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올여름 휴가를 보낸 곳은 최고의 휴양지로 꼽히는 카리브 해 연안의 바베이도스였다. 이곳에 있는, 왕년의 명가수 클리프 리처드 소유 별장에서 부인 셰리와 함께 3주일간의 달콤한 휴가를 보내던 중 영국에서는 세계를 경악시킨 브리티시 에어 항공기 폭발 기도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블레어는 ‘이미 보고받았던 사안’이라며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퇴임 일정을 밝히라는 정적들의 압력과 급강하하는 유권자 지지율 속에서도 느긋한 휴가를 즐겼던 블레어 총리는 휴가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노동당 전당대회 일정을 의식해 “이번 9월 전당대회에서는 퇴임 일정을 언급하지 않겠다”라며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이미 차기 총리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블레어였지만 노동당의 인기 하락이 남은 임기의 단축을 부채질하는 급격한 레임덕으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여겨 나온 일종의 고육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고 있는 사태를 보면 자신에 대한 진퇴 논란을 가라앉히려는 블레어의 승부수가 결국 자충수로 바뀌고 있는 형국이다.
블레어의 이 발언에 자극받은 노동당 의원 일부가 연판장을 돌려 퇴임 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동당 의원인 톰 왓슨 국방부차관은 아예 총리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표를 던졌고 노동당 의원 출신으로 내각 보좌역을 맡았던 인사들도 사표 대열에 합류했다. 여기에 언론들도 보조를 맞추었다. '더 선(The Sun)'은 아예 ‘블레어가 내년 5월 말에 노동당수 직을 버리고 7월 말에는 총리 직에서도 물러날 것’이라는 구체적 일정표를 제시해가면서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코너에 몰린 블레어 총리는 당초의 태도를 바꾸어 앞으로 1년 안에 사임한다는 약속을 내놓고 이번 9월 말 전당대회가 자신의 노동당수 재임 중 마지막이 될 것임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블레어의 ‘1년 내 사임’ 발표를 계기로 사그라들기를 기대했던 노동당 내 분열 양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까지는 노동당 권력 투쟁의 1막에 불과했다. 블레어가 ‘1년 내 사임’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파이낸셜 타임스는 <더 선>이 보도한 5월 말 사임보다 한발 더 나아가 5월4일에 블레어가 퇴임하기로 그의 정적이자 후계자로 유력시되는 고든 브라운 재무부장관과 사실상 합의했다는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사태 진정을 바라는 블레어 진영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지 않아도 블레어의 조기 퇴진 여부를 둘러싼 공방전의 이면에는 블레어 현 총리 진영과 차기 후보로 유력시되는 고든 브라운 재무부장관 진영 사이의 팽팽한 기 싸움이 자리 잡고 있다는 관측이 팽배한 가운데 터져나온 이런 보도의 정보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긴 선거운동 막 올랐다”
물론 블레어 총리의 최고 참모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고든 브라운 재무부장관이 블레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무부장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브라운 장관으로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평화적으로’ 노동당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아직까지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브라운 장관은 이번 사임 파동의 와중에서도 기회가있을 때마다 “블레어의 선택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라는 견해를 거듭 밝혀왔고, 노조나 시민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블레어의 노동·외교 정책 등에 대해서도 앞장서 지원 사격을 날렸다.
그러나 이같은 브라운의 표면적 주장과 달리 ‘브라운 장관 지지자들’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언론 보도들은 과연 브라운의 ‘진심’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구심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켜 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1년 내 퇴임 선언’으로 굴욕을 맛본 블레어 진영에서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2막의 포문을 연 사람은 얼마 전까지 노동당 내각의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찰스 클라크였다. 블레어의 측근으로 꼽히는 클라크 전 장관이 블레어의 ‘1년 내 퇴임 선언’이 나오자마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인터뷰하면서 고든 브라운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울 정도의 비난을 퍼붓고 나선 것이다. 클라크 전 장관은 브라운을 향해 작심한 듯이 ‘권력욕의 화신’이며 ‘팀워크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개인 플레이에만 능한 인물’이라고 쏘아붙였다. 블레어 진영의 이러한 반격은 ‘블레어 흔들기’를 사실상 고든 브라운이 배후 조종한 것 아니냐는 이른바 ‘브라운 음모설’에 힘을 보탰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당 주변에서는 이번 블레어 사임 파동을 주도한 톰 왓슨 국방부차관이 휴가 중에 브라운 장관을 면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번 사태에 브라운이 간접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관심이 모아지던 차였다. 물론 왓슨 차관보는 “얼마 전 득남한 브라운 장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들렀을 뿐 정치적 이야기는 없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음모설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브라운 장관도 공개적 해명에 적극 나섰다. 브라운 장관은 BBC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이 이번 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차기 노동당수 선출을 위한 경선도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블레어의 ‘1년 후 퇴임’ 선언 이후, 포스트-블레어 시대의 노동당 리더십을 놓고 ‘브라운이 아닐 수도 있다’고 블레어 진영이 공개 경고하고 나선 데 대한 반응인 셈이다. 브라운으로서는 안 그래도 노동당에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당내 파벌 분쟁과 음모설에 휘말릴 경우 자신의 정치적 미래마저 보장받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들었을 법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블레어의 퇴임 일정을 둘러싼 노동당 내 권력 투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 채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졌다. 두 사람이 함께 하원의원에 당선된 것은 지난 1983년. 보수당이 주도한 대처리즘의 영향력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노동당에서 비슷한 시기에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던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벌써 20년 넘게 권력을 분점하면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셈이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히 나눠 가질 수 없다고 했던가. 두 사람 간의 최근 물밑 갈등을 두고 BBC의 정치분석가는 “영국 정치사상 가장 긴 선거운동의 막이 올랐다”라고 묘사했다.
영국 노동당, 차기 리더십 놓고 블레어 총리·브라운 재무부장관 거친 신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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