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뜸뿡 마을'에 우물이라는 단비를 뿌리다
  • 캄보다아 · 김상익 편집위원 ()
  • 승인 2006.09.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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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공생회, 캄보디아에 44개 건설 주민들, 건기만 되면 물 기근에 시름
 
지난 8월30일부터 9월3일까지 닷새 동안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정말로 짧은 여정이었다. 게다가 목적지는 그 유명한 앙코르와트도 아니었다. 캄보디아를 찾는 한국 관광객 수는 지난해 24만명에 달했고, 올해는 30만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 그 대부분은 앙코르와트 관광객일 터인데 캄보디아를 처음 방문하는 나는 불운하게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을 구경조차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앙코르와트가 아니었던 것에 감사한다. 9세기에서 15세기 중엽까지 인도차이나 지역을 호령했던 앙코르 제국의 옛 유물이 아니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캄보디아의 현재 모습을 목격할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출발 닷새 전 환경재단 최열 대표가 8월31일 캄보디아 캄폿 주에서 열리는 ‘생명의 우물’ 완공식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일행은 최대표 외에 지구촌공생회(대표 송월주 스님) 사무처장 조일화 스님, 녹색병원 양길승 원장, 화가 임옥상씨, 소설가 은희경씨 등 모두 16명이었다. 적지 않은 인원이었지만 사람보다는 짐이 더 많아 출국 수속을 밟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개인 짐을 제외하고도 부쳐야 할 물품 박스가 무려 26개나 되었다. 현지인에게 나누어줄 의약품과 정수기, 과자 등속이었는데, 그마저도 내미는 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내가 생명의 우물 기부 캠페인을 알게 된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지난 3월부터 여러 언론에서 소개했지만 나는 그토록 무심했던 것이다. 7월27일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의 환경음악회에서 중간 휴식 시간에 틀어준 영상을 통해 흙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캄보디아 어린이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날은 내가 ‘재능 기부’라는 낯선 용어를 처음 접한 날이기도 했다. 지휘자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공연료를 받지 않고 재능을 기부해 공연 수익 전액을 우물 사업 기금에 보탰다. 돈이 아니라도, 몸뚱이가 아니라도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는 데까지는 미처 내 생각이 이르지 못했다. 참으로 인색한 삶을 살았다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최열 대표의 동행 제안에 내가 선뜻 응했던 것은 그나마 내가 취재 보도에 작은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일행이 아시아나항공 738편으로 인천공항을 떠나 프놈펜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각으로 자정 무렵. 입국 비자를 얻느라 한 시간가량 지체한 후 첫 숙소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짐을 풀었다. 다섯 시간을 비행하는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기에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했으나 새벽 3시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네 시간 동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캄보디아 시골 마을, 우리나라 1950년대 수준

‘봉고차’ 세 대에 분승한 우리 일행은 오전 9시에 우물 완공식 현장으로 출발했다. 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네 시간을 달려야 했다. 우리로 치면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간선도로였으나 중앙선도 그려져 있지 않은 왕복 2차선 도로였다. 포장 상태가 나쁘고 중고차인 탓에 완충 장치가 신통치 않아 우리는 허리에 힘을 빼고 출렁이는 차에 몸을 맡겨야 했다. 그 길을 뒷좌석을 개조한 오토바이가 심지어 예닐곱 명까지 태우고 위험하게 질주했다. 봉고차를 개조해 지붕에 사람을 가득 싣고 달리는 광경은 한국전쟁 때의 피난 열차를 연상케 했다.

내가 탄 차에는 지구촌공생회에서 파견된 이니은 지부장(29)이 동승해 캄보디아의 현실을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프놈펜이 우리나라의 1970년대 수준이라면 시골 마을은 1950년대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7개월 전 캄보디아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어릴 때는…’ 하던 부모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치과병원 표지판을 유난히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정작 캄보디아에는 치과대학이 단 두 곳뿐이라고 했다. 물에 석회질이 많은 데다 그나마 마실 물조차 부족해서 내장 질환자와 치과 환자가 유난히 많은데 의료 인력이 부족하니 무면허 돌팔이 의사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하기는 우리나라에서도 1960대까지는 동네마다 무면허 치과의사가 있어, 자기 집에 간단한 도구를 차려놓고 버젓이 병원 행세를 하곤 했었다.

