활력을 불어넣는 획기적인 계기가 될 전망이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제 4년차에 접어든 대관령국제음악제였다. 이 축제는 그동안 여름철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모범적인 여름 음악 축제로 꼽히며 호평을 받아왔다. 그런데 올해는 아쉽게도 천재에 가까운 강원도 수해 때문에 음악제 자체가 대폭 축소해 진행되었다.

이들 세 음악 축제를 제외하고 나면 한국의 여름 음악 축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치단체의 지원에만 의지하는 예산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국내 축제는 해당 지역 자치단체장의 임기 내 업적 과시용으로 급조된 것이 많다. 언제 해당 단체장의 마음이 돌아설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2001년 당시 무려 48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시작한 전주세계소리축제는 단체장의 과시욕이 앞선 대표적 사례다. 이후 단체장이 바뀌고 비난이 빗발치자 예산은 당장 절반 이하로 깎였다. 통영국제음악제 또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한 기업이 발을 빼자 예전의 화려함이 많이 퇴색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위의 예를 볼 때 축제 담당자들은 음악 선진국에서 개미 군단 후원자들과 후원 기업이 활발하게 참가한다는 것을 가장 큰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해당 자치단체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면 필사적인 홍보와 마케팅으로 재정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발판을 반드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관심이 결합되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언제 백야 축제나 잘츠부르크 축제 같은 세계적 축제를 만날 수 있을까. 올여름, 러시아·잘츠부르크·한국에서 여러 음악 축제를 보고 들은 의문이자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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