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살인자들 22년째 떵떵거리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6.10.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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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박영두씨 고문해 죽인 교도관들, 지금도 현직 근무

 
1980년 8월의 일이다. 스물다섯 살 청년 박영두가 있었다. 경기도 파주의 한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던 박영두는 여름 휴가차 고향인 경남 통영을 찾았다. 친구들과 고향 앞바다인 비진도해수욕장에 놀러갔는데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바다에서 난데없이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경비정을 타고 온 사람들은 완전 무장한 계엄군이었다. 계엄군은 충무경찰서로 청년들을 쓸어갔다. 청년들 중에 박영두와 친구들이 있었다. 이유가 없었다. 단지 박영두의 키가 크다(178cm, 78kg)는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를 찾는다면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박영두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전과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삼청교육대에서 4주일만 두들겨맞으면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4주 후 강원도 화천에 있는 군부대로 보내졌다. 낮에는 군부대 도로를 닦고 막사를 수리했다. 밤에는 잔인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삼청교육대에서는 교육이라고 했다.
끌려간 지 두 달 만에 화천에서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큰형 영일씨는 “삼청교육대는 큰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또 군부대에서 3개월만 고생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1981년 1월 박영두는 사회보호위원회로부터 보호감호 2년을 선고받는다. 재판은 없었다. 물론 법도 없었다. 인권은 더더욱 없었다. 감호생 박영두는 27사단 77연대 4대대에서 개·돼지보다 못한 생활을 했다. 경비병들은 지프에 감호생을 매달고 달렸고, 연병장에 유리병을 깨뜨린 후 옷을 벗긴 상태에서 포복을 시켰다.

그러던 1981년 10월1일. 감호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호생 한 명이 경비병들에게 가혹하게 폭행당했다. 감호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정식 재판을 받게 해달라’ ‘식사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라’ ‘아픈 사람을 치료해달라’. 결국 군인들이 발포했다. 이 과정에서 감호생 두 명과 군인 한 명이 숨졌다. 박영두를 포함한 감호생 주동자 18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영두는 군용 물손괴 및 특수절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3월 박영두는 청송 제1 보호감호소(현 청송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박영두는 재소자들과 공권력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83년 11월, 재소자 이상훈씨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전두환 정권 퇴진’ ‘보호감호 철폐’ 등 12개 요구 사항을 내걸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박영두는 8동 대표였다. 이 과정에서 박영두·이상훈 등 주동 재소자들은 무자비한 폭행과 함께 이른바 ‘엄중독거 사동’이라고 불리는 특별 사동으로 전방되었다. 이상훈씨는 “다른 재소자들은 담배 얻어 피우려고 했지만, 영두는 의식이 있었다. 군사재판에서 답변 한 번 못한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1984년 10월12일, 운동을 마친 후 박영두는 아팠다. 의무실에 데려가달라고 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안과장이 순찰을 돌자 박영두가 다시 의무과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상훈씨는 “보안과장이 ‘사람 안 됐네. 조처해’라고 지시했다”라고 말했다. 오후 3시께 교도관들이 박영두를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의무실이 아니라 8동 지하 조사실이었다. 이곳은 고문을 위해 만들어진 방이었다. 벽에는 방음 처리가 되어 있고, 고무로 벽을 만들어 벽에 머리가 부딪혀도 깨지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박영두는 ‘비녀꽂기’와 ‘통닭구이’( 쪽 사진 참조) 상태에서 교정봉·포승줄·고무 호스 등으로 약 2시간 동안 폭행당했다. 그는 서너 차례 의식을 잃었으나 교도관들은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물을 끼얹어가며 구타를 계속했다. 관구주임 이 아무개씨, 관구교사 박 아무개씨·이 아무개씨, 교도대원 김 아무개씨 외에도 서너 명이 가혹 행위에 가담했다.

부검 맡은 검사와 의사, 고문 흔적 무시

박영두는 오후 5시30분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열십자(十) 형태로 만들어진 목봉 2개에 꿰여 네 명의 교도관들에게 거꾸로 들린 채였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방에 오자마자 박영두는 토하기 시작했다. 박영두는 옆방에 있는 이상훈씨에게 “형님, 저 죽을 것 같아요. 죽으면 억울함을 밝혀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당한 내용을 이씨에게 이야기했다. 이씨는 벽에 고문 내용을 적었다. 이날 오후 9시께 박영두 방을 청소한 재소자 황 아무개씨는 “박영두의 온몸에 구렁이가 지나간 것 같은 피멍 자국이 있다”라고 말했다.

박영두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런 조처가 없었다. 경비 교도대원이 박영두의 동태가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10월13일 오전 5시30분께. 경비 교도대원이 다시 박영두가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전 아무개 교도관이 방으로 들어가보니 박영두는 이미 죽어 있었다. 교도관 전 아무개씨의 진술이다. “수갑을 차고 변기에 얼굴을 묻고 엎어진 채였다. 바지에는 대변을 싼 상태였고, 눈동자는 흰자만 보이고 윗니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으며 상의를 들춰보니 등 전체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스물아홉 살 청년 박영두의 생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때부터 공권력 시스템은 잘도 돌아갔다. 13일 아침 7시께 교도소 직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김 아무개 소장, 김 아무개 부소장, 이 아무개 교감 등은 경위서에 박영두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기재했다. 김 아무개 교도소장은 박영두의 사망 소식을 알린 직원을 문책했다. 당시 청송감호소 7사동 주간 근무자 한 아무개씨는 “보안과에서 인터폰으로 ‘박영두가 죽었다. 낮에 일어난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보안과에서 박영두가 심하게 난동을 부린 것처럼 쓰라고 해서 그렇게 썼다”라고 말했다. 박영두와 함께 구타당한 재소자와 박영두의 방을 청소한 황 아무개씨 등에게는 “살고 싶으면 입을 닫아라”고 협박을 했다.

