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총장=집사’ 시대 계속되는가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10.16 09: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엔 대통령’ 노릇한 함마르셸드 등 ‘유엔다운 유엔’ 건설 위해 분투... 최근에는 위상 하락세.

 
“유엔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믿어요” 지난해 국내 개봉한 영화 <인터프리터>에서 유엔 직원으로 분한 니콜 키드먼의 희망 어린 대사다. “우리는 평화유지군이지 평화재건군이 아닙니다.” 올해 국내 개봉한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분한 닉 놀테가 무기력하게 내뱉는 말이다. 전자가 유엔의 이상을 말한다면, 후자는 유엔의 현실을 말해준다.

요즘 유엔(UN·국제연합)이 한국인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신문 국제면에는 매일 유엔 관련 뉴스가 넘쳐난다. 북한 핵실험 문제를 놓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자주 뉴스에 등장하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떠오른 것이 컸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유엔이 다시 이 땅에 돌아온 듯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0월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공식 추천을 받아 10월13일 유엔총회에서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인준을 받았다. 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은 2007년 1월1일부터 뉴욕 유엔 사무국 본부에서 총장(SG)으로 일하게 된다.

반기문은 유엔 창설 이래 여덟 번째 사무총장이 된다. 반기문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정치가형 사무총장이라기보다는 유엔 사무국을 관리하는 행정가형 사무총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과 성격은 시대적 흐름과 유엔 사무총장 자신의 소신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지난 60여 년간 유엔 사무총장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왜 2006년에 유엔 사무총장은 조용한 관료 스타일의 반기문이 선택되었는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영어 약자로 SG라고 불리는 유엔 사무총장은 태생적으로 정치적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없는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엔의 수장은 ‘모더레이터(중재자, 스코틀랜드 교회 관리자를 부르는 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대 유엔 사무총장을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나 캐나다 피어슨 총리와 같은 국제적 명망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유엔 상임이사국들은 당시 무명이었던 노르웨이 외무장관 트리그브 리를 골랐다. 트리그브 리는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에서 오랫동안 법무장관·상공장관·외무장관을 역임했던 관료였다.

함마르셸드, 사무총장 권한 1백20% 행사

트리그브 리는 옛 소련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1946년 초대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과 갈등을 빚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매카시 광풍에 휘말려 간첩이라는 오명에 곤혹스러워했다. 1952년 그는 강대국들의 압력을 받고 사임했다.
트리그브 리를 이어 사무총장이 된 사람은 스웨덴의 다그 함마르셸드 외무장관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을 미국 대통령에 비유하자면 함마르셸드는 존 F 케네디에 비견된다. 무엇보다 그는 ‘유엔 집사’에 불과했던 사무총장의 위상을 ‘유엔 대통령’으로 격상시켰다.

 
처음 임기 3년 동안 함마르셸드는 조용히 분위기를 익히는 데 보냈다. 그러나 1956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사태를 계기로 그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해 10월30일 이스라엘과 영국·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프랑스는 이해 당사자이고 미국은 이스라엘의 존재 때문에 직접 개입하기를 꺼렸다. 유엔 안보리는 사태를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에 함마르셸드는 안보리를 건너뛰고 유엔 총회 결의 998호를 통해 사무총장 직권으로 유엔긴급군(UNEF)를 창설해 이집트에 파견했다. UNEF는 지금의 평화유지군(PKO)의 효시가 된다.

부트로스의 유엔 상비군 창설 제안, 미국 반대로 무산

그는 1958년 레바논-요르단 분쟁도 성공적으로 중재했으며, 1960년 벨기에령 콩고가 독립한 이후 내전이 시작되자 이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함마르셸드는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안보리와 총회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긴급 조처를 취하며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을 1백20% 행사했다.
함마르셸드의 활발한 활동은 유엔이 미국의 전유물이 될 것이라던 세간의 걱정을 씻어주었다. 미국 외교관들 중에도 유엔을 아끼는 전문가들은 다들 함마르셸드의 지도력을 그리워한다. 미국 외교 전문 잡지 <포린 어페어스> 2006년 9·10월호는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덕목을 짚으며 함마르셸드의 리더십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함마르셸드가 후대에 좋은 평판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케네디처럼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도 한 요소가 된 듯 하다. 1961년 9월18일 함마르셸드는 콩고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콩고령 카탕가 지역으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가 아니라 암살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함마르셸드는 죽은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196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함마르셸드 이후 유엔 사무총장들은 사무총장의 권능과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과 끊임없이 갈등했다. 그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가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이 재직하던 때였다.
이집트 외무장관 출신의 부트로스 갈리는 1991년 11월 6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미국은 내심 캐나다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대륙 간 순환 원칙을 내세움에 따라 부트로스를 선택했다. 부트로스는 비록 아랍인이지만, 그가 기독교 신자인 데다 유태인계 아내를 두고 있다는 점이 미국과 미국을 움직이는 유대인들을 안심시켰다.

