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신세계 찾아 청산에 살어리랏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6.09.2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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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때려치고 시골에나 내려갈까?’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보는 생각이다. 설사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다. 최근 정부 조사에 따르면,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44~52세) 도시민 중 은퇴 이후 농촌으로 이주해 살고 싶다는 사람이 56.3%에 달한다.

그렇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녹록한가? 서울살이는 지겹지만 시골로 내려가자니 막막하다. 귀농은 엄두가 잘 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자니 무엇을 해 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왕 시골행을 택할 거라면 은퇴 전에 결행하는 것이 나은지, 은퇴 후가 나은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귀농·귀촌자들이 있다. 대도시에 살다 각각 U턴(지방 출신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J턴(지방 출신이 타향으로 가는 것), I턴(도시 출신이 지방으로 가는 것)을 감행한 이들은 “인생 후반기를 가치 있게 설계할 청사진을 이곳에 와 비로소 발견했다”라고 말한다. ‘사오정’ ‘오륙도’ 괴담도 비껴간 이들의 인생 2막을 현장에서 들여다보았다.

비봉땅 자연미술학교, 도금옥씨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온 지 40분 가량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런 벼와 작물이 익어가는 논밭 한가운데 비봉땅 자연미술학교(경기 화성시 비봉면 유포리)가 있었다. 폐교를 개조했지만 칙칙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6년간 이곳을 거쳐간 아이들이 학교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을 알록달록 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 도금옥 교장(47)은 서양화가이다. 미대를 졸업한 뒤 인천광역시에서 15년간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규모는? 꽤 컸단다. 학원을 접고 시골로 가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다들 ‘한창 잘나갈 때 제정신이냐’며 만류할 정도였다.

 
미술학원을 하는 동안 남부럽지 않게 모은 돈을 도씨는 꼬박꼬박 은행에 저금했다고 한다. ‘재테크 꽝’다운 선택이었다.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는 남의 나라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눈여겨본 은행 직원이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저금을 하세요?” 도씨는 지체없이 답했다. “미술관을 해보고 싶어서요.”

아이들을 위한 미술관. 그것은 도씨의 오랜 꿈이었다. 학원을 하는 동안 그녀는 요즘 아이들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잡는’ 주범은, 다름 아닌 엄마들이었다. 자기가 정해놓은 목표와 틀에 맞추려 아이를 들들 볶는 엄마에게 도씨는 이렇게 맞서곤 했다. “지식이나 창의력보다 중요한 게 정서 교육이에요.”

도씨가 생각하는 정서 교육이란 간단했다. 아이들을 맘껏 뛰놀게 하는 것이었다. 교육학을 정식으로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확신했다. 자연 속에서 신나게 뛰놀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훗날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그녀가 만들고 싶어한 미술관 또한 시골의 전원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놀고 체험하며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은행원이 도씨에게 가혹한 현실을 일깨웠다. “이 돈 갖고는 (미술관 지을) 땅도 못 살 겁니다.” 눈앞이 캄캄해진 그녀에게 다시 희망을 던져준 것 또한 그 은행원이었다. 은행원은 그녀에게 충남에 있는 한 폐교를 인수해 생태학교를 만들고 싶어하던 독지가를 소개해 주었다.

이 독지가와의 동업 계획은 우여곡절 끝에 무산되었다. 대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씨는 폐교라는 공간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뒤 인터넷에 매물로 나와 있는 전국 폐교들을 검색하던 도중 그녀의 눈길을 잡아끈 것이 현재의 폐교(옛 비봉초등학교 유포분교)이다. 2001년 도씨는 이 학교를 연 8백만원에 임대했다.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다. 폐교라지만 경기도 권역에 있는 학교답게 단가가 달랐다. 그러나 도씨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라는 점을 이용해 도시 아이들을 위한 연간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미술관에 앞서 미술을 매개로 한 생태학교를 세워 보기로 목표를 수정한 것도 변화라면 변화였다.

