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탈출 계획 수포로 돌아가고...”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10.0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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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 동원호 조선족 선원 ‘선상 일기’ 공개

 
요즘 충무로의 발 빠른 영화 제작사들은 동원호 납치 사건을 영화화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1백18일간 선원 25명이 아프리카 해적에게 납치당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이야기는, 어쩌면 휴먼 스토리 영화가 아니라 스릴러 미스터리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동원호 선원들이 석방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석방 협상 과정에 대한 논란은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지난 8월24일 외교부는 MBC가 정부의 무능한 협상 과정을 비판한 데 대해 반론 보도 청구를 냈고, 이는 법정 소송으로 발전했다. 동원호 선주인 동원수산측이 보험 지급 조건을 맞추기 위해 협상을 늦추며 피랍 기간을 늘렸다거나 배를 침몰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 모든 의혹을 풀어줄 동원호 선원들은 8월9일 귀국했지만, 언론 접촉을 피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회사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중국인 동포 선원 김홍길씨가 억류되어 있는 동안 쓴 일기 전문을 입수했다. 김씨는 일기를 선실 침상에 테이프로 붙여 숨기며 몰래 기록을 남겼다. 마치 종군 일기와도 같은 이 처절한 기록은 왜 선원들이 귀국 후 PTSD(외상후 증후군)을 앓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4월4일
9시20분경 당직을 서던 실습항해사가 선교(Bridge) 망루에서 쌍안경으로 멀리 스피드보트 두 척을 발견했다. 보트는 배 오른쪽 선미 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실습항해사가 선장님에게 보고했으나 선장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면서, “사치(흑범고래의 일종)다”라며 무시했다. 어제 사치 떼를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실습항해사는 재차 선교 망루에서 쌍안경으로 확인했다. 역시나 스피드보트였다. 해적이다. 선장에게 보고를 하자 그제야 선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10시경 갑판장이 침실로 뛰어들어 급히 선원들을 기상시켰다. 이미 해적들은 50m 거리까지 붙어 마구 총질하며 고함지르고 있었다. 보트 두 대에 여덟 명이 타고 있었다. 총탄은 쉴 새 없이 쏟아졌고 동원호는 회피 기동을 하다 약 20분 후 멈췄다. 해적들은 선박에 올라 배를 장악했다. 선원 전부를 선교에 모이게 했다. 해적들은 총구를 선원들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기관총과 박격포도 보였다.
해적들은 통신실에서 보스에게 납치 성공 사실을 알리며 통쾌하게 웃고 노래를 불렀다. 40분 뒤 선박은 소말리아 해안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12시30분경 군함 두 척이 나타났다. 헬기와 전투기도 등장했다. 선원들을 전부 갑판에 모이게 하고 인질로 삼았다. 선장님과 기관장님이 앞에 서고, 선원들은 뒤에 일렬로 섰다. 해적들은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기관총으로 선원들을 겨냥했다.
미국 군함은 선박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쫓아왔다. 한참 후 군함이 경고 포탄을 쐈다. 위기 일발이었다. 해적들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결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6시경, 결국 군함은 추격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해적들은 뱃머리를 돌리는 군함을 보며 승리자인 양 기뻐 날뛰었다. 선박은 목적지(하라데레 인근 해변)에 도달한 후 닻을 내렸다(편집자 주 : 김홍길씨는 4월4일 당시 상황을 네 번에 걸쳐 일기장에 기록했다. 위는 그 네 가지 일지를 종합한 것이다).