 
병원 간판보다 더 자주 눈에 뜨인 것은 주유소였는데, 말이 주유소이지 드럼통에 펌프를 달아 됫박으로 파는 식이었다. 나 어릴 적 1ℓ들이 됫병으로 석유를 사던 기억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심지어 대형 주유소 앞에도 드럼통이 놓여 있었는데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인 탓에 됫박 판매가 성행인 모양이었다.
차가 프놈펜 시내를 빠져나오자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졌다. 호남평야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드넓은 논과 그 사이사이 솟아오른 야자나무 숲은 풍요로운 농업 국가의 모습 같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기온으로만 보자면 한 해에 쌀을 서너 차례 수확하는 삼모작, 사모작도 가능하지만 하늘이 내리는 비는 얄궂게도 논농사에 적당하지 않다. 우기에는 비가 너무 많아 걱정이고 건기에는 물이 완전히 말라 기갈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 폭우가 내린 탓에 논의 상당수가 물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이니은 지부장은 “이모작, 삼모작이 아니라 일 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수확할 수 있으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발원해 베트남까지 이어지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 메콩 강을 품에 안고 있으며 평균 강우량 역시 결코 부족하지 않건만 정작 마실 물과 농사지을 용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물 기근의 나라가 바로 캄보디아이다.

마실 물과 농업 용수 절대적으로 부족해

9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로 지배를 받다가 1954년에 독립한 캄보디아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고,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에는 폴 포트 공산 정권 아래에서 ‘킬링필드’로 이름 붙여진 대량 학살을 경험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는 다시 베트남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참혹한 역사 과정을 겪느라 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었던 캄보디아가 오늘날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로 전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1인당 국민소득 3백20달러).

그 가난한 나라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 우리 일행의 목적지인 캄폿 주였다. 우물 완공식은 오후 3시 캄폿 주의 뜸쁭 마을 사원 앞 공터에서 열렸다. 그러나 마을 주민 3백여 명은 오전 11시부터 우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행사는 예상보다 크게 치러졌다. 컴사못 주지사가 직접 이 작은 마을을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했고 경호를 맡은 경찰관도 10여 명에 달했다.

 
주지사는 우물 덕분에 주민들이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아 수인성 전염병과 피부 질환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며 앞으로도, 더 많은 지원이 지속되기 바란다고 했다. 캄폿 주 전역에 1천 개의 우물을 파달라는 것이 첫 번째 요구였고, 의료진 파견과 의약품 공급 요청이 그 다음이었다. 유치원과 학교를 세우고 학용품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입을 옷이 필요하다는 부탁도 있었다. 환경재단 최열 대표는 즉석에서 그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의료진 파견은 일행 중 하나인 녹색병원 양길승 원장이 책임질 것이었다.
주지사의 말 중에 언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그는 “지금은 우기라서 주민들이 우물을 많이 이용하지 않겠지만 곧 건기가 닥치면 우물의 고마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곳 주민들은 그곳 말로 ‘삐앙’이라고 부는 커다란 물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먹을 뿐 좀처럼 우물물을 길어서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처마 밑에 삐앙을 대놓고 빗물을 담아 식수로 이용해왔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집집마다 물 항아리를 갖추어놓고 있었다. 항아리 가격은 개당 10~15달러인데 공무원 월급이 30~40달러라니 얼마나 비싸고 귀한 물건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항아리 수효로 그 집의 경제 형편을 계량할 수 있단다. 물 항아리가 두세 개인 집이 대부분이지만 일고여덟 개나 갖춘 집도 볼 수 있었다. 아주 부유한 집은 집 마당에 물 펌프를 설치해놓고 있었다. 건기가 와서 물이 바싹 마르면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이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마시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오랜 습관을 당장 바꾸기는 어렵지만 그들도 차츰 우물에 익숙해질 것이었다.

