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150년 맞은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
  • 김상엽(인천국제공항 문화재 감정관) ()
  • 승인 2006.10.18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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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추사 김정희(1766~1856)의 계절이다. 추사 서거 1백50주년을 맞아 과천문화회관의 전시회를 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이 추사특별전을 열고 있다. 또 예술의전당은 연말에 초대형 전시회로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미술관들이 경쟁하듯 하나의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 전시회와 같이 기념적 의미가 있는 전시회를 다시 개최하려면 탄신 2백50주년이 되는 2016년이나 서거 2백주년이 되는 2056년이나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추사의 계절>은 더욱 뜻 깊다.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추사를 조명한다.

추사라는 인물
제자 허련이 그린 초상을 보면 추사의 인상은 대단히 온화하고 자애롭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삶을 보내지 못했다. 그의 일생은 짧은 영광 뒤에 펼쳐진 가시밭길과도 같았다. 안팎의 종척(宗戚)가문으로서 후광은 그의 출세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지만 권세가 굴레가 되어 제주도 대정, 함경도 북청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귀양으로 보내야만 했다. 유배 기간을 거쳐 유명한 ‘추사체’가 성립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상화에 그려진 달관한 듯 여유로운 모습은 쓰라린 유배 생활을 거친 후에 생긴 만년의 인상인지, 아니면 그것을 그린 허련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았던 존재였기에 그에게만 그렇게 보였는지 모른다. 추사라는 인물은 대단히 까다롭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는 증언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사의 예술
추사는 정조 시대에 태어났다. 영·정조 시대는 회화사에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만개한 시기였다. 이전의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회화관과 새로운 화법’에 의한 그림이 그려진 시기였는데, 우리가 북학(北學)이라 부르는 청나라 문화의 동점(東漸)에 따라 점차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청조의 문화는 전성기를 지나 난숙의 끝물에 다다른 시기였지만 특히 김정희를 전후한 인사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김정희의 서화관, 곧 예술관은 고도의 교양과 감상안을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극도의 이념미의 세계를 필선과 묵색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추사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영·정조 시대 이래 서화의 전개를 일변하게 했다. 고관대작·문인·묵객·여항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추사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의 고답적인 문인화 세계를 흉내 내지 않은 화가가 없었다. 추사가 추구한 것은 ‘속기(俗氣)’ ‘감각적 미’를 배제하고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로 충만한 고차원적 이념미의 세계로서 철저한 귀족 취미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속기를 배제한 고고한 예술 세계는 글씨에서건 그림에서건 다른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면모를 보였다. 누구나 추사만큼 학식과 견문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은 대개 아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학예 일치의 거장
추사는 학문과 예술이 일치하는 거장으로서 동아시아 서예 문화의 최후를 장식한 대가이다. 신분과 지체가 낮은 이들까지도 제자로 삼아 교육시켰으며 유배 생활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추사와 그 예술은 연구자와 애호가를 제외하면 대체로 접근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근대 이후 한문은 해석할 수 없는 기호가 되었고 서예는 습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추사에 대한 연구도 서구적 분과 학문 체계로 제각각 나누어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시서화·문사철·유불선을 통합한 진정한 인문학자로서 추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추사의 인간과 학문을 요즘 용어로 표현하면 학제 간의 경계를 허물고 통섭을 이룩한 새로운 인문주의자(New Humanist)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추사의 그늘
추사라고 하면 무조건 감탄부터 하고 경건한 자세로 살펴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알지만 사실 추사는 “내 낳은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인사와 교제하기에 부끄러움이 많다”라는 등 외교적 언사라고 보기에는 껄끄러울 정도로 중국 문화 숭배가 심한 인물이었다. 전통 시대의 천하관과 여러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불편한 느낌을 감추기 힘들다. 추사가 북경(베이징)에서 만나 교분을 맺은 청나라 학자·문인·묵객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희망하는’ 것처럼 당시 청나라 최고 수준의 인물들이었는가도 의문이다. 최고의 추사 연구자로 평가되는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의 저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를 우리는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 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실제와 간극이 크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추사가 천재이기 이전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노력의 화신이라는 점도 간과하기 쉽다. 중요한 것은 추사와 같이 역사적인 인물을 평가할 때 필요한 것은 시대 속에서의 정당한 위상이지 과도한 의미 부여와 포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추사전 감상 포인트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고량진미만 먹고 지내던 귀인이 하루아침에 궁벽한 유배지로 유배된다. 그렇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한 획 한 획 심혈을 기울여 글씨를 쓰고, 먹을 금처럼 아껴가며 심의(心意)를 표출한 그림을 그려 위대한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다. 이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우리가 한문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은 교육의 잘못이자 사회의 책임이지 개인의 불찰은 아니기 때문에 추사의 글을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부담을 가질 것은 없다. 추사체는 한 글자 한 글자 형태보다 전체의 구성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전체의 짜임새를 주목해야 한다. 글씨에서 같은 글자도, 그림에서 같은 붓질도 없음을 눈여겨보고 낙관의 글귀와 위치를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추사의 계절>의 감상 포인트는 추사라고 하면 감탄부터 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현란한 상찬에 주눅들지 않는 태도라 하겠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기회는 앞으로 10년 또는 40년 후에나 다시 찾아올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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