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경기 부양책 쓴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09.22 15: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의 ‘재조정’ 언급으로 논란 일어…“소신 아닌 돌출성 발언”
 
‘리밸런싱(Rebalancing·재조정)이냐, 파인튜닝(Fine Tuning·미세 조정)이냐.’ 재무 관리나 재정 과목 강의실에서나 나올 법한 전문 용어가 난데없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웬만한 경제 전문가도 ‘뭔 소리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뜬금없는 이 화두는 싱가포르에서 나왔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9월19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연차 총회에서 “내년 성장률 전망치인 4.6%가 적정한지 따져보되 고용 등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될 때는 리밸런싱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라고 발언하면서 화제가 집중된 것이다.

지금까지 거시 경제 지표에서 불균형이 생기면 정부는 이를 미세 조정하는 데 그쳤다. 금리·통화량·재정·조세 등 거시 정책 기조는 크게 바꾸지 않고 산업 활성화 방안 같은 산업 정책을 펴는 데 치중해온 것이다. 업계나 민간 경제기관이 내수 부양책을 도입하라고 요구해도 청와대나 재정경제부는 ‘인위적 경기 대책은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권부총리의 ‘리밸런싱’ 발언이 이목을 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싱가포르 발언 이후 정부가 내년 경제 정책 기조를 경기 부양 쪽으로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성급한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재경부는 논란이 증폭되자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박병원 재경부 제1차관은 “(권부총리 발언은) 소비·투자·수출·세계 경기 같은 변수를 감안해 필요하면 거시 경제 정책의 기조를 조절하겠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국내외 변수가 나빠지면 경기 회복세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기조를 바꿀 수 있다는 원론을 천명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1분기 바닥을 치고 회복하기 시작했다. 회복세는 올해 상반기까지 이어져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5.7%까지 치솟았다. 소비와 설비 투자가 살아나는 기미가 보이고 수출은 원화 강세라는 암초를 뚫고 강세 기조를 이어갔다. 건설 경기가 당초 예상보다 나쁜 것을 제외하면 경기 확장 국면이라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하지만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자 경기 확장세가 반전했다. 우선 실질소득이 늘어나지 않아 내수 회복 기조가 꺾였다. 부동산 경기는 ‘빙하 시대’로 접어들었다. 원화와 유가는 여전히 높다. 악재가 겹치면서 소비와 투자 심리가 위축돼 하반기 경제성장률이 4%를 간신히 넘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 당초 정부가 설정한 올해 성장 목표치인 5%를 달성하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내년 경제 여건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일단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유동성 과잉 현상이 축소 조정될 징후가 뚜렷하다. 유동성 해소는 경기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세계 경제성장률은 올해 3.7%에서 내년 3.3%로 둔화될 전망이다. 미국으로 들어가는 국제 자본이 줄고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폭이 지나치게 커져 달러화 약세는 피할 수 없다. 중동 정정이 나아지지 않는 한 유가가 하락 반전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세계 정보기술(IT) 경기는 상승 기조를 이어가겠으나 공급 과잉이라는 불안 요인이 잠복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경제의 내년 경제성장률을 당초 전망치인 4.5%에서 4.3%로 축소 조정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내년 경제성장률이 4.3%에 그칠 것으로 본다.

 
이처럼 주요 경제 여건이 나빠져 정부가 경제정책 기조를 재조정한다고 가정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이 바뀔 것인가? 거시 경제 정책은 통화·재정·조세 정책으로 세분할 수 있다. 통화 정책은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여서 경제 흐름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다. 금리나 지급준비율을 변경하는 정책 따위가 이에 속한다.

통화 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재경부가 아니라 한국은행이다. 한은이 주도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콜금리(기준 금리)를 결정하고 지급준비율을 조정한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4월 취임한 이후 물가 상승 압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자 콜금리를 잇달아 올렸다. 내수 경제 활성화에 나선 정부·여당 정책과 엇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성태 총재는 “금리는 이미 경기 확장적인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경기 확장에 맞추어 금리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금리를 낮추어 소비 활성을 유도하는 것은 여의치 않다는 뜻이다. 2004년 금리 인하 조처가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영향을 가져왔던 것을 감안하면 한은이 금리 인하를 단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따라서 금리 정책은 과잉 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해 저금리 기조에서 탈피한다는 원칙은 견지하되 물가 상승 압력이 크지 않으므로 금리의 추가 인상은 자제하는 방향으로 갈피를 잡을 전망이다.

 
환율은 외생 변수이다. 환율 개입에 따른 비용은 자꾸 커지나 환율을 방어하는 효과는 미미하다. 더욱이 환율 개입으로 인한 환율 상승이 수출에 치중하는 대기업에만 유리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환율은 시장의 자율적 수급 기능을 중시하되 적정 수준에서 크게 벗어날 때만 제한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재경부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재정 정책이다. 2005~2009년 중기 재정 계획은 내년도 관리 대상 수지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1.3%로 잡고 있다. 재경부 경제정책국 실무자는 ‘관리 대상 적자 폭을 1.5%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8백6조원이므로 관리 대상 적자 폭이 0.2% 포인트 커지면 2조원이 늘어난다. 하지만 국채 2조원을 추가 발행하는 것을 재조정이라고 하기에는 군색하다. 다만 내년 상반기 재정의 조기 집행 비율을 늘리고 중장기 재정 지출 계획을 수정해 재정 집행 시기를 앞당길 수는 있다.

김범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06년 하반기 및 2007년 경제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정부는) 재정 지출을 확대하고 감세 정책을 통해 소비 여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스스로 지적했듯이 리밸런싱(재조정)은 시점과 폭이 중요하다. 박병원 차관은 “(권부총리가) 현 시점에서 경기 부양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권부총리가 아직 여건도 갖춰지지 않은 시점에서 굳이 리밸런싱을 언급할 이유가 있었을까? 관계 부처와 논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재경부 실무자마저 ‘적자 국채 추가 발행’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이번 발언은 부총리 소신에서 비롯됐다기보다 돌출성 혐의가 짙어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