기존 생태학교의 경우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수려한 자연 속에 자리를 잡은 것까지는 좋으나 이 때문에 여름이나 겨울 방학에만 생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교육이 일회성에 그치는 한계가 나타났다. 운영난에 못이겨 문을 닫는 학교도 속출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도씨는 초창기부터 비봉땅 학교 프로그램을 최소 1년 단위로 운영해왔다. 아이들은 매달 한 차례씩 1년간 이 학교를 찾게 된다. “안녕하세요” 대신 “잘 놀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시작되는 수업은 일요일 하루 당일치기로 이루어진다. 수업이라야 별것은 없다. 봄날 쑥 캐기, 가을날 뒷산에서 밤 따기, 비 오는 날 비옷 입고 동네 산책하기 같은 것들이다. 미술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노는 틈틈이 벽에 색칠하기, 폐타이어로 장난감 만들기, 흙벽돌로 집 짓기 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될 뿐이다.

그러나 이를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인내심과 성취감을 배운다. 미술적 감각 또한 절로 길러진다. 이 모든 것을 떠나, 비봉땅 학교에 다녀온 날이면 “아이 얼굴에 생동감이 넘친다”라는 이유만으로도 부모들은 흡족해한다.

오늘날 비봉땅 학교는 생태학교의 성공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생태학교를 세우고픈 꿈을 안고 견학하러 오는 이도 상당수이다. 그렇지만 도씨는 이들에게 “위험 부담이 큰 일임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도씨가 겪은 최대 위기는 개교 2년째 임대 계약 연장이 무산될 뻔한 일이었다. 해당 지자체가 폐교를 직접 인수해 복지 시설로 개조하려 한 것이었다.

“폐교를 인수하고 첫 1년간 학교 꼴 갖추는 데 들인 돈만 1억원이었다”라고 말하는 도씨는 그간 들인 시간과 정성이 삽시간에 허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졌다. 다행히 지자체는 계획을 바꿨다. 그러나 그 뒤 도씨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폐교 재계약이 1년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화성 땅값이 급상승함에 따라 폐교 임대료도 덩달아 뛰면서 ‘언제 맨손으로 쫓겨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안고 사는 것이다.

지난해 도씨가 충남 부여의 한 폐교를 아예 사들여 제2의 생태학교(부여땅 자연미술학교)를 만든 데는 이런 불안감도 작용했다. 비봉과 부여를 오가며 인생 2.5막을 새롭게 설계 중인 도씨는 그간 비봉땅 학교의 좁은 공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가족 프로그램이며 장애인 프로그램을 부여땅 학교에서 새롭게 시도해볼 작정이다.

고택 민박의 선두주자, 박경진씨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삽살개 두 마리가 먼저 달려와 객을 맞는다. 뒤이어 생활한복을 입고 나타나 인사를 건네는 이가 송소고택을 운영하는 박경진씨(48)이다. 송소고택이 민박 장소로 일반에게 처음 개방된 지난 2003년,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집이나 사람이나 많이 변했다. 뭐랄까, 반질반질 편안한 윤기가 흐른다.

3년 전만 해도 박씨는 고군분투 중이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 잡은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꾼이었던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지은 아흔아홉 칸 한옥이다(경북 민속자료 제64호). 규모는 웅장하되, 후손 대다수가 외지로 떠나 있는 탓에 고택의 관리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를 보수해 한옥 체험관으로 개방하자는 아이디어는 순전히 박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서울이 고향인 박씨는 청송 지역과 아무 연고가 없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잠시 다니던 직장에서 심씨 가문 자손을 직장 동료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직장을 그만둔 뒤 소규모 사업을 하던 박씨는 외환위기 때 직격탄을 맞았다. 사업을 접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터에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1년 전 직장 동료를 따라가 보았던 잘생긴 고택이었다.

박씨는 본인이 서울내기이기 때문에 고택을 일반에 개방하자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창호지에 스며드는 달빛…’에 마음 설레이는 것은 도회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시골에서는 ‘일부러 비싼 돈 내고’ 한옥에서 묵으려는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3년 전 박씨 주변 사람들도 그랬다. 말 또는 표정으로 ‘그게 되겠어?’라고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박씨는 심씨 종손과 장기 임대 계약을 맺고 청송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그에 따르면 한옥은 ‘돈 먹는 하마’이다. 1천만원 들여봐야 기왓장이나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송소고택이 자리를 잡은 지금은 오히려 전국의 한옥 소유주들이 한옥 임차인인 그를 찾아와 한옥 보존 방법을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집 상태가 좋을 경우 지방 문화재로 등록시킬 것을 조언한다고 한다.