4월7일~4월11일
해적들, 침실에 들어와 선원들 물품 소탕(압수 수색). 옷가지며 잡히는 대로 가져갔다(4월7일). 해적들, 드라이버 들고 침실 체스터 키 부수고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4월8일). 무장인들 침실 침입, 소탕(4월9일). 무장인 침실 소탕(4월11일). 해적 두 명 들어와, 침실에서 잠자겠다고 한다, 선원들은 밖으로 나갔다(4월13일). 무장인 침실 소탕 후 취침(4월14일)

4월27일
퍼런 대낮에 마약에 취한 채 술 마시고 항상 총을 들고 있는 이놈들. 언제 어느 때 흥분해서 방아쇠 당길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편집자 주 : 해적들은 마약 성분이 있는 풀을 즐겨 씹었다. 항해사 김진국씨는 “해적들은 풀을 씹고 나면 몽롱히 취해 눈에 초점이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4월28일
멀리 배 한 척이 보였다. 해적에게 무슨 배냐고 물으니 자기들이 잡아온 배라고 한다. 인도 선박인데 선원 20명이 있단다. 해적은 신바람 나서 난리였다.
우리 선박은 언제쯤 가게 되냐고 물어보니 놈은 앞으로 4일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한국 정부에서 돈을 보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 너무나 많이 속아왔기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5월10일
1시30분. 여러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노라니 아직도 회사측에서 올바른 조처가 없다는 것이다. 언론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5월10일
물이 모자라니 목욕·양치질은 바닷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한민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5월13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없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탁을 차리려고 하는데, 해적 한 놈이 못하게 식탁에 발을 얹는가 하면 침을 식탁에 뱉는 것이다. 너무나 억울해 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 놈이 나가자 나는 다시 식탁을 차렸다. 좀 지나서 해적이 자기들 조리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해적 조리사 놈이 우리 조리사 머리를 때렸다. 우리 조리사가 뭐라 말하니 그 해적 놈은 신발을 빼서 들고 조리사를 때리려 했다(편집자 주 : 해적 조리사는 10대 소년이다). 참으로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5월15일
<제국의 전설>이라는 책을 읽으려고 꺼내 들었는데 너무 어지러웠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침상에 누웠다. 지금 내가 미치는 훈련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너무나 힘들다. 어지럼증이 매우 심하다. 혹시 앓아눕지 않을는지. 기관사더러 비타민을 달라고 부탁했다. 영양 실조인지 아니면 잔병인지.

5월17일
기관장, 항해사, 갑판장, 주자, 나는 식당에 앉아 부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각자 밥은 한 공기 이상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미 하루 세 끼 식사는 두 끼로 줄였다.

5월22일
오늘은 나의 43번째 생일이다. 인질로 잡혀서 생일을 보내야 하다니. 11시20분, 해적 마을로 간 선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식 및 약품, 책,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
소말리아에서 내전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 어찌 보면 아주 불리하다. 싸움이 시작되면 우리에게 피해가 크다.
저녁 식사 때 조리사가 어떤 놈이 빵을 훔쳐 먹는다고 모두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어쩐지 기분이 안 좋다. 배고픔은 모두가 똑같은데.

5월28일
선장이 하라데레 마을로 다시 건너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회사 직원이 소말리아로 온다고 한다.

5월29일
해적이 말하기를 이틀이면 나간다고 한다. 돈을 1백50만달러 지불했다는 것이다.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순간적이나마 기분은 좋았다. 사치 이빨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5월30일
점심 식사 전 (선박 위성 전화로) 중국 대사관에서 전화가 와 내가 받았다. 내일 다시 통화하기로 했다.

6월5일

6시40분 항해사가 나더러 좀 만나자고 했다. 탈출하자는 것이다. 작전은 이렇다. 1. 다이(베트남 선원 이름)와 실항사가 선교에서 화학품·염산·수산·엔진용 펌프를 이용해 해적 얼굴에 뿌린다. 2. 동시에 항해사·나·기타 선원들이 뛰어올라 총을 잡는다. 3. 기관장·국장이 선교를 책임진다. 4. 나머지 선원은 통로를 봉쇄한다.