우물 하나 파는 데 50만원 소요

2003년 10월 창립한 지구촌공생회가 캄보디아에서 우물 파기 사업을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이다. 처음에는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스리랑카·몽골 등지에서 어린이 교육 사업에 치중했다. 그러다가 당시 프놈펜의 빈민촌에서 소독과 방역 등 의약 관련 활동을 하던 전근수 지부장(55)의 보고를 받고 우물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지부장은 지구촌공생회에 가입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남미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배낭여행하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다가 프놈펜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중 캄보디아 승려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우물 사업에 눈을 떴다. “나와 함께 농촌 마을을 답사하면 캄보디아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에 이끌려 캄폿 주를 돌아보는 동안 먹을 물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지구촌공생회의 우물 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곧 재정 문제에 봉착했다. 지구촌공생회가 지금까지 자체 예산으로 판 우물은 총 44개에 불과했다. 마침 환경재단은 ‘아시아에 내리는 단비 Rain’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환경재단은 2005년 12월 가수 비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와 업무 협약을 맺고 1년 동안 비의 캐릭터 사용권을 무상으로 양도받아 상품 판매 수익금 전액을 우물 사업에 투입하기로 한 바 있었다. 한편 2006년 3월22일(물의 날)~6월5일 76일 동안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 1백명으로 출발한 우물 기부 릴레이 캠페인을 통해 총 1천6백74명의 후원자를 끌어 모으기도 했다. 지난 7월에 열린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환경음악회도 그 사업의 하나였다. 이렇게 마련한 기금이 2억원에 이르렀고, 이번에 1차로 50개 우물 완공식을 갖게 된 것이다.

공식 행사에 이어 임옥상 화백의 그림 마당이 펼쳐졌다. 임화백은 마을 어린이를 전부 불러 모은 뒤 미리 준비해간 흰색 티셔츠 1백50장과 물감, 그림 붓을 나누어주었다. 그림 도구를 난생처음 만져보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서 머뭇거릴 뿐이었으나 그림 그리기 시범을 보이자 신바람을 내며 물감 칠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려넣은 티셔츠를 입고 자랑스럽게 흰 치아를 드러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없이 천진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나라”

동네 잔치에 뒤풀이가 빠질 수 없었다. 가라오케 반주에 맞추어 벌어진 춤판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코흘리개 꼬마에서, 마을 청년과 주민 모두가 함께 밤을 밝혔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이곳 농촌 마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사원 주최로 가라오케 춤판이 벌어진다고 했다(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므로 자가발전 시설을 갖춘 사원 앞마당에서 잔치를 벌일 수밖에 없다).

뜸쁭 마을 사원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에는 베트남 국경 부근의 컴사옴엇 마을까지 찾아가 완공된 우물들을 둘러보았다. 우물 상태를 점검하고 주민들의 반응을 살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수질 검사를 위한 시료 채취가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의사 파견 등 의료 지원 사업을 위해서는 먼저 수질 검사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다섯 시간 이상 차를 달려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일행은 모두 지쳐 있었다. 하루가 열흘처럼 길게 느껴지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은 프놈펜 주재 신현석 대사가 한턱을 냈다. 만찬 자리에서 신대사는 “캄보디아야말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나라”라고 말했는데 우리 일행 모두의 마음이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 이튿날 공항에 가기까지 약간 시간 여유가 있어 프놈펜 시내를 둘러보면서 캄보디아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고는 착잡한 심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온통 황금으로 치장한 왕궁과 프랑스 식민지 풍의 호화 저택이 즐비한 프놈펜 시내의 풍경은 불과 하루 전에 보고 온 농촌 모습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니 어쩌면 프놈펜이야말로 캄보디아 현실의 ‘압축 파일’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몰랐다. 관광지에서건 시장 한복판에서건 도시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던 구걸꾼들은 버스가 멈춰 서는 순간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특히 발목 지뢰에 의해 불구가 된 어린이와는 차마 눈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몇 푼의 적선이 문제 해결의 방법은 아니기에 모진 마음으로 그들의 손을 뿌리치는 일이 사실은 더 어려웠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지만, 그렇다면 극소수 특권층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캄보디아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캄보디아의 정치에도 하늘의 축복과도 같은 단비가 쏟아져 내려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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