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올리는 ‘반전 반핵가’
  • 공숙영(퍼슨웹 대표·변호사) ()
  • 승인 2006.10.2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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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북한의 10월9일 핵실험 발표 바로 다음 날 조카의 돌잔치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이기도 했다. 여느 돌잔치와 크게 다른 건 없었지만, 국어교사로 정년 퇴직하신, 조카의 할머니인 사돈어른께서 첫 손주의 돌을 축하하기 위해 손수 작성해오신 메시지를 하객들 앞에서 낭독하신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네가 맞이할 미래의 세상은 평화로 가득하길 바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손주가 살아갈 이 불안한 세상에 대한 할머니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져 숙연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윽고 가족친지들과 한담을 나누는데, 때가 때이니만큼 곤두박질친 주식시장 이야기부터 나왔다. “결국 다시 오르겠지 뭐, 별 일 있겠어?”

갑자기 전쟁이 나는 줄 알고 난리가 난 때가 아주 오래 전 나 어릴 적에도 있었다. “지금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격앙된 목소리의 민방위 방송을 듣자마자 엄마는 식료품을 사러 나가야겠다고 서두르면서 방송 아나운서 못지 않게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실제 상황이래, 실제 상황!” 나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안네 프랑크처럼 일기장을 펼치고 몇 줄 썼다. ‘전쟁이 났다. 나는, 우리는, 우리 나라와 민족은 어떻게 될까?’ 기타 등등. ‘실제 상황’은 다행히도 해프닝임이 곧 밝혀졌다. 그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비록 결과적으로 가상의 위험이었으나, 전쟁의 위험에 처한 기억은 지금까지 이렇게 남아 있다.

북한의 이번 핵실험 발표 직후에는 생필품 사재기 현상 같은 건 없었고 주식시장도 시간이 좀 흐르자 다시 평상시 동향으로 복귀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북핵 내성(耐性)’이니 ‘체념의 경제학’이니 하는 식의 평가가 뒤따르고 있는데, 경제 주체가 침착하고 냉정해졌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와 안보 불감증이라고 염려하는 견해 중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보기에는 대중 심리의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것 같다. 기존의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다가 새로운 불확실성을 맞닥뜨리고 나니 생각을 아예 멈춘 게 아니냐는 조심스런 분석도 일리 있게 들린다.

사재기도 없고 주가 폭락도 없이…

2003년 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이라크 여인들이 미국의 공습 직후 꽃을 사다 심었다는 외신 기사를 보고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은 기억이 난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자의 경구가 처절하지만 버젓하게, 일상으로 실현된 것이다. ‘북 핵실험 발표 바로 다음 날 이렇게 멀쩡히 돌잔치하면서 웃고 떠드는 우리를 외국인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까?’ 언론 기사를 보니 한국인 유학생들더러 고국으로 돌아가 참전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미국 현지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외국인을 위한 국내 투자 가이드 같은 자료에서 투자의 위험 요소(Risk Factor)로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거론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제는, 전쟁도 그냥 전쟁이 아니라, 핵전쟁 위험이라고 쓰이게 될 판국이다.

대학 시절 학교나 거리에서 자주 불리던 이른바 투쟁가 중에, ‘반전반핵 양키고홈’이라고 크게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반전반핵가’라는 노래가 있었다.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라는 가사가 떠오르면서 오랜만에 이 노래가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 이 시국에 이 노래가 생각난 게 나만은 아닌지 관련 기사들이 나온다. 이 노래를 만든 이는 지금은 교수인데 1986년에 “반전반핵 양키고홈”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한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열사 사건이 창작 동기였으며, “반핵이 좌·우 어느 한쪽의 전유물인 양 여겨져서는 안 되며,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는 없어져야 한다”라는 게 현재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북한의 핵실험 및 핵보유를 명백히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어떻게 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햇볕정책 즉 포용정책 전반이 완전 실패했으니 어서 폐기하자는 입장에도 선뜻 찬동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되면 결국 북한과 미국이 밀고 당기며 여기까지 몰아온, 한반도 전체를 위협하는 냉전적 대결 구도라는 수렁 속으로 더더욱 빠져들어가지 않겠는가. 포용정책의 한계를 냉엄하게 인식해 새로운 좌표를 찾아나가되 이 복잡다단한 상황의 당사자 겸 특수 관계자로서 우리 ‘남한’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간신히 쌓아올린 평화 원칙을 섣불리 포기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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