6월5일 밤
유서
인적사항 : 김홍길
장녀 : 김OO
차녀 : 김OO
유언 : 본인 김홍길 해적들과의 싸움에서 희생되었을 때, 모든 금액 문제 장녀 : 김OO, 차녀 : 김OO 앞으로 분배하여 주시기를 관계 부문에 부탁드립니다.
주소 : 길림성 돈화시 OO향 OO촌
김홍길 2006년 6월5일 밤

6월6일
항해사님은 아침 식사 후 나를 불러 해적 족치는 전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제는 작전이 잘 짜여져야 한다. 만에 하나 실수하면 후과는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항해사님 의견으로 보면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후과다. 회사측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지.
하여튼 먼저 때려눕히고 보자. 어차피 두 가지 길이니까. 내가 죽이지 않으면, 놈이 나를 죽인다. 힘내자.

6월8일

새벽 3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런 일이 처음 닥치다 보니, 그리고 내가 사람을 죽여야 한다니. 두렵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새벽 4시경 기관실 당직 룸에 모여 작전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원래 작전은 화학품을 사용하여 해적 얼굴을 향해 쏘면서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현재는 그렇게 못하게 되었다며 작전이 바뀌었다. 포복 전진해 사람이 직접 총하고 맞선다는 것.
무기는 기관장이 만든 칼과 테이프, 플라스틱 반도. 작전은 먼저 통로를 맨발로 침입해 살롱(?) 한 놈 먼저 죽인다. 선교(브릿지) 세 명 죽인다. 다음 침실에서 자는 두 놈 제거한다. 선장실 침실 대장이란 놈만 생포한다. 그런데 나머지 해적들의 정확한 인원 수 파악이 안 된다. 항해사도 헷갈린다. 10명이랬다가, 13명이랬다가.
이에 나는 내 견해를 말했다. 우리 작전이 너무 위험하다. 만에 하나 놈들이 눈치 채면 큰일이다. 순서를 바꿔 우선 먼저 총 든 해적부터 제거해야 한다. 선교 안에 있는 놈들은 굳이 죽일 필요 없이 양쪽 문만 지켜도 된다.
이에 항해사,기관장,태민이, 불동이 등이 “위험성은 똑같다”라며 반대했다. OOO는 나보고 “너 해적과 싸우기 싫어서지?”라고 말했다. 문제는 생명 안전이다. 선원 한두 명 생명 잃게 되면 끝장이다. 우리는 이 일을 해서 무엇 하는가.
작전은 늦어만 졌다. 결국에는 개시 못했다.

6월9일

나는 이틀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몸이 몹시 피곤했다. 9시 잠깐 의자에 누워 눈을 붙였는데 해적 조리사가 오더니 청소하라고 시켰다. 선교에 올라가니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있었다. 빗자루를 들었더니 아주 묵직했다. 자루는 쇠로 되어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소말리아인 네 명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두 놈은 나를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손목·발목을 줄로 결박하고 죽인다고 말했다. 정말 죽이려고 작심한 듯 보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풀어줬다. 빗자루가 문제였다. 자루가 쇠로 만들어졌으니 흉기로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 쇠파이프 빗자루는 OOO이 습격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뭔가 문제가 있다. 무기를 만들었으면 관리를 잘 해야지 않겠는가.

6월10일

쇠파이프 빗자루 사건 때문에 우리는 또 자유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9시 이후로 나다니는 것을 보면 총을 쏜다고 한다.

6월11일
새벽 2시 기상 당직. 새벽에는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 방한복마저 놈들이 다 가져갔다. 언제까지 시달려야만 하는지. 하루빨리 가족의 곁으로 가고 싶다. 사랑하는 딸들 얼굴 보고파.
오전 11시 납치된 유조선이 우리 배 가까이 왔다. 파나마 선박이었다. 그쪽은 물이 없이 우리 선박에서 물을 주고, 우리는 그 배에서 기름을 받기로 했다. 유조선에는 필리핀 선원 19명이 있다고 한다. 걔들은 며칠 후 떠난단다. 유조선 석방 합의금이 50만 달러. 우리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6월12일

