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추억들, 이름표를 달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10.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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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역사·교회·전통 가옥 등 등록문화재 지정…당시의 생활상, 상징으로 일깨워
 
‘근대(近代)’가 우리 곁에 오고 있다. 지금까지 근대는 우리에게 잊고 싶은 시대, 지워버리고 싶은 모습이었다. 일제 식민 시대,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민족의 수난·갈등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민족이 분열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게다가 그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질곡의 흔적 또한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이처럼 개발 시대에 ‘근대’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 근대의 흔적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과거와 현대를 잇는 근대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동적이고 위축된 것에서 벗어나 좀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 시대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전공하는 서울대 강사 목수현씨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야말로 정면으로 대면한다면 그 역사적 의미를 다시 새겨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흐름이 반영되어 도입된 것이 등록문화재 제도다. 문화재청이 2001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는데, 10월27일 현재까지 2백78건이 등록되었다. 근대 문화유산인 등록문화재는 아직 국보·보물과 같은 문화재로 지정하는 기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2004년 문화재청이 펴낸 ‘한국의 근대 문화유산’ 서문에서 “이 제도가 조금 일찍 시행되었다면 개발 과정에서 사라져간 많은 귀중한 근대 문화 유산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이라도 이 유산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자칫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문화재보호법은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경과한 것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화재를 등록문화재로 등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역사·문화·예술·종교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되고 있으며, 그 가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 기술 발전 또는 예술적 사조 등 그 시대를 반영하거나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따위다. 그러나 반드시 50년이 안 되었더라도 긴급한 보호 조처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 등록은 해당 문화재의 소유·관리자나 관할 지방자치단체장이 문화재청에 등록을 신청하고 문화재청이 심사를 거치는 순서를 밟는다.

이런 취지를 반영하듯 등록문화재를 살펴보면 그것이 우리 근대의 거울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과거 100여 년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에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시대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급수탑·간이역 등 ‘향수 실은 기차’의 자취 가득

우선 눈에 띄는 것이 기차와 관련된 문화재들이다. ‘근대는 기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왔다’는 말이 있다. 기차는 1896년(고종 33년)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우리 민족에게 처음 선을 보였다. 지금은 자동차에 밀려 예전 같지 않지만, 어릴 적 초등학교 선생님의 단골 질문은 “기차 타본 사람 손들어!”였다. 한 반 60명 가까운 아이들 가운데 잘해야 한둘이 손을 들었다. 기차를 타보았다는 것은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는 징표였고,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기차는 개발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증기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은 이름도 생소하다. 일제 시대에 만들어져 전국 각지에 있는 이런 급수탑 10개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에 있는 등록문화재 48호 ‘연산역 급수탑’은 1911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급수탑이다. 대전~연산 간 호남선 증기 기관차에 1970년대까지 물을 공급했다. 다른 급수탑들이 대부분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반면 이 급수탑은 화강암인 돌을 쌓아 만들었다. 조형미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순히 기차에 물을 공급하던 기능을 넘어 역사적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급수탑도 있다. 강원도 최초의 급수 시설로 철원읍 사요리에 있는 등록문화재 제160호 철원수도국지 내 급수탑이 그것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약 3백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이 밖에 경남 울산 남창역사, 전남 순천 원창역사,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 서울 신촌역사, 경남 창녕 남지철교, 원주 반곡역사, 전북 익산 춘포역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 보급창고, 진주역 차량정비고 등 기차나 철도와 관련한 등록문화재들이 많다. 문화재청이 지난 9월27일 경춘선 화랑대역, 중앙선 구둔역 등 간이역 12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 상태여서 기차·철도 관련 등록문화재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전국 간이역 65곳을 대상으로 자료 및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기차가 산업화의 격랑을 몰고 왔다면, 종교적으로 근대를 상징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서양에서 교육받은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급격히 세를 늘린 기독교는 일제 시대 때 민족운동에 가담하면서 우리 삶 속에 뿌리내렸고, 산업화 시대 성장주의와 맞물리며 십자가 수를 늘려왔다. 1900년을 전후해 이 땅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들이 이제 문화재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보나 보물 상당수가 불교와 관련 있는 반면 등록문화재 상당수는 기독교와 관계가 있다. 불교 관련 등록문화재는 ‘일본 사찰’인 제64호 군산 동국사 대웅전이 유일하다.