‘집사형 총장’도 재선 후에는 ‘양심적 배신’

그러나 부트로스는 사무총장에 취임한 이후 ‘강한 유엔’을 내세우는가 하면, 강대국으로 하여금 유엔을 무시하지 말라며 정면으로 맞섰다.
흔히 미국은 ‘유엔이 국제 분쟁에 무기력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며 미군의 외국 내정 개입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정작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이 유엔 평화유지군을 더 강력한 유엔 신속배치군(RDF)으로 강화하려 했을 때 앞장서 반대한 것은 미국이었다. 유엔 신속배치군은 유엔 평화유지군보다 더 강력한 중화기로 무장하며 특수 훈련을 받는다. 사실상 유엔 상비군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부트로스 갈리의 이 원대한 구상에 미국은 ‘미군의 전시작전권을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없다’라며 창설을 방해했다. 만약 이때 유엔 상비군이 창설되었다면 이후 제3세계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트로스 갈리는 유엔이 지나치게 서방 강대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비판했다. 1992년 유고 사태가 터지면서 유엔의 개입을 독촉받자 부트로스는 훨씬 더 사태가 심각한 아프리카 문제에는 관심이 없던 안보리 이사국들이 ‘배부른 사람들의 내전’에 막대한 경비와 자원을 소모하려 한다며 비판했다. 안보리 이사국들은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유엔을 배제한 채 자신들끼리 협상을 벌이다 협상이 실패하면 뒤처리를 유엔에 넘기곤 했다. 임무는 넘쳐나는데 지원은 없었다. 미국은 유엔의 예산 집행이 방만하다는 이유로, 미국의 영향력이 적다는 이유로 유엔 분담금을 10억 달러 이상 체납하고 있었다.

부트로스가 강대국들의 위선을 비판하자, 제3세계 국가들은 그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부트로스를 통해 유엔이 ‘안보리 5개국의 유엔’이 아니라 전세계인의 유엔이 될 기회가 왔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흔히 유엔 사무총장을 일컬어 ‘세속의 교황’이라고 부른다. 이 비유대로 설명하자면 1996년 유엔 사무총장 선출 선거는 ‘아비뇽 유수’에 비견될 만했다. 임기 5년을 마친 부트로스는 고령의 나이인데도 재선에 도전했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는 ‘유엔 개혁’을 부르짖는 부트로스를 지지했다.

사무총장 예비선거에서 부트로스는 투표권을 가진 이사국 15개국 중 14개국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미국의 동맹이었던 한국(비상임이사국)도 부트로스 갈리에게 표를 던졌다. 미국 대 세계의 대결 구도였으나 결국 미국의 거부권 장벽을 넘지 못했다. 9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유엔 사무총장 선출 진통은 1996년을 2주일 남겨두고 결국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이 선출되면서 끝났다. 부트로스의 패배는 향후 20년간 유엔 사무총장의 위상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코피 아난은 유엔 직원 출신이라는 점이 각국 외무장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전임 총장들과 달랐다. 정치가형 사무총장보다 행정가형 사무총장을 원하던 미국의 의중과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코피 아난은 취임 이후 유엔 내 1천여 개 직책을 폐지하고 기구 통폐합·사무국 구조 조정을 추진해 미국의 신임을 얻었다. 선출 과정에 다소 진통이 있었지만 중후한 신사 스타일의 코피 아난은 회원국들로부터도 나름의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이 믿었던 코피 아난은 2001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과거 사무총장들이 늘 그랬듯이 미국을 향해 ‘양심적인 배신’을 했다. 특히 이라크 전쟁을 두고 “이라크가 침공을 당한 날은 유엔과 국제 사회에 모두 슬픈 날이다”라고 말해 미국에 모욕을 주었다. 임기 말년에는 부트로스 못지않게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최근 북한 핵실험과 관련해서는 10월11일 미국이 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코피 아난은 200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코피 아난이 재임하는 동안 ‘유엔 상비군 창설’ 이야기는 화제에서 사라져 버렸다. 상임이사국 체제 개편 논의도 다음 총장 몫으로 넘어가 버렸다. 무엇보다 더 이상 유엔 사무총장이 ‘야심’을 품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선출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때 다그 함마르셸드가 위상을 높였고 부트로스 갈리의 도전을 이끌었던 유엔 사무총장의 원대한 꿈은 오늘날 다시 ‘유엔 집사’라는 원점으로 돌아간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