어쩐지 오늘은 아이들 생각에 몹시 괴롭다. 언제쯤이면, 가족 곁으로 가서 애들을 상봉하겠는지. 대한민국은 오늘 이날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 선박을 포기했는지. 매일같이 근심 속에서 산다.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광명을 찾아주었으면.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해적이 나의 침실 위, 건너편에서 자고 있으니 매우 조심해야만 했다. 이제는 덮을 것도 없고 베개도 없다. 반바지를 입고는 추위를 이겨낼 수가 없다. 대신 낮에 잠을 자야 했다.
놈들 역시 전과 다르다. 언제 어느 때, 또 놈들에게 묶일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매일같이 손에 땀을 쥐고, 긴장 속에서 하루의 일과를 보내야만 한다.
어설픈 습격 작전을 준비하는 한국인 선원들은 “일이 실패해도 먼저 죽는 것은 한국인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총알은 눈이 없다.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2006년 6월13일

새벽 4시 기상. 너무 추워서 잠잘 수가 없었다. 소말리아 놈들이 잔 침실을 청소했다. 놈들 냄새가 너무나 역겨웠다.
기관사와 있는데 한참 후 소말리아 조리사 작은 놈이 목에 거는 서류 보관 주머니 줄을 가지고 오더니, 휴대폰 줄이라면서.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휴대폰이 없다고 하니까 바로 손이 올라와 뺨을 때렸다. 한참 있다 주방 식당에 들어가더니 나무 몽키를 들고 나와 협박했다.
아침 8시40분 나는 침실에서 바지를 뜯어, 이불 하나와 베개 하나를 만들었다. 해적이 한 놈 들어오더니, 나보고 뭘 만드냐고 했다. 너희들이 담요 다 가져가서 이불 만든다고 하니, 놈은 통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중간제목 : 배를 침몰시켜라

 
6월14일

11시 육지에서 작은 놈이 건너왔다. 그놈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급히 항해사를 찾았다. 담뱃갑에 쓴 쪽지를 들고 왔다. (항해사가 자고 있어서) 기관사가 대신 받아보았다. 나는 기관사 뒤에서 어깨 너머로 엿보았다. ‘죽어서 무덤 가는 날까지 비밀에 부칠 것. 앵커(닻) 자르고 배를 침몰시킬 것’.
너무나 당황한 일이다. 한국 선원들이 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편집자 주 : 이 쪽지는 선장이 써서 항해사에게 보낸 비밀 메시지였다. 항해사는 선박을 침몰시켰을 경우 선원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판단 하에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 왜 선장이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회사가 선장에게 지시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동원수산측은 “터무니없다”라고 일축했다. 선장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6월17일

11시 기관실에 있던 해적이 기관사 목에 칼을 대고 돈 2천 달러를 내놓으라며 안 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했다. 심지어 책 사이사이까지 뒤졌다.

6월18일
유조선에 있던  필리핀 선원 한 명이 술 마시고 해적에게 대들다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해적들과 싸우지 않겠다고 한다. 베트남 다이가 해적에게 뭐라고 했다가 뺨을 얻어맞았다.

6월20일
이곳에 끌려온 지도 80일이 되어간다. 대한민국은 아마도 동원호 628호를 잊어버렸나 보다. 베트남 다이는 오늘도 뺨을 맞았다,

7월7일
오후 2시경 해적이 총 가지고 장난치다 오발 사고를 냈다. 아슬아슬하다. 언제 어느 때 총 사고가 날지.

7월9일
오후 6시45분. 소말리아 한 놈이 내 딸 사진을 보더니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찾으러 놈들을 따라 나갔다. 그랬더니 두 놈이 나를 데리고 선교 앞에 가 묶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 안면이 있는 해적이 와서 풀어주었다.