현존하는 유일한 개신교 한옥 교회인 충남 강경 북옥감리교회,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호남 지역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 1913년 깊은 산골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 당시 지역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건축 활동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지역사적·종교사적·건축사적 의미가 큰 전북 장수 장수천주교회 수분공소 등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충북 옥천 삼양리 천주교회, 충북 진천 읍내리 천주교회, 강원도 철원 감리교회, 전남 여수 애양교회, 남제주 강병대교회 등의 이름도 보인다.

일세를 풍미했던 소설가·시인·화가·가수들의 가옥도 상당수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 가옥은 1930년대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준 초현실주의 작가 이상이 <오감도>, <날개> 같은 작품을 쓴 산실이다. 지금은 김수근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김수근문화재단 관계자는 “재단이 사들인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화가 이중섭이 유일한 개인전인 미도파화랑 전시회를 준비하던 곳인 종로구 누상동 이중섭 가옥,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옛집, 한국 조각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권진규 선생의 체취가 그대로 살아 있는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 아뜰리에’ 등도 등록문화재다.

 
이들 말고도 화가 배렴(종로구 계동), 소설가 박종화(종로구 평창동), 음악가 홍난파(종로구 홍파동),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살던 돈암장(성북구 동소문동), 화가 이상범(종로구 누하동) 가옥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서울에 있는 이들 가옥을 둘러보는 ‘근대 가옥 기행’은 새로운 답사 코스로 주목되고 있다. 전남 화순 동북면에 있는 화가 오지호 생가, 경남 진주 하촌동 소재 가수 남인수 생가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관 김지성 사무관은 “이들 가옥은 건축적인 측면보다도 인물에 주목해서 등록문화재로 등록시켰다”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이 건물 등을 등록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소유자의 협조가 절실하다. 소유자가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소유자에게 상속세 징수를 유예해주고, 재산세와 종합토지세를 50% 감면하며, 등록문화재를 보수할 때 보수비 전액을 국고 및 지방비에서 보조키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등록문화재가 있는 부지에 건물을 세울 경우 용적률 등 건축 기준도 크게 완화했다.

개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최남선·현진건 집

지금 법대로 국고나 지방비로부터 보조를 받지 않았다면, 소유자가 등록문화재 건물을 마음대로 헐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김사무관은 “등록문화재 제도는 소유자의 협조를 전제로 운용한다. 문화재로 등록하려는 건물을 소유한 사람들이 개발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실제로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있던 최남선의 집이나 서울 종로구 부암동 소재 소설가 현진건의 집, 광복 이후 처음으로 자주 국가 건설을 논의했던 곳인 종로구 재동 소재 건국준비위원회 건물, 서울 중구 초동에 있던 스카라극장 등이 이런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스카라극장의 경우 2005년 11월, 문화재청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를 하자 12월6일부터 건물 현관을 허물고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사태는 스카라극장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명동 옛 대한증권거래소 건물과 옛 일본은행 진해지점 등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이 예고된 네 개 건물이 등록 예고 기간 중에 건물을 철거했다. 후손이나 소유주들은 ‘역사’보다 ‘돈’을 택했던 것이다.

 
외국에도 등록문화재 제도가 있다. 특히 1990년부터 문화유산 지정 등록 작업을 진행해온 일본은 취지 면에서 우리와 매우 유사하다. 일본도 우리처럼 지정문화재와 등록문화재를 두고 있다. 미국은 지정문화재 성격으로 등록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취지나 운영 면에서 다르다. 주로 기념비적인 건물을 중심으로 지정하고 있다.

등록문화재가 주목되는 것은 우리네 시각이 과거와 달라졌고, 삶이 좀더 여유로워졌음을 보여준다. 이제 박제화한 박물관 속의 유물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이 그대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근대 문화유산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이다.

‘근대’가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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