14일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 소속 최 아무개 검사의 지휘로 경북 청송군 진보면 소재 ㄷ외과병원장 김 아무개씨의 집도 아래 부검을 실시했다. 압수 수색 검증 영장도 발부되지 않은 상태였다. 검사와 의사는 박영두 몸에 난 시커먼 멍을 보고도 타살 혐의가 없다고 했다. 최검사는 박영두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규정했다.
부검 의사 김 아무개씨는 사체해부검사 소견 란에 이렇게 적었다. ‘외표 소견 및 내경 검사에는 사인이 될 만한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음. …심장마비로 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 사료됨.’

검사의 지시로 박영두의 시체는 오후 2시30분에서 4시25분 사이에 교도소 내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유족은 박영두가 묻히고 난 14일 오후 8시에 소식을 처음 접했다. ‘박영두 사망. 청송교도소장’이라는 전보를 받고 가족들은 즉시 청송교도소장 앞으로 전보를 쳤다. ‘가족 즉시 출발.’ 다음날 오후 1시께 박영두의 두 형이 교도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시체를 보관할 데가 없어 즉시 매장했다”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큰형 영일씨는 “교도소 내 공포 분위기 때문에 동생의 죽음에 대해 묻기조차 어려웠다. 물어봐도 동문서답이었다. 의심이 갔지만 죽음을 밝힐 길이 없었다.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영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송감호소 재소자 동료들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가 죽자 청송교도소 재소자들이 박영두 사망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법무부장관에게 청원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가혹한 징벌이었다.

재소자들, 목숨 걸고 ‘살인의 진실’ 알렸으나

박영두가 사망한 지 1년 후 재소자들은 문제를 일으켰다. 법정이나 검찰에서 진술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재소자들은 1985년 9월25일 교도관 여덟 명을 인질로 삼아 72시간 교도소측과 대치했다. ‘박영두 사건의 가해자를 검찰에 고발하라’는 등 12개 요구 사항을 법무부에 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다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징벌이었다. 

 
그러나 박영두의 동료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상훈씨를 비롯한 재소자 여섯 명은 박영두 사건을 알리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꾀를 냈다. 이들 여섯 명은 각자 15cm가량 되는 칫솔을 삼켰다. 그런데 다섯 명은 항문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칫솔 하나가 진 아무개씨의 몸 안에 남았다. 결국 진씨는 고통을 당하다 안동의료원에 외래 검진을 나갈 수 있었다. 이때 박영두 사건의 실상을 적은 쪽지를 화장실에 남겨놓아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8년 7월 이상훈씨가 안동지청 검사에게 조사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이씨는 박영두 사건을 포함한 인권 침해 사건을 고소·고발했다. 하지만 2년 동안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담당 검사가 10명이나 바뀌었다. 결국 증인과 목격자 등 핵심 인물을 아무도 조사하지 않은 채, 1990년 6월 의성지청 검사 김 아무개씨는 교도관들에게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김 아무개 검사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건당 처리 기간이 정해져 있어 월말이 되면 그것을 점검받는 식이다. 그래서 검사가 사건을 꼼꼼히 처리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현정덕 조사관은 “검사들이 서로 핑퐁을 치며 조사를 아예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 검사가 다른 검사들 대신 코 풀어줬다고 했다. 좀 양심적인 검사가 있었더라면 진실이 훨씬 빨리 밝혀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상훈씨는 다시 법원에 이의 신청을 냈으나 1992년 박영두를 폭행한 교도관들은 무혐의 처리되었다.
2000년 10월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나서야 박영두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다. 2006년 8월이 되어서야 박영두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뒤에서는 ‘흉악범이 무슨 민주 투사냐’는 식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를 살해한 교도관들은 아직 현직 교도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처벌은 물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없다고 한다. 사건을 은폐한 검사들과 의사의 자리도 굳건하다.

지난 9월26일 서울고등법원은 “국가는 박씨 유족에게 2억3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배상금 지급 판결을 받았다. 수지 김 사건과 박영두 사건의 소송을 진행한 이덕우 변호사는 “수지 김·박영두·최종길과 같은 희생자들 덕분에 인권 신장이 이만큼이라도 되었다. 당연히 고마워하고 빚진 심정이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반인권적 국가범죄특례법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11일 국회의원 1백45명이 반인권적 국가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 법안을 발의했다. 반인도적 범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ㆍ고문 등 중대한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거나 수사가 불가능했던 기간에 정지되도록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수사권을 쥐고 있는 국가기관에 의해 은폐된 범죄 행위에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법 정신에 위배된다. 유엔에서도 1968년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시효 부적용 조약’을 채택했고, 미국·프랑스·독일 등 선진국 대부분이 이 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안은 국회 법사위원회에 회부조차 되지 않은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싸우느라고 인권을 살필 겨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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