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예와 멍에 함께 안은 ‘정치 명가’
  • 채명석(재일 언론인) ()
  • 승인 2006.09.1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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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가문, 총리 3명·전범 2명 배출…부친 아베 신타로 등 외상도 2명 나와

 
아베는 1954년 9월21일 아베 신타로(安部 晋太郞)와 요코(洋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베는 형 히로노부처럼 세이케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즉 무시험으로 세이케이 중·고등 학교·대학(법학부 정치학과)을 마쳤다. 세이케이는 돈 많은 집의 자녀나 정치가의 자제가 다니는 사립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조부 아베 히로시(安部寬, 중의원 의원)·부친 아베 신타로(외무장관)·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 등이 모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베가 시험으로 명문대에 입학할 성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인 아케에씨, '한류 팬' 자처

아베는 명문 집안 출신답게 대기업 모리나가 제과 전 사장 마쓰자키 아키오의 장녀 아키에(昭惠)와 결혼했다. 미쓰비시 상사에 근무하는 형 히로노부도 우시오전기 회장 우시오 지로의 장녀와 혼인해 1987년 6월 시모노세키 시에서 신조 부부와 함께 초호화판 피로연을 열어 정략 결혼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아베와 아키에 부인 사이에는 현재 아이가 없다. 그래서인지 아키에 부인은 아베와 달리 술도 즐기며 선거구 시모노세키의 라디오 방송국에 고정 출연하는 등 비교적 자유 분방한 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키에 씨는 열렬한 ‘한류 팬’이기도 하다. 아베와 아키에 부인은 중의원 총선거가 끝난 직후인 2005년 10월 말 1박2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아키에 부인은 서울대 강연에서 “나와 어머니는 열렬한 한류 드라마 팬이다”라고 고백해 한국 청중의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다. 아키에 씨는 또 자신이 좋아하는 한류 배우가 이병헌이라고 말해 한국측이 서둘러 이병헌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아베의 어머니 요코는 1992년에 펴낸 <나의 아베 신타로, 기시 노부스케의 딸로 태어나서>라는 책에서 자신의 집안은 총리를 세 명(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외상을 두 명(마쓰오카 요스케, 아베 신타로)이나 배출한 명문 집안이라고 자랑했다.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가 아베의 선조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요시다 시게루까지 자신들의 가계도에 넣은 것이 특이하다. 요시다 시게루는 기시 노부스케의 숙모의 사돈이다.

아베는 부친 아베 신타로보다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DNA를 쏙 빼닮았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아베 역시 자신이 아베 가의 후손보다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과 총무처 차장을 역임한 뒤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과 군수차관으로 전쟁 수행에 앞장섰다가, 패전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어 3년간 스가모 전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석방된 후 정치 활동을 개시한 기시는 1955년11월 보수 합동으로 자민당이 탄생하자 초대 간사장, 외상을 역임하다 1957년 2월 제56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둘러싸고 거센 반대 데모가 일어나자 기시는 그해 7월 총리 직을 사임했다.
기시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일본 재건책을 구상하면서 헌법 개정을 제1 목표로 정하고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자민당을 결성할 때 ‘자주헌법 제정’을 당 강령에 삽입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시는 또 정계를 은퇴한 후에도 ‘자주헌법 제정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군 점령 시절 제정된 평화헌법 개정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렇게 보면 아베가 정권 공약 1호로 헌법 개정을 내걸고 있는 데는 외조부 기시의 영향이 매우 큰 셈이다.

 
흥미있는 점은 아베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삶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아베의 친조부 아베 히로시는 1942년에 치러진 익찬 선거(도조 내각이 후보자 추천 제도를 도입해 전쟁에 비협조적인 후보를 낙선시키려 했던 선거) 때 도조 내각을 비난하면서 무소속· 비추천 후보로 입후보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경찰이 그를 미행하고 선거를 방해했지만 히로시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아베 히로시는 패전 1년 뒤 52세로 사망했기 때문에 아베는 할아버지를 직접 대면할 수 없었다. 친할아버지가 만약 결핵으로 일찍 죽지 않았다면 아베는 도조 내각의 협력자였던 외조부 기시보다는 도조 내각에 비판적이었던 친조부 칸의 영향을 받아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평화헌법의 파괴자가 아니라 수호자로 활약했을지도 모른다.

 아베의 외가인 사토 가의 원조인 사토 노부히로는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아마가타 아리토모를 길러낸 요시다 쇼인에게 군사학을 가르친 사람이다. 아베의 또 다른 외조부 사토 에이사쿠의 외삼촌인 마쓰오카 요스케는 고노에 내각의 외상을 지내면서 일본과 독일이 군사 동맹을 체결한 죄로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재판 도중 사망했다. 이렇게 보면 아베 일족은 총리를 세 명, 외상을 두 명이나 배출한 명문 집안이기는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 처지에서 보면 A급 전범을 두 명(마쓰오카 요스케·기시 노부스케)이나 배출한 ‘전범 집안’이기도 하다.

아베의 외가 쪽이 한국계 피가 섞여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한·일 협력위원회 일본측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 로비스트로도 활동했는데, 총리 재임 중 그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에게 “야마구치 현 출신인 나에게도 한국의 피가 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야마구치 현청 소재지인 야마구치 시는 611년 백제 26대 성명왕(聖明王)의 셋째 아들 림성(淋聖, 린소)이 정착해 오우치(大內) 가를 연 곳이다. 따라서 기시의 말처럼 야마구치에 뿌리를 둔 사토· 기시·아베 일족에게도 한국의 피가 섞여 있을 개연성은 있다(편집자 주 : 기시 노부스케 형제들이 자신들을 한국계로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최근 펴낸 <슬픈 열도-영원한 이방인 사백년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집안의 내력은 정치인의 행보에 큰 영향을 끼친다. 8·15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는 5촌 아저씨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산화해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다. 반면 아베는 외조부 사토 에이사쿠의 외삼촌인 마쓰오카 요스케 전 외상이 A급 전범 자격으로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다.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에 가장 크게 지지를 보낸 사람이 바로 아베 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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