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오른 대선, 정치인 전성 시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10.2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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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이 창간 17주년을 맞아 전문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설문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1위를 차지했지만 영향력은 하락세를 보였다.

 
“선생님은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해마다 10월 초쯤이면 무작위로 추출한 한국의 전문가 집단 1천명이 이런 전화를 받는다. 이들의 응답 내용은 곧바로 미디어리서치의 중앙 컴퓨터에 입력되며, 교차 분석을 통해 순위가 결정된다. 올해가 벌써 열여섯 번째다. 설문조사 결과를 기사로 쓰는 기자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조사에서 대한민국 영향력 1위 인물은, 한 번을 제외하곤 늘 현직 대통령이었다. 올해 역시 주인공은 노무현 대통령. 지난해 쓴 문장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비슷한 결과를 전달할 수 있는 키워드가 뭘까?

노무현 대통령만큼 재임 기간 중 지지율의 부침을 심하게 겪고 있는 이도 없었다. 한때 90% 가깝던 지지율이 이제는 10%대에서 고정된 느낌이다. 더구나 집권 4년차. 이력이 붙어 물이 오른 통치권자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면서, 레임덕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노대통령에게 집권 4년차는 과거의 어떤 ‘선배’들보다 더 고통스러울 듯하다. 야당과 보수 언론은 대놓고 대통령을 조롱하고, 여당 안에서까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올해도 역시 1등은 현역 대통령인 노대통령의 몫이었다. 전문가 1천명 가운데 6백32명(63.2%)이 그를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꼽았다. 지목률은 지난해(67.4%)보다 약간 낮아졌지만 별 차이 없는 수치다.

노대통령, 종교인·교수·기업인 등이 낮은 평가

대통령 중심제 나라에서 이런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무리 레임덕으로 인해 통치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정법상 대통령이 가진 힘에는 변화가 없는 법이다. 우리의 정치 문화가 과거 몇몇 실세 정치인에 의해 좌우되던 것에서 탈피해 어느덧 체질 개선이 되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번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의 권력이 이제 개인의 카리스마를 떠나 제도화에 안착했다는 방증으로 풀이할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론인(83%) 행정 관료(78%) 정치인(72%)들이 노대통령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현실적인 권력의 출처를 잘 아는 이들인 만큼 현역 대통령의 영향력을 쉽게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종교인(44%) 문화 예술인(52%) 기업인(58%) 교수(59%) 금융인(62%) 사회단체 활동가(62%) 법조인(62%) 들의 평가는 각박했다. 노대통령이 종교인이나 문화 예술인, 교수 등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집단에 존재감이 잊혀지고 있다는 점은 청와대에서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그의 지지율이 하향 평균선을 달리는 데는 이런 원인도 있을 터이다.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와 함께 실시한 2006년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역시 정치권이 움직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인물 10걸 중에서 정치인이 무려 여섯 명을 차지했다. 대통령과 여야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경제계 인사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이건희 회장(2위, 24.2%)은 대통령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입지를 굳히는 모양새다. 1992년에 7위로 처음 톱10에 오른 이래 점차 순위를 높이더니 2004년, 2005년에 이어 3년째 계속 2위다. 삼성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순영향을 각계 전문가들이 수긍하고 있는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지목률이 지난해(39.4%)에 비해 15.2% 포인트나 떨어졌는데, 이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는 등 ‘악재’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정몽구 ‘데뷔’, 정동영은 10위권 밖으로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10위권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그가 부친의 뒤를 이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계속 평가받을지 궁금하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생전에 여러 번 톱10에 올랐고, ‘소떼 방북’을 성사시키는 등 대북 사업을 한창 벌일 때는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3위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지지난해, 지난해에 이어 3년 연속 같은 순위이다. 한나라당 대표에서 물러났지만 당내에서 가장 센 대선 주자라는 점이 그녀를 계속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에게 올해 성적표가 만족스럽지는 않을 듯하다. 지목률이 2004년 27.8%에서 2005년에는 22.4%, 올해는 18.7%로 점점 낮아졌기 때문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꼽혔다는 점과 비교하면, 이런 결과는 박 전 대표에게 뼈아프다.

박 전 대표의 경쟁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지난해와 똑같이 4위(15.3%)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시장은 이번 <시사저널> 전문가 조사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과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로 꼽혔다(관련 기사 참조).

반기문 장관, ‘유엔 총장’ 효과로 6위

야당 주자들에 비해 여권 차기 주자들은 아직 낮게 포복 중이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7위로 떠올랐지만 지목률은 3.2%에 불과했다. 고 건 전 총리는 그보다 낮은 8위(3.0%). 지난해 8위였던 정동영 전 장관은 올해는 아예 10위권에서 밀려났다.

김근태 의장의 10위권 입성은 대선 주자라기보다는 여당 당의장이라는 점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정동영 전 장관이 톱10에서 밀려난 이유도 장관과 당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때 여권의 2인자였던 정동영 전 장관의 ‘추락’은 눈에 띈다. 이런 현상은 이들이 아직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생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지표들이다.

 
고건 전 총리는 아무런 보직 없이도 이름값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두 사람보다 낫다. 고 전 총리는 차기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 2위,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인물 3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영향력의 순도를 살펴보면 허점이 드러난다. 그는 정치인 대상 조사에서 10위권 안에 들지 못했으며, 언론인 대상 조사에서는 겨우 10위에 턱걸이했다. 우선 통과해야 할 예선전의 ‘심판’들에게 저평가받고 있는 점은 ‘행정 달인’에게 반가운 뉴스가 아닐 듯하다.

현역 정치인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해에 이어 톱10에 올라 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두 계단이나 올라선 5위(3.8%). 북핵 위기 국면으로 말미암은 햇볕정책 논란과 노무현 정권의 지지율 하락 등이 ‘구관’의 이름값을 높인 원인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에는 거의 언급이 없었던 정치인들이 올해는 영향력 있는 인물 5위로 그를 꼽은 점도 이색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빼고 여권의 어느 인사도 그보다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의 ‘부활’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하다.

올해의 깜짝 스타로는 역시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을 들 수 있다. 반장관은 한국인 최초로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한국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인물 6위에 올랐다.

이 조사가 시작된 이래 16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름을 내민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그는 올해도 9위(3.0%)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미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으며 정진석 추기경이 공식적으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고 있음에도 그의 한 말씀을 얻으려는 속세의 발길은 여전하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는 있지만, 대한민국의 권력을 나누어 갖는 3권 중 2권을 대표하는 대법원장과 국회의장은 올해도 톱10에 끼지 못했다. 정치·경제·종교를 제외한 분야, 특히 문화 예술계나 스포츠 분야 인물이 10위권에 한 명도 들지 못한 점 역시 한국 사회가 아직 소프트 파워 시대에 안착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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