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혈세 17조, 어떻게 새나갔나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10.0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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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 운용 외국환평형기금 큰 손실…의원들, 감사원 감사 요구
 
지난 9월27일 오후 2시부터 국회 본청 재경경제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재경위 의원들의 비공개 간담회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예정보다 시간을 훨씬 넘겼다. 의원들은 이날 비공개 간담회에서 17조8천억원에 달하는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 손실과 관련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감사원 감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반대했다. 여기에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재경부가 운용하던 외국환평형기금이 대규모 손실을 볼 당시 재경부장관이었던 김진표·이헌재 전 부총리를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간담회 긴장도를 더 높였다. 여야 의원들은 이날 다섯 시간 동안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2005년 기준 36조2천억원에 달하는 외평기금은 달러화 등 외화 가격이 급·등락하는 것을 막고 원화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1967년에 만든 기금이다. 기금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돈은 국채인 외국환평형기금 채권을 발행해 조달하기 때문에 손실이 날 경우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보통은 한국은행이 운용하지만 최종 감독권을 갖고 있는 재경부가 운용하기도 한다. 국회는 재경부가 이 기금을 운용하면서 큰 손실을 입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국회 차원에서 이 기금의 손실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6천억원 수준이던 손실 규모가 2002년 2조4천억원, 2003년 2조9천억원으로 크게 늘어나면서 2004년 국회 국정감사 때부터 지적되었다. 한나라당 김애실 의원은 당시 국회 재경위 국감에서 “외평기금 적자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사후 부실 책임을 누가 질 것이며 너무 안이하게 기금을 운용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라며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국감에서도 여러 국회의원들이 비슷한 문제 제기를 했으나 당국은 별다른 시정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2004년과 2005년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이 제안한 ‘감사원 감사 청구안’은 여당 의원들이 반대해 재경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해마다 감사원 감사가 거론될 정도로 외평기금 문제가 커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2003년 2조원대에 불과하던 손실 규모가 불과 2년 만인 2005년에는 서울시 한 해 예산보다 많은 17조8천억원까지 치솟았다.

이처럼 손실 규모가 커진 것은 환율 하락으로 인한 자연 손실 외에 정부가 환율을 잘못 전망한 탓도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과도하게 외환 시장을 방어한 결과 외환 보유고가 국제수지 흑자 규모를 넘어서서 증가해 국가 채무가 급증하고 외평기금이 손실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환율이 계속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정부는 곧 안정될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달러 가치 하락 추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외평기금 손실은 참여정부 최대의 실패에 속한다. 손실 규모가 막대한 데다 손실이 발생하는 과정 자체가 어처구니없어서 기가 막힐 정도다. 외평기금의 손실이 발생한 1차적 원인은 재경부의 무모한 ‘환율 도박’에 있다. 감사원 감사로 근본 원인을 밝혀내고 그런 손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윤건영 의원도 “외평기금의 적자 누적은 기금 재정의 불안정성을 증대시켜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여력을 저하시킨다. 뿐만 아니라 누적된 국채 잔액으로 인해 증가된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 다시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늦었더라도 외평기금의 누적 결손 규모를 줄이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재경부 “구체적 내역 밝히기 어렵다”

눈덩이처럼 커진 적자 외에 재경부가 외평기금을 NDF(Non-Deliverable Forward.차액결제선물환)에 투자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가 NDF 시장에 개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상정 의원은 “재경부는 2003년 말 외평기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NDF 시장에서 매수하기로 했다. 그 금액이 당시 국가 예산의 절반에 이른다. 파생 상품은 그 특성상 증거금은 물론 계약금까지 하루아침에 날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윤건영 의원실 관계자는 “2003년 9월 재경부는 국회에서 승인받은 것을 넘어서는 상당한 규모를 투자했다. 재경부는 재량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법을 무시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윤건영 의원에 따르면 재경부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NDF 거래를 통해서만 2조6천억원이 넘는 손해를 입었다. 이 돈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윤의원은 “일부 수출 기업들, 해외 투기 세력, 외국계 은행들이 이득을 보았다”라고 분석했다. 국민 혈세를 가지고 카지노에 가서 전문 투기꾼들과 맞서다가 빈털터리가 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33개 외국계 은행 국내 지점들은 2003년 상반기 외환 및 파생 상품을 거래하면서 3백91억원의 손실을 입었으나, 하반기에는 3천2백75억원을 벌어들였다. 또 2004년에는 1천6백72억원의 손해를 보았는데, 이런 흐름은 외평기금의 손익 추이와 비슷한 것이다.

재경부가 국민연금관리공단과 통화스왑 거래(다른 종류의 통화를 가진 사람들이 현재 시점에서 통화를 교환하고 만기 시점에 가서 같은 환율로 다시 통화를 바꾸는 파생금융 거래)를 하는 형식으로 지난 2004년 4월부터 8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2조7천억원 규모의 외평기금을 조성한 것도 논란의 도마에 올라 있다.

통화스왑 거래를 통해 외평기금은 국민연금에 달러를 준 뒤 받은 원화를 한국은행에 예치했고, 한국은행은 이 돈을 달러를 사는 데 썼다. 이런 식이면 외평기금은 국회 승인 없이 얼마든지 외환 시장에 개입하기 위해 필요한 원화를 조달할 수 있다. 재경부는 이런 부분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지만, 외평기금과 관련해 감사원 감사가 필요하다는 의원들은 재경부가 이 과정에서 기금관리기본법과 외국환거래법 등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경부는 현재 외평기금 손실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회에도 “(외평기금 손실은) 외환 관리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불가피한 정책 비용이다. 세부 내역이 안팎에 알려질 경우 투기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이길 수 없는 만큼 구체적인 내역을 공개할 수 없음을 이해해달라”며 비공개를 전제로 문서 없이 말로만 보고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7조8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했지만 누가 외평기금을 움직였고, 어떻게, 왜 이런 손실을 발생시켰는지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외평기금 운용이 국가 외환 관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비밀 유지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모든 것을 낱낱이 까발릴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에는 국민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따지는 일은 더 미룰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 실수였다’는 한마디로 덮고 넘어가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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