7월12일
근래에 들어서 너무 불안하다. 해적들이 너무 경계한다. 전에는 농담도 잘 하던 것이 요즘에는 비디오 보러 우리들 방에 놀러 오지도 않는다. 말끝마다 모두 죽여버린다고 한다. 
해적들 사이에 긴장감이 높다. 선원 여러 명이 같이 모여 있지 못하게 한다. 어제 저녁 식사 후 갑판장 침실에 국장, 다이, 태민이가 모여 있었다는 이유로 몇 대씩 때려 침실로 돌려보냈다.
아침 9시경 여자 한 명이 해적과 함께 우리 배에 올랐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이다. 기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급히 편지를 썼다. 애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편지가 물에 젖지 않게 수술 장갑으로 싸고 테이프로 감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기자를 만났다. 애들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내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자 선생님은 흔쾌히 약속해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전해주면 선생님을 사천 유람시켜 드리기로 했다. 하루가 새롭다.
기자 선생님이 2시에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한다. 몇 마디 이야기를 했는데 너무 긴장해서, 아마 너무 흥분한 것 같다. 말로 몇 마디 얼버무렸을 뿐. 지난 번에 딸 사진 찾으려다가 해적에게 묶였던 이야기를 했다.

7월13일
유조선은 아직 출발하지 못했다. 한 달 전부터 나간다고 하던 배가 왜 저러는 건지. 돈 배달하던 놈이 날랐다는 소문이 있다. 영웅 기자 선생님. 위험 무릅쓰고 소말리아에 잡혀 있는 선박을 취재한다.

7월14일
오전 9시, 여기자 선생님이 육지로 가는 보트에 올랐다. 정작 떠난다고 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보트가 움직이기에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7월15일
소말리아 놈 말이 6시에 유조선이 출항한단다. 과연 4시25분 선박 주기 시동. 유조선이 출항했다. 유조선 떠나는 모습을 손을 흔들면서 보았다. 필리핀 사람들 기뻐 고함을 지른다. 우리는 언제쯤.

7월19일
오늘도 기관장 기관실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붙는다. 항상 기회를 노린다. 총만 손에 쥐면 된다.

7월20일
협상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기자 선생님이 취재한 것을 안기부에서 방송에 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편집자 주 : 당시 외교통상부가 MBC측에 방송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기관장 말에 의하면 이제 기자는 관계없다는 것. 방송도 못 나간다고 한다.

7월23일
해적이 교대하는 날이다. 다섯 명이 육지로 떠나고 남은 해적이 겨우 다섯 명이다. 나는 선미에 나가서 정남이보고 놈을 죽이자고 했다. 그런데 정남이는 “총 쏠 줄 모른다”라고 했다. 나는 몇 번이고 올려다보았다. 기회는 아주 좋았다. 나는 도로 식당에 가서 기관사더러 놈을 죽이자고 했다. 기관사 역시 동의했다. 올라와 보니, 아뿔사! 교대할 해적 보트가 육지에서 건너오고 있었다.
내일 또 병력 교대가 있다고 한다. 내일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해치운다.

7월24일
놈들 오늘 교대 보트가 떠나면 작전 개시. 여섯 명의 해적은 8시에 떠났다. 10시30분. 나는 하자고 했지만 다른 선원들이 좀처럼 할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 기관사 말인즉, 한국 선원은 하자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7월28일

기관사가 오더니 내 귀에 대고 내일이면 출항한다고 했다. 한참 지나 항해사도 같은 말을 했다. 내일 아니면 다음날, 너무도 속아왔다. 진짜 가는 날이 가는 날이다.
해적은 식당에 모여 풀잎(마약)을 먹고 있었다.

7월30일
기관사 말에 의하면 지난번 기자 선생님이 취재해 간 것이 MBC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628호 풀려난다고…. 과연 오늘은…. 3시20분 해적들이 선교에 설치했던 중기관총을 철수하고 갑판에 내렸다. 곧 놈들이 물러날 것 같다.
5시40분 저녁 식사. 식사 후 옷을 빨고 있는데 기관사가 오더니 군함이 떴다고 한다. 나가 보니 군함 가까이에서 우리는 풀려났다.
선장님은 식당에서 나보고 “홍길아, 우리 살아서 나간다”라며 기뻐했다.
나 역시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여기서 끝난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가족 곁으로 떠나게 되니…. 이 기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는 몸바시로 향하고 있다. 3일 거리라고 한다. 2006년 7월30일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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