그래도 박씨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때마침 경북 북부 지역을 상대로 정부가 시행한 유교 문화권 개발 사업(2000~2010년)이 진행되던 터라 고택 수리 등에서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 스스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왕산 주산지 달기약수 등이 있다고는 하나 청송이 볼거리가 대단히 풍부한 곳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청정 지역, 나쁘게 말하면 오지로 접근성도 크게 떨어진다. 이에 박씨는 가을밤의 고택 음악회 같은 독창적 시도로써 외지인들을 불러모았다. 지난해부터는 사과 등 이 지역 특산물 직거래 사이트를 개설해 고택 체험자와 지역 농가를 잇는 가교 역할도 자임하고 나섰다.

오늘날 송소고택 투숙객은 연간 4천명에 달한다. 박씨는 성공한 한옥 민박 마케터로서 이런저런 강의며 자문역에 불려 다니고 있다. 그러나 기회가 닿는다면 앞으로는 ‘손님들과 일일이 눈을 맞출 수 있는’ 좀더 작은 규모의 고택을 운영해보는 것이 꿈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너무 큰 규모를 유지하려다 보면 고택도 상업화 유혹에 약해질 수밖에 없어서이다.

당진 서정초등학교, 귀촌 교사 3인방

요즘 서울 지역 중장년 교사 중에는 ‘귀촌 로망’을 화제로 삼는 이가 꽤 있다고 한다. 빨리 애들 키워놓고 시골에 내려가 여유 있는 삶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이같은 로망의 실체이다.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은 충남 일대. 수도권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것이 인기 요인이다. 농어촌에 교사 부족 현상이 극심했던 2000년대 초반 충남교육청이 부족한 교사를 충원하기 위해 각종 유인책을 앞다투어 제공하면서 실제로 귀촌을 감행한 교사도 상당수이다.

충남 당진군 신평면 서정초등학교에도 이런 귀촌형 교사가 세 사람 있다. 3년 전 당진에 부임한 노기신씨(61)는 정년 퇴임을 앞두고 고향으로 U턴한 경우이다. 나머지 가족은 현재 인천에 살지만 자신만은 ‘노후라도 고향에서 살고 싶어’ 홀로 귀향을 했다고 노씨는 말했다.

 
변선안씨(58)와 김경숙씨(49)는 한동안 교사를 그만두었다가 복직하면서 지방 학교를 지원했다. 각각 서울과 인천에 남은 가족이 있다. 두 사람의 경우 자발적으로 지방행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뜻밖의 행복’을 발견했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여유 있는 생활은 기본이다. 학교 주변에 18~25평짜리 아파트를 얻어 각각 홀로 지내는 세 사람이 물고 있는 전세가는 서울의 절반 수준(4천만~5천만원)에 불과하다. 서정초등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충남교육청이 외부 교사 유치용으로 건립·운영해온 교사용 아파트촌 ‘사도마을’에 입주하면 그나마 주거비도 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까운 바닷가로 싱싱한 해산물을 먹으러 다닐 수도 있다.

더 소중한 것은, 지방 근무가 자아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변씨와 김씨는 당진에 부임한 뒤 인근 대학 교수로부터 1주일에 한 번씩 미술 레슨을 받고 있다. 솔직히 아이 키우는 동안에는 남편 월급으로 자기 공부할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는 변씨는 딸에게 “엄마, 내가 나중에 돈 벌어 미대 보내줄게”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을 정도로 미술 공부를 간절히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당진에 와서 변씨는 비로소 그 꿈을 이루고 있다. 두 사람은 방과 후 스포츠 댄스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김경숙씨는 “서울에서라면 가정주부이자 엄마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퇴근 이후 내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합법적인’ 독신 생활을 1백20% 즐기고 있다는 김씨는 2학기 개학 이후 단 하루도 저녁을 집에서 해 먹은 일이 없다며 웃었다. 학부모 대 교사라는 기능적 관계가 전부인 도시에서와 달리 지금은 친구가 되다시피 한 옛 학부모들이 번갈아 김씨를 저녁 식사에 초청하기 때문이란다.

