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코털’을 건드렸으니…
  • 모스크바 · 정다원 통신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10.2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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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러시아 정보장교 체포했다 가혹한 ‘경제 봉쇄’ 당하고 신음

 
러시아와 그루지야 외교 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 미국은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러시아에 북한에 대한 경제 봉쇄를 요청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북한보다 그루지야 경제를 봉쇄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사건은 그루지야가 러시아 장교 네 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고, 러시아가 즉각 강력한 외교적 대응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해묵은 양국 간 갈등의 뇌관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나아가 양국 간 긴장은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 사회로 파급되는 양상이다. 옛 소련의 종주국 러시아가 과거 형제의 나라 그루지야를 강력하게 압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9월27일 그루지야 내무부는 자국 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정보장교 네 명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 후 재판에 회부해서 크렘린을 분노하게 했다. 러시아측의 대응은 신속했다. 러시아 정부는 즉각 비상 여객기를 트빌리시(그루지야 수도)로 급파해서 그루지야 주재 외교관 및 가족들을 모스크바로 철수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악성 메일로 신경 날카롭게 하지 말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그런 행위는 어느 누구도 용납치 않겠다”라며 그루지야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러시아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놀란 그루지야는 자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벨기에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단체를 중재자로 내세워 체포했던 네명 정보장교들의 신병을 러시아측에 인도했다. 발레리 체첼아쉬빌리 그루지야 제1 외무차관은 ‘러시아측의 대사 소환과 외교관 철수’를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양국은 상대방 영토에서의 첩보 활동 금지 협정을 맺었는데 러시아측이 이를 위반했다”라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양국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러시아에 외교적 위기를 만들지 말고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고,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그루지야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의사가 없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보복은 매서웠다. 외교관 철수에 이어 즉각 그루지야 국민들에게 입국 비자 발급을 중단하는 한편, 교통망 차단·서신 교환 중단·송금 금지 등 일련의 외교·경제적 조처로 그루지야를 압박했다.

이들 조처 중에서 송금 금지는 그루지야 경제를 강타했다. 러시아에서 일하는 1백여만 그루지야 시민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돈줄이 차단되었기 때문. 이들이 올해 상반기에 그루지야로 보낸 돈은 자그마치 2억2천만달러(US)에 이른다. 그루지야 중앙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이 돈은 그루지야 국내총생산(GDP)의 14.6%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나아가 러시아는 불법 비자로 돈벌이 하는 그루지야 노동자들을 엄격히 색출해 추방하는 한편, 그루지야 대사관이 운영하는 건물을 폐쇄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그루지야 외교 분쟁은 엉뚱하게 카지노 산업에 불똥이 튀고 있다. 러시아 굴지의 카지노 ‘크리스털’과 ‘골든 팰리스’가 경찰과 검찰의 기습 검열을 받고 탈세 혐의로 졸지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들 카지노는 그루지야 출신들이 운영하는 업소로 밝혀졌다. 그루지야의 돈줄을 발본색원겠다는 얘기다.

카지노 통제는 러시아 정부가 때를 기다렸던 바이다. 러시아인보다 도박을 즐기는 민족이 또 있을까. 19세기의 유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광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유가로 돈이 넘쳐나자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난 것이 카지노였다. ‘카지노 마니아’가 양산되고 심리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는 ‘카지노 정신병자’들이 급증할 정도로 카지노 도박은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정부는 대대적인 카지노 정리 작업에 착수했다. 대외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 셈이다.

북한에는 솜방망이, 그루지야에는 철퇴

그루지야가 걱정하는 것은 러시아의 다음 절차이다. 러시아가 가스와 전기를 중단하면 그루지야 경제는 파경을 맞을 것이 뻔하다. 푸틴 정권은 독립국가연합(CIS)에 대한 에너지 공급 혜택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왔다. 이들 국가에 싼 가격으로 공급하던 석유·가스를 국제 가격 수준에 맞추어 공급하겠다는 계산에서다. 1차 희생양은 우크라이나였다. 미운털이 박힌 탓이다. 올해 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던 가스 가격을 세배 인상했다. 그루지야에도 기존 가스 가격을 두 배로 올려 받을 심산으로 협상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씨앗은 그루지야에 대한 러시아의 경제 제재이다. 지난 3월 러시아는 그루지야산 포도주와 생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그루지야 경제의 주 수입원인 이들 상품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그루지야의 경제 상황은 심각해졌다. 그루지야의 요청에 따라 국제 사회는 러시아측에 그루지야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어줄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묵살했다.

러시아와 그루지야 간 갈등의 뿌리는 깊다. 옛 소련이 붕괴된 이래 두 나라는 내내 불협화음을 내었다. 이런 양국 간 갈등은 미국에서 법률학을 공부한 사아카시빌리가 2003년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장미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골이 한층 깊어졌다. 친서방 성향인 사아카시빌리 대통령은 나토 가입을 추진해서 이 지역을 영향권 아래 묶어두려는 러시아의 신경을 자극했다. 나아가 러시아가 그루지야에서 분리 독립을 쟁취하려는 아브하지야와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더불어 그루지야는 자국 영토에 있는 러시아 군사 기지를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옛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도 러시아는 트빌리시에 군 참모부를 두고 바투미와 아할칼라키 등 두 곳에 군사 기지를 운용해왔다. 지난해 말 양국은 2008년까지 철군을 완료하는 데 합의했다.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우리는 그루지야에 군 기지를 남겨둘 의사가 전혀 없다. 합의 일정에 따라서, 또는 일정을 앞당겨 철수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반 사프란추크 워싱턴방위정보 모스크바 지국장은 “러시아의 철군 결정은 트빌리시의 대외적 선전 무기를 박탈하려는 의도다”라고 관측했다.

양국의 외교 관계가 위기 상황으로 치닫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로 사태 수습 문제를 논의했다. 이 대화에서 푸틴 대통령은 트빌리시를 ‘파괴적인 정권’이라고 몰아붙이며, 사아카시빌리가 카프카즈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 이번 사태의 주역인 사아카시빌리의 의도는 무엇일까? <세계문제>의 표도르 루캬노프 러시아 잡지 주간은 ‘국민들의 어려운 삶을 담보로 삼아 유엔과 국제 사회에 의존해서 아브하지야와 남오세티아를 재통합하려는 속셈’이라고 파악하고 “사아카시빌리는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러시아의 경제 제재 및 정치적 압력이 그루지야 내부를 불안하게 만들어 정권 교체도 가능할 상황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라고 예측했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 봉쇄 결의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반면 그루지야에 대한 경제 봉쇄는 신속하고 가혹하다. 모스크바에서 북한은 멀고 그루지야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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