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써 말 많은 ‘법조 풍파’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09.22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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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 사법 개혁 향한 소신 행보 계속…검찰·변협은 반발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斗護)하지 말고 공의(公義)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용훈 대법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레위기 19장15절이다. 요즘 들어 이대법원장이 성경을 펼쳐 드는 경우가 더 잦아졌다. 취임 1주년을 맞아 38년 전 자신의 법관 첫 부임지였던 대전과 광주 등 지방법원을 순시하면서 쏟아낸 ‘말’이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검사가 조사한 수사 기록이 나온 서류를 던져버려라. 검사는 법정에서 판사를 설득해야 하는데 수사 기록을 제출하는 역할 외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안 했다. 사법의 중추는 법원이고, 검찰과 변호사 단체는 보조 기관이다. 변호사들이 내는 자료라는 것이 다 상대방을 속이려는 문서가 대부분이다’라는 것들이다.

한 부장판사는 “표현상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검찰이나 변호사협회(변협)이 감정 싸움으로 몰고 가지 말고 이를테면 ‘검찰 조서’가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 등을 논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표현’보다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대부분 이대법원장의 발언 취지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가 평소 형사 사건의 실체는 검찰 조서가 아닌 공개된 공판 절차 과정을 통해 가려져야 한다는 공판중심주의와, 민사 재판에서 대리인이나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구술주의를 누구보다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대법원장이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는 올 1월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 잘 나와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당사자들이 말을 하고 싶은데 법정에서 말을 못하게 하기 때문에 법원과 국민 사이에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 병원에서도 어지간한 병은 말만 들어줘도 대충 치료가 된다. 하물며 사회적 갈등이 생겼는데 말을 안 들어주면 어떻게 치유가 되겠나. 재판은 사회적 질병에 대한 치유이다. 판사가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법원 개혁’에 대한 이대법원장의 생각은 법원을 떠나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분석이다. 이대법원장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1968년 1월 법관으로 임용된 그는 2000년 변호사 개업을 할 때까지 32년간 법원에만 있었다. ‘변호사로 있으면서 재판 수요자의 처지에서 5년 동안 법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판사들에게 바꾸자고 하는 모든 것은 밖에서 법원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판사만 하면 잘 모른다. 변호사를 하면서 판사 때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라는 것이다.

언론 인터뷰 등 대외 활동도 적극적

법원 주변에서는 이대법원장의 이번 발언 또한 검사나 변호사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원 내부의 변화를 역설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고 본다. 대법원장이 된 뒤 여러 차례 자신의 생각을 밝혔지만 생각만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직접 나서서 판사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될 만한 용어들을 썼다는 것이다.
이대법원장을 잘 아는 한 법조계 인사는 평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토해내는 이대법원장의 성격이 파문을 키운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예컨대 ‘재판권은 국민들이 판사들에게 맡겨놓은 것이다’라는 내용을 이대법원장은 ‘판사들은 국민들의 머슴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인사는 책임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 소탈하고 재밌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기관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당사자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때때로 실제 이상의 파문을 불러올 수 있다고 걱정했다.

지난해 9월 임기 6년의 대법원장에 취임한 이대법원장은 확실히 전임 대법원장들과는 다르게 행보하고 있다. 직전 최종영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실에서 거의 혼자 점심을 먹었다. 대법원장이 외부 사람들을 자꾸 만나면 구설에 오를 가능성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법원장은 비교적 활발히 대외 활동을 하는 편이다.

 
지난해 12월 DJ의 노벨상 수상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건배사를 했고, 올 1월에는 <신동아>와 인터뷰했다. 현직 대법원장이 행사에서 건배사를 하거나 언론과 단독으로 인터뷰한 것은 거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대법원장은 “판사들이 판결로만 말하는 것이 한계에 부닥쳤다. 이제 재판 과정에서 말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4월12일에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 16층에 있는 대법원 식당에서 영화배우 장미희씨와 탤런트 박상원씨, 가수 신이씨 등과 점심을 함께했다. 이들은 ‘국민참여 배심원 제도’ 시행을 앞두고 명예 배심원으로 참여한 유명인들이다. 사회를 본 김종훈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일반인들이 대법원 식당에서 대법원장과 식사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대법원장이 너무 정치적이다” 비판도

이대법원장은 최근에는 일선 법관들을 몇 명씩 대법원으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으며 애로 사항을 듣곤 했다. 9월25일에는 관훈토론회에 나간다. 현직 대법원장이 관훈토론회에 나간 것도 전례가 없다. 참모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신중론을 펼쳤으나 이대법원장이 의지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전남 보성 출신인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건 때 변호인을 맡았던 점을 들어 ‘코드 인사’라고 비판하지만, 이대법원장은 ‘중도파’라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조선일보 기자이고 사위는 검사이다.

이대법원장이 쏟아낸 ‘말’에 대해 검찰이 “유감이다”라는 공식 견해를 표명하고 변협이 “대법원장은 사퇴하라”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기관 간 갈등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공판중심주의나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검찰도 과학적인 수사 능력을 키워 증거로 말해야 한다’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큰 흐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갈수록 엄격해지는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 및 검찰 조서의 증거 채택 정도 등을 둘러싼 검찰과 법원의 힘겨루기는 물밑에서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흐름이 이렇다 하더라도 이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이 너무 정치적이다”라는 대검 관계자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도한 ‘말’이 계속되면 결국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사법 개혁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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