그런가 하면 변선안씨는 서울에서 가까운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녀들 때문에 한 달에 한두 번씩 서울을 오가고 있다는 변씨는 서울에 가는 주말이면 종이접기 강좌를 수강하는 것으로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시골에서 근무하며 너무 많은 혜택을 입은 만큼 나도 새로운 것을 배워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라는 변씨는 정년 퇴직 이후에도 남편과 함께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CEO 출신 마을간사, 노정기씨

은퇴하면 골프나 실컷 치려고 했다. 미국을 횡단하며 4천km 마라톤 완주를 해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발소에서 접한 “농촌마을 CEO를 모십니다”라는 신문 기사가 묘하게 노정기씨(56)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노씨는 태평양그룹 계열사인 장원산업에서 상무이사를 지내다 지난해 은퇴한 경영인이다. 태평양그룹에 다니던 시절 제주와 전남에서 1백만 평이 넘는 녹차 단지의 재배 및 생산을 총지휘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전무하다. 서울 태생이라 시골과 인연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전북 진안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노씨는 말한다. 노씨는 올 초 진안군이 전국 최초로 도입한 마을간사 제도에 따라 채용된 간사 12명 중 한 사람이다.

 
지난 3월부터 진안군 백운면 동창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노씨는 엄밀히 말해 귀농자는 아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농촌을 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도시 사람의 전문성과 경험을 살려 농촌 마을을 살리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 마을간사 제도의 도입 취지이다(딸린 기사 참조). 이같은 취지에 공감해 간사를 자원하게 되었다는 노씨는 “나이가 들수록 내가 잘나 지금까지 잘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능력을 살려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조금이라도 되갚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간사 근무 6개월째.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씨가 마을에 합류한 뒤 하나 둘씩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자가 도착한 날 밤, 노씨는 새로 지은 마을 체험관에서 주민 대표 10여 명과 함께 마을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 시작 전, 노씨는 최근 정한 회의 규칙을 다시금 주지시켰다. ‘발언은 간단히. 5분 이내로 할 것’ ‘반대 의견이 있을 경우에는 대안을 제시할 것’ 등이었다.

기업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같은 회의 규칙에 주민들은 이미 어느 정도 적응한 듯했다. “5분 안에 어떻게 할 말을 다하란 말여”하며 투덜대면서도 발언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덕분에 과거보다 회의 시간이 단축되고 감정이 상해 다투는 일도 줄었다고 노씨는 말했다.

지난 6개월간 마을에 결재 시스템을 새로 도입한 것도 변화였다. 요즘 농촌 마을에는 이장을 비롯해 무슨무슨 위원장, 지도자 하는 직책을 가진 이가 여럿이다. 외부에서 보내오는 공문도 수신인이 제각각이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터지면 서로 “공문을 받지 못했다”라고 책임을 미루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노씨는 기업체와 같은 결재 시스템을 만들어 결재 라인에 있는 사람 중 누가, 언제 서류를 열람했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마을 회계 장부에도 손을 댔다. 회계의 투명성을 놓고 마을 주민끼리 서로 의심하는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노씨가 기업 회계 처리 방식을 일부 도입한 뒤 마을에서 돈 때문에 뒷말이 오가는 일은 사라졌다.

노씨는 진안에 온 뒤 기업체에 근무할 때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업무 일지를 쓰고 있다. 조만간 이를 책으로 묶어 귀촌하는 사람들에게 상세한 매뉴얼을 제공하고 싶어서이다. 마을 규약을 현행 법에 맞게 정비해 전국에 보급하는 것도 그가 새롭게 수행하고자 세운 미션이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휘문고 61회 동창회에 다녀온 뒤 노씨는 한층 고무되어 있다. 동기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들은 뒤 “나도 그런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다”라며 열광했기 때문이다. 돈·시간·전문성을 고루 갖춘 인력이 전국 2천여 읍·면·동을 파고들면 지역은 물론 나라 전체로도 놀라운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노씨는 요즘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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